왕국의 사료편찬관
마엘 르누아르 지음, 김병욱 옮김 / 뮤진트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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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전작 읽기에 도전하면서 프랑스의 역사와 정치, 문화에 관심이 생겼다. 마엘 르누아르의 소설 <왕국의 사료편찬관>은 이 작품이 2020년 공쿠르상 최종심과 프랑스 아카데미 소설 대상 최종심에 오른 작품이라고 해서 읽고 싶었다. 막상 읽어보니 프랑스가 아니라 오랫동안 프랑스의 보호령이었던 모로코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덕분에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모로코의 현대사도 알게 되고 모로코와 프랑스의 관계도 알 수 있어 유익했다. 


이야기는 1929년생이며 1961년부터 1999년까지 재임한 모로코 국왕 하산 2세의 어린 시절 학교 친구였고 성인이 된 후에는 왕국의 사료편찬관으로 재임한 압데라마네 엘자립을 화자로 진행된다. 총명함을 인정받아 (훗날 하산 2세가 되는) 왕세자가 다니는 '콜레주 루아얄(왕실 교육 기관)'에 입학한 엘자립은 언젠가 왕세자의 최측근이 되기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한다. 그 결과 왕(하산 2세의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기도 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가기도 한다. 


하지만 머리가 좋고 학업 성적이 뛰어나다고 해서 최고 권력자의 마음에 들 수 있는 건 아니다. 더욱이 그 최고 권력자가 학창 시절 동급생이었고 자신보다 성적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로부터 미움을 사거나 견제를 당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엘자립은 남부러울 것 없는 학력과 실력을 지녔지만 도통 출세와는 인연이 없었다. 유배나 다름 없는 외딴 지역에 보내지거나, 사료편찬관이라는 - 이 자리에 배치된 게 은총인지 실총인지 알쏭달쏭한 자리에 배치된다. 


이 소설의 백미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이런 식으로 왕과 미묘한 관계인 엘자립이 생애 처음으로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에필로그다. 작가는 1999년 가을 당시 과제를 하기 위해 즐겨 찾던 카페에서 우연히 압데라마네 엘자립을 만나 알고 지내게 되었고, 두 사람이 친해진 후에 엘자립으로부터 이 소설의 모티프가 된 원고를 받았다고 설명한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독재 군주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차기 왕의 친구, 왕의 최측근으로서만 교육받고 일하고 사랑할 수 있었던 남자. 이런 운명이 기구하고 부당하다는 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거부하지 않고 평생을 산 남자. 오랜 세월 동안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잘 모르는 외국인 청년에게만 털어놓을 수 있었던 남자. 이런 남자의 이야기에 많은 프랑스인들이 주목한 이유를 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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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59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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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표지에 인쇄된 '일본의 패전과 몰락 계급의 비극을 여성의 목소리로 그린 페미니즘적 작품'이라는 문구를 보고 호기심이 동해서 읽었다. 다자이 오사무와 페미니즘이라니.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인명과 개념의 조합... 책을 다 읽은 지금, 이 소설이 '일본의 패전과 몰락 계급의 비극을 여성의 목소리로 그린' 작품이라는 설명에는 동의하지만 '페미니즘적'이라는 평가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남자를 사랑하고 아이를 임신하는 것이 여성의 혁명인가. 남성 작가가 여성의 목소리로 서술하면 다 페미니즘인가. 


뒤표지의 문구 때문에 당황했을 뿐, 소설 자체는 좋았다. 배경은 패전 직후의 일본. 귀족 가문의 장녀 가즈코는 이혼 후 본가로 돌아와 몸이 약한 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다. 하나뿐인 남동생 나오지는 전쟁에 나가서 소식이 끊긴 지 오래다. 돈이 궁해진 가즈코는 삼촌의 제안을 받아들여 도쿄의 집을 팔고 어머니와 함께 이즈의 산장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곳에서 귀족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험한 일들을 해보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기는 쉽지 않고, 설상가상으로 전쟁터에서 돌아온 남동생이 집안의 돈을 탕진하면서 가즈코는 점점 더 힘든 상황에 놓인다. 


문제는 여기부터다. 가즈코는 이혼을 한 번 하기는 했지만 아직 삼십 대인 젊은 여자다. 그런 가즈코를 눈여겨본 사람들로부터 혼담이 종종 들어오기도 하는데, 그중에는 돈 많은 육십 대 남성도 있었다. 가즈코는 아무리 그래도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난다며 거절한 후, 몇 년 전 남동생 일로 술집에서 만나 충동적으로 키스를 하고 그 후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부남 우에하라 선생에게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습니다'라고 쓴 편지를 보낸다. 


가즈코가 이러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다자이 오사무가 등장 인물의 입을 빌려서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저의 도덕 혁명의 완성입니다." 운운하는 것도 (문장의 내용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창작의 자유의 영역에 속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 대해 "이 (남성) 작가는 여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페미니즘적이다."라는 평가가 덧붙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 애초에 작가가 무엇을 완벽하게 이해해서 쓰는 건 아니고, 뭘 주장하기 위해서 쓰는 건 더더욱 아니다. 하물며 다자이 오사무는 자기 부정, 자기 불신으로 유명한 작가인데. 


이 작품은 가즈코가 여성이라는 사실보다도,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예인 가즈코가 경험하는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신분 추락, 그로 인한 정신적 불안과 자괴감 등에 주목해서 읽는 게 적절한 것 같다. 이것이 출간 당시 일본인들의 상황 및 심정과 일치했기 때문에, 이 책이 다자이 오사무 생전에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인 것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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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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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희 작가의 이름을 오래 전부터 많이 들었는데 작품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읽어보니 과연 좋고, 요즘 내가 관심 있는 작가들(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하라다 히카 등)이 대체로 노년 여성의 노동과 투병 또는 간병 문제를 다루는데 이 작가도 비슷한 문제를 다뤄서 반가웠다. 남들 눈에는 별일 없이 사는 듯 보이는 사람들의 삶에 어떤 참담하고 황당한 사건들이 있었을 수 있는지, 그들이 그걸 얼마나 감쪽같이 숨기고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달까. 


내가 서른 살 이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을 것 같은데,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멀쩡하게 잘 살던 사람이 갑자기 죽거나, 아파서 입원하거나, 사고를 당하거나, 가족을 잃거나, 소송에 휘말리거나, 투옥되거나 하는 일들이 가까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보고, 언젠가는 나 역시 그런 일을 겪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면서부터는 이런 소설을 읽을 때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조차 뭐라도 하는 소설 속 인물들의 지혜를 배우고 싶달까. 


가령 <여름방학>의 병자 씨는 퇴직 후 자신의 삶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이름을 바꿔 보기로 한다. <어느 밤>의 할머니는 매일 밤 킥보드를 타고, <스위치>의 청년은 양말을 산다. 그리고 다수의 인물들이 음식을 해먹거나 사 먹는 것으로 시름을 달래는데, 나 또한 먹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편이었지만 이제는 건강상의 문제로 힘들어졌다(먹고 싶은 걸 원 없이 먹을 수 있는 것도 행복이다...). 대체 삶이 나에게서 뭘 더 빼앗아 가려나. 받는 것 없이 빼앗기기만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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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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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공쿠르상 수상작이라는 문구에 혹해 구입한 책이다. 같은 상을 수상한 작품 중에서 역대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이었고, 이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았다는데, <아노말리>가 마침내 그 기록을 깼다고 한다. 대체 어느 정도이기에.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과연 그럴 만하다. 상당히 흡인력이 강하고,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다. 


이야기는 여러 인물들의 서사를 짤막하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청부 살인업자, 무명 작가, 영화 편집자, 암 환자, 군인의 아내, 나이지리아 출신 가수 등 다양한 지역에 사는 다양한 연령대의,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하고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이 제시되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한 날 한 시에 같은 비행기를 탔다는 것, 그리고 그 비행기 안에서 심한 난기류를 겪었다는 것, 그리고 세 달 뒤 FBI가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갔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 옴니버스 형식인가 싶었던 이 소설은 이 때부터 SF 소설의 색채를 띠기 시작한다. 알고 보니 저명한 과학자들과 종교인들이 머리를 모아도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시공간에 오류가 생겼고, 그로 인해 3개월 전 파리를 떠나 뉴욕에 도착한 비행기와 완벽하게 동일한 비행기가 3개월 후 그 때 태운 승객들과 완벽하게 똑같은 승객들을 태우고 또 다시 뉴욕에 도착한 것이다. 


일종의 복제인간이 생겨난 셈인데, 이 복제인간이 한두 명이 아니라 수십, 수백 명에 달하고, 3개월 동안의 시차가 있다 보니 문제가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3개월 사이에 죽었던 사람이 다시 나타나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어떤 남자는 3개월 안에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와 그렇지 않은 아내 중 한 명을 골라야 하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자신의 복제인간을 적대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쌍둥이처럼 여기며 반기는 사람도 있다. 


책에 <블랙 미러>가 언급되기도 하는데, <블랙 미러>뿐만 아니라 <이어즈&이어즈>, <돈 룩 업>도 생각나고 개인적으로는 <로스트>도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읽은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7>에도 복제인간 문제가 나오는데, 복제인간(으로 상징되는 인간의 정체성, 실존 등)이 요즘 서구에서 핫한 이슈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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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와 생맥주 - 최민석의 여행지 창간호
최민석 지음 / 북스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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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석 작가의 여행 에세이를 좋아한다. <베를린 일기>를 무척 재미있게 읽었고, <40일 간의 남미 일주>도 좋았다. 이 책도 여행 에세이이기는 한데, <베를린 일기>와 <40일 간의 남미 일주>처럼 특정 시기에 특정 지역을 집중적으로 여행하고 쓴 책은 아니고, 여행 잡지에 연재하기 위해 쓴 짤막한 길이의 칼럼을 엮었다. 좋은 점은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정도는 아닌 분량의 여행 경험이나 생각을 알 수 있었다는 점. 책으로 엮고도 남은 베를린 체류 시절의 일화나 남미 여행 당시의 에피소드가 나올 때도 있는데 이 또한 너무 재미있어서 <베를린 일기>와 <40일 간의 남미 일주>를 다시 읽고 싶네... 


외국어 공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저자는 취미로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는데, 이게 어떤 사람의 눈에는 신기해 보였는지 외국어 공부에 대한 글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단다. 결론부터 말하면 저자는 소설 쓰기로 지친 머리를 식히기 위해, 그리고 소설 읽기를 더 잘하기 위해 외국어 공부를 한다. 소설 쓰기는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해서 바로 느는 것이 아닌 반면, 외국어 공부는 시간을 많이 들일수록 확실히 는다. 그러니 소설을 쓰다가 실력이 늘지 않아 자괴감이 들 때 외국어 공부를 하면 기분이 나아진다. 내가 항상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여도(심지어 때로는 후퇴하는 것처럼 보여도) 외국어 공부만큼은 꾸준히 하고 있고 늘고 있다는 자기 확인 또는 자기 위안이 가능하므로. 


외국어 공부를 하면 소설을 더욱 잘 읽게 된다는 것은 나 또한 깊이 공감하는 사실이다. 요즘 나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는데, 아직 초급 수준이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프랑스어에 대한 지식이 있으니 프랑스 소설을 읽는 일이 훨씬 쉽고 즐겁다. 저자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소설 <백 년의 고독>을 읽으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가문의 이름이 '부엔디아(buendia)'인데, 이는 스페인어로 '좋은 날'을 뜻한다. 몰라도 소설 읽기에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알면 소설의 내용과 교훈이 더욱 깊이 있게 다가온다고. 프랑스어 다음엔 스페인어를 배워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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