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간 - 도시 건축가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
김진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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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의 기세가 한풀 꺾이면서 여행의 시간이 돌아왔다. 오랜만에 되찾은 여행의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누리고 싶어서, 도시건축가 김진애의 여행 산문집 <여행의 시간>을 읽었다. 직업상 전 세계 여러 도시들을 직접 찾아가 걸어보고 앉아보고 눈으로 보고 들어보고 만져보고 맛도 본 사람은 그동안 어떤 여행을 해왔고, 각각의 여행을 통해 무엇을 느끼거나 배웠고, 그 중에 어떤 여행이 최고의 여행이라고 생각할지 궁금했다. 


저자가 본격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건 미국 유학 중이던 20대 말이다. 동기 전원이 남학생인 대학 생활도 잘해냈고(저자는 서울 공대 800명 동기 중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이 때 이미 결혼도 하고 유학도 하고 출산도 해낸 상태였지만, 혼자서 여행을 해본 경험은 없었기에 걱정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첫 행선지인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소매치기를 만났고,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성희롱(캣콜)과 은근한 차별, 때로는 대놓고 하는 차별을 당했다. 


매일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낯선 곳에서 예측하지 못한 일들을 겪는 경험은 분명 엄청난 긴장감을 느끼게 했지만, 겪어보기 전에는 무섭고 불안한 일도 막상 겪어보면 별 것 아니고, 겪게 된다 한들 혼자서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불편한 상황에 대한 면역과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생겼다. 그래서 저자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홀로여행을 추천한다. 지금 당장 여행을 떠날 수 없는 형편이라면, 일상의 오고 감을 짧은 여행으로 활용하는 것도 괜찮다. 


저자는 홀로여행을 최고로 꼽지만, 커플여행, 아이들과의 여행, 효도여행, 강아지와의 여행 등 홀로가 아닌 여행도 추천한다. 특히 가족여행은 자신의 뿌리와 어린 시절을 돌아보고 자신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귀한 기회다. (자연여행과 구별되는) 도시여행 팁도 나온다. 사전에 공부하고 계획을 완벽하게 세워서 하는 여행도 좋지만, 아무 지식 없이 발길 닿는 대로 하는 여행은 (생존 본능에 의해) 오감이 총동원되어 훨씬 효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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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사하는 마음 - 김혜리 영화 산문집
김혜리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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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나는 라디오를 즐겨 듣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라디오를 듣다가 김혜리 기자가 출연하는 영화 코너를 듣게 되었고, 그 때부터 김혜리 기자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김혜리 기자가 나오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방송국 개편 때문에 없어지는 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번거롭고 아쉬웠는데, 2016년(벌써 7년!) 김혜리 기자가 최다은 PD, 임수정 배우와 함께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 클럽>을 시작한 이후로는 아주 편하다. 편해진 만큼 영화를 많이 보고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이놈의 게으름) 


<묘사하는 마음>은 김혜리 기자가 5년 만에 출간한 영화 산문집이다.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씨네21에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칼럼과 따로 집필한 에세이들을 엮었다. 5년 치의 글을 모아서 엮은 만큼 분량이 많고 두께가 상당하다. 사전처럼 상비해두고 있다가 어느 날 이 책에 소개된 영화를 보았을 때 꺼내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평단의 사랑을 받은 영화와 대중의 사랑을 받은 영화,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와 OTT에서 공개된 영화 등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한국 영화보다 외국 영화에 관한 글이 훨씬 많다. 


영화 한 편 한 편에 대한 에세이들도 좋았지만, 한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중심으로 해당 배우의 연기 세계를 높은 밀도로 분석하고 설명하는 배우론 부분이 특히 좋았다. 이자벨 위페르, 베네딕트 컴버배치, 톰 크루즈, 폴 러드, 틸다 스윈튼 모두 유명한 배우들이지만, 필모그래피 전체를 알 기회는 없었고 연기의 특징이나 배우로서의 매력을 집중적으로 탐구해 본 경험은 더더욱 없었기에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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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루비
박연준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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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루비>는 박연준 시인의 첫 소설이다. 시인이 소설을 쓰는 경우가 많은지 소설가가 시를 쓰는 경우가 많은지 모르겠지만, 소설을 쓴 시인이 박연준 시인이라면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소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모월모일>, <쓰는 기분> 등 그동안 박연준 시인이 발표한 산문집을 읽으며 그의 문장에 반했고, 그의 문장이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와 만날 때 어떤 화학작용을 일으킬지(혹은 일으키지 않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소설에서도 '박연준다움', '박연준스러움'은 여전했다. 


소설의 배경은 1986년 서울의 변두리다. 일곱 살 여자 아이 여름은 엄마가 없다. 아빠는 있지만 밖으로만 나돌고, 여름을 맡은 고모는 피아노 학원 운영하랴 자기 딸 키우랴 바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의 인생에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하나는 아빠가 데려온 새엄마이고, 다른 하나는 학교에서 만난 첫 친구 루비다. 새엄마가 불편한 여름은 방과 후 대부분의 시간을 루비와 함께 보내고, 루비는 그런 여름을 조건 없이 받아준다. 여름은 그런 루비의 소중함을 모르고 점점 루비를 소홀히 대하고, 루비는 그런 여름에게 결국 이별을 고한다. 


일곱 살 여름이 자신을 사랑하지만 책임지지 않는 부모와 자신을 책임지고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 고모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열두 살 여름은 자신의 무관심과 불합리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사랑해 주는 루비에게 상처를 준다. 그러나 어떤 관계에서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많이 상처 주는 것이 과연 이득일까. 남에게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많이 상처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과연 성장일까. 무엇이 관계이고 성장인지도 모른 채 서투르게 관계 맺고 어설프게 성장이라는 의식을 치러야 했던 날들을 아프게 돌아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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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숙녀 신사 여러분
유즈키 아사코 지음, 이정민 옮김 / 리드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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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에 나는 일본 여성 작가들을 열렬히 좋아했다.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의 책을 특히 좋아해서, 도서관에 가면 그들의 책을 서가에서 꺼내 읽으며 시간을 보냈고, 용돈이 생기면 그들의 책부터 샀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직접 돈을 벌고 페미니즘에 눈을 뜨면서 그들의 작품에 결여된 요소가 눈에 띄었고, 차츰 그들의 작품을 멀리했다. 

그런데 최근에 무라타 사야카, 유즈키 아사코, 하라다 히카 같은 일본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뒤늦게) 접하면서, 요즘은 일본 여성 작가들도 한국 여성 작가들 못지 않게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고, 가부장제와 이성애 중심주의, 성별 이분법에서 벗어난 여성의 삶을 고민하고 탐구하고 실천하는 내용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르도 코믹, 판타지, 미스터리, 스릴러 등 다양하고, 소재도 한국 작품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 많다. 

유즈키 아사코의 신작 소설집 <친애하는 숙녀 신사 여러분>은 최근에 읽은 일본 여성 작가들의 책 중에서 가장 재기 넘치고 인상적이었다. 관용적 표현인 '신사 숙녀 여러분(Ladies and gentlemen)'에서 단어의 순서를 바꾸어 색다른 느낌을 준 제목처럼, 이 소설집에 실려 있는 일곱 편의 단편은 평범한 일상의 사소한 부분을 약간 비틀어서 신선한 재미를 주는 동시에 묵직한 한 방을 날린다. 

이 중에 가장 좋았던 작품은 <키 작은 아저씨>이다. 진 웹스터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를 연상케 하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에는 <키다리 아저씨>를 비롯한 고전 소녀 소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친구의 소개로 성형외과에 간 아코는 대기실에서 우연히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읽고 그 때부터 고전 소녀 소설 읽기에 푹 빠진다. 

아코는 <빨간 머리 앤>, <소공녀>, <작은 아씨들> 같은 고전 소녀 소설의 공통점이 '가난한 여자아이가 부자(와 사랑에 빠진다, 가 아니라)에게 도움을 받는다'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부자의 조력을 받기 위해 노력한다(부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일자리를 구한다, 고전 소녀 소설 속 여자 주인공들처럼 언제 어디서나 선행을 베푼다, 부당한 대우를 당하면 참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밝힌다). 

결국 아코는 키다리 아저씨가 아닌 '키 작은 아저씨'의 눈에 들어 그의 조력을 받게 되는데, 조력의 내용은 '평생의 거처와 일자리 보장'이고, 조력의 대가는 결혼과 임신, 출산이 아닌 가진 사람에게 '자신의 특권을 알아차리고 갖지 못한 자와 함께 나누는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기존의 고전 소녀 소설보다는 이런 이야기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훨씬 더 유용하고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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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1 - 개정판 코리안 디아스포라 3부작
이민진 지음, 신승미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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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처음 일본에 갔을 때 파친코가 편의점만큼 많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전까지 나는 일본 하면 사람들이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인상이 있었는데, 어딜 가나 파친코가 있고 업소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에 내가 모르는 이면이 있고, 그 이면으로 인해 이 나라의 미래가 어둡겠다고 생각했다. 그 후 재일조선인 학자 서경식 선생의 책을 따라 읽으면서 재일조선인 문제에 눈을 떴고, 일본 정부와 일본 사회가 어떤 식으로 재일조선인들을 이용하고 차별하는지를 알았고, 파친코가 재일조선인 문제를 상징하는 산업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국적이 아니기 때문에 자국민 대우를 받지 못하고, 남한 또는 북한의 국적을 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국의 보호도 받지 못한다. 이들은 진학과 취업을 비롯한 사회 활동에 있어서 제한과 차별을 받기 때문에, 과거에는 (일본인보다 우월한 신체를 활용해) 연예인이나 운동 선수가 되지 않으면 대체로 자영업을 하거나 파친코, 야쿠자 같은 어두운 일에 종사했다. (소설 <파친코>의 모델로 알려진) 파친코의 왕으로 불리는 일본 기업 마루한의 회장 한창우 역시 재일조선인이었다(현재는 일본으로 귀화). 





소설 <파친코>는 재일조선인 가족 4대의 이야기를 그린다. 선자는 일제강점기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선자의 부모는 비록 장애가 있고 가난했지만 근면 성실했고 외동딸을 끔찍이 사랑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가 운영하는 하숙집 일에만 매달려 있던 선자는 어느 날 시장에서 생선 중개상인 고한수를 만난다. 얼마 후 고한수의 아이를 임신한 선자는 고한수에게 일본인 아내와 자식들이 있음을 알게 되고, 아들을 낳으면 집과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지만 거절한다. 선자네 하숙집 손님인 목사 백이삭이 선자를 가엾게 여기고 함께 오사카로 가자고 제안하고 선자는 이에 응한다. 


백이삭을 따라 오사카로 건너간 선자는 아들 둘을 낳는다. 좌판에서 김치를 팔아 열심히 돈을 모아서(이 부분이 제일 재밌다) 아들 둘을 잘 키우고 백이삭의 형 부부까지 건사한다. 고한수의 아들 노아와 백이삭의 아들 모자수는 각각 다른 성정을 지녔고 다른 인생을 꿈꿨으나,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진학과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결국 둘 다 파친코 일을 하게 된다. 미국 명문대 학위를 가진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도 나중에 아버지의 사업에 동참하는데, 마침 이때가 일본의 버블 붕괴-경기 침체 시작 시점이라서 이후 솔로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다(작가님 더 써주세요 ㅠㅠ). 





일제강점기가 배경이거나 재일조선인이 나오는 이야기에서 일본인은 대체로 (재일)조선인을 괴롭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 마련이고 이 소설에도 그런 모습이 나오지만, 이 소설에는 모자수의 친구 하루키나 노아의 애인 아키코, 모자수의 애인 에쓰코, 에쓰코의 딸 하나처럼 (재일)조선인에게 우호적인 일본인의 모습도 나온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루키, 아키코, 에쓰코, 하나는 모두 일본 사회에서 약자로 분류되어 배척당하거나 일본 사회에 염증을 느끼는 인물들이다. 약자가 약자를 알아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어떤 약자는 다른 약자를 괴롭히고 어떤 약자는 다른 약자에게 관대한 이유는 뭘까. 


여러 인물이 나오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은 단연 선자다. 선자는 (여성 중심의 가족사 소설이라는 점에서 이 소설과 비슷한) <토지>의 서희나 <미망>의 태임 등과 비교해 형편도 훨씬 안 좋고, 신분 상승이나 재산 축적의 욕망도 적고, 남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거의 없다. 선자가 살면서 드물게 욕심을 내고 일탈을 한 일이 있다면 고한수와의 연애인데, 임신 사실을 안 후 선자의 삶은 (당시 사회 규범으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연애와 임신을 한 죄를 씻기 위한 속죄 과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일을 제외하면 선자는 딸과 아내, 엄마로서 흠 잡힐 만한 일을 한 적도 없고 오히려 너무 고생만 하면서 살았는데, 선자의 어머니 양진은 말년에 오래 전 선자가 엄마 눈을 피해 (선자는 몰랐지만) 유부남인 고한수와 연애하고 아이를 가진 사실을 들먹이며 선자를 비난한다. 그 모든 속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인 취급당하는 여자의 삶 뭘까. 선자 외에도 '몸을 함부로 굴리거나' '남자가 듣기 싫은 말을 했다'는 이유로 죄인 취급 당하는 여자들이 이 소설에 많이 나온다. 선자가 (남성인) 아들, 손자만 있고 (여성인) 딸, 손녀는 없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재일조선인이고 여자였다면 모자수나 솔로몬만큼 성공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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