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성 교실 - 젠더가 금지된 학교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하빌리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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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전 세계에서 1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편의점 인간>의 작가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집이다.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을 읽는 건 <편의점 인간> 이후 두 번째인데, 오랜만에 그의 소설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재가 파격적이고 전개 방식이 독특해서 과연 오랫동안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만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들 사이에서 별명이 '크레이지 사야카'라는데 너무 잘 어울리는 듯 ㅎㅎ 실례인가?) 


책에는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어린 시절 단짝 친구와 했던 마법소녀 놀이를 아직도 그만두지 못한 서른여섯 살 직장인(<마루노우치 선의 마법소녀>), 초등학교 때부터 짝사랑 해온 남자아이를 대학에서 만나 그를 자신의 집으로 납치, 감금한 여대생(<비밀의 화원>), 성별이 금지된 학교에 다니며 자신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혼란스러워하는 고등학생(<무성 교실>), 사람들이 더는 '분노'라는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에 당황하는 중년 여성(<변용>)의 이야기 중 무엇 하나 식상하거나 지루한 것이 없었다.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을 앞으로도 계속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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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된다는 것
니콜 크라우스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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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된다는 것>은 <사랑의 역사>를 쓴 미국 작가 니콜 크라우스의 첫 번째 소설집이다. 약 20년 동안 여러 지면을 통해 발표한 단편 열 편을 모았다. 가장 오래 전에 발표된 작품은 2002년에 발표된 <미래의 응급 사태>인데, 어느 날 갑자기 정부가 정확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각 지역에 설치된 배급소에서 가스 마스크를 받아 가라고 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작가가 코로나19가 발생하기 한참 전에 팬데믹 발생 직후의 풍경을 예측한 듯한 상상을 했다는 게 놀라웠고, 팬데믹이 여러 면에서 인간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미리 경고한 점이 신기했다. 


니콜 크라우스는 (자신처럼) 유대계 미국인인 이성애자 여성의 이야기를 주로 그린다. 표제작 <남자가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인공 여성은 독일인 남자친구로부터 만약 자신이 나치 점령기에 태어났다면 위에서 시키는 대로 유대인을 학살하라는 지시에 따랐을 거라는 말을 듣는다. 이스라엘인 남성 친구로부터는 군에 있을 때 상부의 명령에 따라 팔레스타인인 가족 전체를 죽일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렇다면 남자가 된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 의지나 공동체의 도덕 윤리보다 눈앞의 권력을 중시하고 부당한 폭력을 용인하는 것, 속된 말로 "까라면 까"는 것일까. 그런 남성, 남성성이 지배하는 세계가 점점 더 불행하고 잔혹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닐까. 


주인공이 지금은 아이지만 순식간에 자라서 남성의 세계로 편입될 두 아들을 위태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이 마음에 남는다. (나는 아이가 없어서 잘 모르지만) 아마도 아들 가진 어머니의 마음이 대체로 이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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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나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2
이주란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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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란의 소설 <어느 날의 나>는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선배 언니와 함께 살게 된 주인공 '유리'의 3개월을 그린다. 카페에서 일하는 유리는 이따금 같이 사는 선배 언니와 영화를 보러 가거나, 산책을 하거나, 카페 단골인 재한 씨를 불러서 함께 놀며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 이따금 버스를 타고 예전에 살던 동네로 가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던 집 주변을 배회한다. 이제 더는 그곳에 유리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유리가 만나러 갈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유일한 혈육을 여의고 새로운 일상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나는 <어느 날의 나>를 읽는 동안 일본 작가 무레 요코의 소설이자 고바야시 사토미 주연 드라마로도 만들어진 <빵과 수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을 자주 떠올렸다. 두 소설 모두 분위기가 잔잔하고 독자의 뇌리에 남을 만한 강렬한 사건도 없는데, 생각해 보면 가까운 사람을 잃고 혼자가 된 주인공이 일상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것도 영웅이 적에 맞서 세상을 구하는 일만큼 대단한 체력과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일 아닐까. 호수가 잔잔해 보여도 수면 아래는 전쟁 중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유리가 선배 언니와 함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들도 좋았지만, 혼자서 예전에 할머니와 살았던 집을 찾아가는 장면들이 마음에 더 남는다. 이따금 찾아오는 유리를 알아보고 알은체하는 동네 아주머니라든가, 유리가 마치 자신의 손녀인 양 심부름을 시키는 할머니라든가. 그 때마다 피하거나 싫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기뻐하며 싹싹하게 구는 유리의 모습이 짠했다. 그렇게라도 과거와 연결되고 싶고, 할머니가 살아 계시던 시절의 자신을 잊지 않고 싶은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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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사 1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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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작가를 좋아하고 범죄 소설을 좋아하기 때문에 장강명 작가의 신작이 범죄 소설이라는 걸 알고 무척 기대가 되었다. 읽어보니 과연 기대한 대로 좋았는데, 작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읽고 좋다고 느낀 건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이 책의 구성 때문이다. 이 책은 10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홀수장은 범인의 심리를 그리고, 짝수장은 경찰의 (재)수사 과정을 그린다. 집중하기 힘들고 범인이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초독할 때는 짝수장만 읽고 재독할 때는 홀수장과 짝수장을 쭉 읽었다. 이렇게 읽어도, 재밌었다면 괜찮은 거겠지...? 


<재수사>는 강력범죄수사대 소속 형사 연지혜가 22년 전 발생한 신촌 여대생 살인사건을 재수사하면서 시작된다. 2000년 8월 신촌 뤼미에르 빌딩 1305호에 살고 있던 여대생이 시체로 발견된다. 피해자인 여대생은 연세대 인문학부에 재학 중이던 민소림으로, 당시 경찰은 반 년 이상 강도 높은 수사를 벌였지만 끝내 범인을 잡지 못하고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연지혜는 사건을 재수사하는 과정에서 민소림이 당시 대학에서 도스토옙스키 독서모임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모임 멤버들을 만나러 간다. 


대부분의 범죄 소설은 범인이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에 주목하는데, 이 소설은 범인이 범죄를 저지르고 난 후에 범죄가 은폐된 과정에 주목한다. 일차적으로는 사건 발생 당시 경찰 수사상의 허점에 주목하고, 이차적으로는 수사 과정에서 그러한 허점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당시 사회 시스템에 주목한다. 이 사건의 경우에는 2000년대 초반의 대학 문화가 중요한데, 이때 신자유주의가 대학가의 분위기를 크게 바꿨고, 각 대학이 학부제를 실시하면서 대학 내 문화도 바뀌었다. 같은 학과(학부)라도 서로 잘 모르고, 민주주의나 통일 같은 대의보다는 취업을 위한 학점 경쟁, 스펙 쌓기가 대학생들의 과업이 된 최초의 세대라고나 할까. 


사건 발생 당시 민소림이 속한 대학의 문화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해서 범인을 놓친 것이 과거의 문제라면, 사건 발생으로부터 22년이 지나도록 범인을 잡지 못하고 범인이 자유롭게 살도록 내버려 둔 것은 현재의 문제다. 범인은 50장(章)에 이르는 독백을 통해 자신이 민소림을 죽인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음을 설명하는데, 작가는 이를 통해 범인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고(당연하다) 범인 스스로 죄의식을 느끼는 데 있어 인식과 판단의 기준이 되는 윤리와 도덕의 부재를 지적한다. 다시 말해, 과거 종교가 담당했던 죄의식의 근거라는 역할을 대체할 만한 것이 현재는 없고, 그 빈 자리를 불안과 우울, 부와 권력에 대한 맹신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소림이 속해 있었던 모임이 하필 도스토옙스키 독서모임인 것은 아마도 도스토옙스키가 신(이라는 이름의 상위의 도덕 원칙)이 없을 때 인간이 얼마나 사악하고 위험한 존재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으로는 <죄와 벌>,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 읽어봤는데, <재수사>에 언급된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5대 장편 소설(<백치>, <악령>, <미성년>)도 어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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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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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네자와 호노부의 신작이 역사물이라고 들었을 때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추리물에 정통한 그가 왜 갑자기 장르를 바꿨나 궁금했고, 일본 역사에 해박하지 못한 내가 그의 신작을 수월하게 읽어낼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웬걸. 막상 <흑뢰성>을 읽어보니 역사물을 가장한 추리물이이서 놀랐고, 역사물인데도 어렵지 않아서 기뻤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역시 요네자와 호노부구나. 요네자와 호노부가 이번에도 요네자와 호노부 했구나. 이런 도전, 이런 변화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흑뢰성>의 배경은 1578년 오다 노부나가가 전국 시대를 통일하기 직전이다. 주인공은 오다 노부나가, 가 아닌 노부나가의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이하 무라시게)다. 그해 10월 반역을 일으키고 자신의 근거지인 아리오카 성에 웅거한 무라시게에게 예상치 못한 손님이 찾아온다. 바로 노부나가의 가신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책사 구로다 간베에(이하 간베에)다. 무라시게는 노부나가의 수하로 돌아오라는 간베에의 청을 물리치고, 관습에 따라 간베에를 돌려보내거나 죽이는 대신 성의 지하 감옥에 가둔다. 


이 때부터 겨울, 봄, 여름, 가을, 다시 겨울로 이어지는 1년 동안 아리오카 성 안팎에서 기괴한 사건들이 벌어진다. 처음에는 오해나 착각에서 비롯된 작은 해프닝으로 여겼지만, 당장 오늘 전쟁이 일어나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작은 해프닝조차도 불길한 징조, 신이 내린 천벌처럼 여겨지기 마련. 이를 우려한 무라시게는 성 안의 각종 인력과 자원을 활용해 최대한 빨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문제의 답을 찾든 못 찾든 결국에는 간베에의 도움을 청하는 모습이 각 장마다 반복된다. 


이 소설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무라시게와 간베에 간의 긴장이다. 무라시게는 성의 주인이지만 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간베에의 지혜를 빌려야 하는 처지다. 간베에는 1년이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지만 자신의 머리와 혀로 무라시게를 농락할 수 있는 입장이다. 둘 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한때는 같은 무장(노부나가)을 모셨고 난세에서 생존을 도모하는 처지임은 일치하기에 상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미워할 수만도 없다. 이런 긴장 넘치는 관계를 문장으로 표현해낸 솜씨가 놀랍고, 언젠가 영화나 드라마로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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