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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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토카르추크.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고, 바로 그 이유로 그의 책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내 취향은 아니어서 독서가 길게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다 최근에 SBS 라디오 <김선재의 책하고 놀자>를 다시 듣다가 김혼비 작가님이 이 책을 소개하시는 걸 들으며 이 책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동했다. 


전에도 이 책의 존재는 알았지만, 범죄 스릴러 소설인 줄은 전혀 몰랐다.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수상 직후 범죄 스릴러 소설을 쓴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혼자 사는 여성 노인이 점성술을 이용해 범인을 찾는 내용이라니. 설명만 들으면 전형적인 장르 소설 같은데, 결말과 주제는 (장르 소설과는 거리가 먼) 올가 토카르추크의 작품 세계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니 더욱 궁금했다. 


이야기는 폴란드의 산골에서 별장 관리인으로 일하며 혼자 사는 여성 노인 두셰이코가 이웃 남자 왕발이 죽은 걸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경찰은 사고사로 짐작하지만, 두셰이코는 시체 주변에 사슴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던 걸로 보아 동물의 복수가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이후 비슷한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고, 그 때마다 두셰이코는 자신이 신봉하는 점성술을 근거로 동물을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경찰을 비롯한 이웃 주민들은 두셰이코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외면한다. 


사람들이 잇달아 죽은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타살이라면 그 범인이 누구인지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소설의 핵심은 생태계의 일부인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조화, 협력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으며, 약자와 소수자의 생명을 경시하거나 착취하는 자는 제 명에 죽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제목은 <흔적(Pokot)>), 한국에서 볼 방법이 있으려나. 볼 수 있다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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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새
정찬 지음 / 창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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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선생님의 책(서평집)에 소설가 정찬을 좋아한다는 언급이 여러 번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원래는 정희진 선생님이 정찬의 작품 중에서 강력하게 추천한 <완전한 영혼>부터 읽으려고 했는데, 서점에 들렀을 때 이 책을 먼저 발견해 이 책부터 읽었다. 정희진 선생님이 추천하는 작가의 책인 만큼 내용이 무겁고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뜻밖에도 영화배우 장국영과 영화 <패왕별희>, <아비정전> 등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금방 흥미가 동했다. 


베이징에서 중국 특파원으로 일하는 '나'는 장국영이 호텔에서 투신했다는 연락을 받고 중국인 친구 워이커씽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워이커씽을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노인 정도로만 알았던 '나'는 그가 장국영뿐 아니라 첸카이거, 매염방과도 친분이 있고, 영화를 비롯한 문화 예술 전반에 조예가 깊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렇게 워이커씽과 술잔을 기울이며 배우 이야기, 영화 이야기, 음악 이야기 등등을 나누던 '나'는 자연스럽게 워이커씽이 어디서 어떻게 태어났고,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된다. 


워이커씽은 중일전쟁 때 난징을 침략한 일본 군인이 민간인 여성을 강간한 결과로 태어난 아이였다. 일본군의 아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를 멀리했고, 그를 키워준 외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맹인 악사만이 그를 도왔다. 맹인 악사에게 음악을 배워 연주자로 살게 된 워이커씽은 자신이 태어난 계기인 난징대학살과 중일전쟁에 관심이 많았다. 재야 역사학자로도 이름을 알리게 된 워이커씽은 어느 날 한 심포지엄에서 난징대학살을 연구하는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 아이리스 장을 만난다. 


워이커씽은 난징대학살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어 하는 아이리스 장의 열의에 감동해 적극적으로 돕는다. 몇 년 후 아이리스 장의 책이 출간되고, 그의 바람대로 세계적으로 난징대학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그러나 일본 극우 세력의 비난과 공격을 견디다 못한 아이리스 장이 우울증을 앓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워이커씽은 시간이 흘러도 전쟁 범죄를 저지른 세력은 건재하며 반성은 요원하다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이 소설에는 난징대학살 외에도 히로시마 원폭, 일본군 성노예제, 문화대혁명 등의 사건이 언급된다. 이 사건들은 (가공의 인물인) 워이커씽과 '나', (실존했던/하는 인물인) 최승희, 매염방, 아이리스 장, 첸카이거 등의 생애와 연결된다. 이를 통해 작가는 역사와 무관한 개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들의 이력이나 저작, 창작물을 통해 각자의 삶에 드리워진 역사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또한 <발 없는 새>라는 제목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장국영, 아이리스 장의 일화를 각각 소설 앞, 뒤에 배치함으로써, 역사가 빚어낸 폭력이 얼마나 무겁게 개인을 짓누르는지, 그리고 개인이 폭력의 역사를 끊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죽음으로도 불가능한 일인지)를 보여준다. 이 책과 마찬가지로 정희진 선생님의 추천으로 본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어서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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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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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 김병운 작가의 단편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이었다. 이 작가의 소설집이 나오면 무조건 읽으리라 다짐했고, 얼마 후 같은 제목의 소설집이 나와서 냉큼 구입했다. 이 책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역시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이지만, 다른 작품들도 못지 않게 좋았다. 


<기다릴 때 우리가 하는 말들>과 <한밤에 두고 온 것>의 결말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의 결말이 떠오를 만큼 감동적이었고, <11시부터 1시까지의 대구>에 등장하는 '나'와 사촌누나의 아들 경진은 나중에 어떤 식으로 재회하고(친척이니까 적어도 한 번은 다시 만나겠지?) 그때는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궁금하다. <알 것 같은 밤과 대부분의 끝>과 <어떤 소설은 이렇게 끝나기도 한다>는 아들의 이야기인 동시에 엄마의 이야기로도 읽혀서 가슴이 먹먹했다. 김병운 작가가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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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 정지돈 첫 번째 연작소설집
정지돈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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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57자에 달하는 이 연작 소설집은 '나'와 파트너인 엠이 파리와 서울을 걷거나 뛰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보통 이런 식으로 소설에서 등장 인물이 어떤 공간을 걷거나 뛰는 경우 걷거나 뛰는 행위는 장소의 이동을 통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정이나 방식, 수단으로 그려지는데, 이 소설에서는 걷거나 뛰는 행위 자체가 결과이자 목적이다. 


가령 표제작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에서 산책자에 관한 소설 겸 에세이를 구상 중인 '나'는 파리 시내를 직접 걸어 다니면서 걷기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걸으면서 걷기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문학과 영화, 인물 등을 산만하게 떠올리는데, 이는 걷기 자체가 산만하고 언제든 목표가 분산될 수 있는 행위인 것과 관련 있다. 목적을 위해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 자체가 목적인 삶의 방식은 이 글 마지막에 등장하는 보니 브렘저의 그것과 일치한다. 


형식이나 내용이 일반적인 소설의 그것과 상당히 다르고, 배경지식 없이는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대목도 종종 있었지만, "조지 오웰을 시시한 작가 취급하면 안 돼. 내가 말했다. 좌파와 우파 모두 좋아하는 단 두 명의 작가 중 하나거든./ 또 하나는 누군데?/ 봉준호." 같은 유머가 곳곳에 산재해 있어서 (책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완독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문학에서의 이동, 모빌리티라는 개념에 대해 작가가 안은별 연구자와 대담을 나눈 내용이 담겨 있는 점도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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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듣는 소년
루스 오제키 지음, 정해영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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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로 서평단을 신청했고, 당첨되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처음 받았을 때 엄청난 두께에 놀랐고, 이걸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다 읽으려면 적어도 일주일은 족히 걸리겠다는 막막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런데 웬걸. 막상 읽기 시작하니 전개가 너무나 흥미롭고 결말이 궁금해서 이틀 만에 다 읽어버렸다. 지금은 국내에 출간된 루스 오제키의 다른 책을 찾는 중...(한 권 있는데 절판 상태다ㅠㅠ) 


이야기는 가난하지만 단란했던 한 가족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면서 시작된다. 열두 살 소년 베니는 어느 날 믿기 힘든 광경을 보게 된다. 본명은 켄지 코니시이지만 한국인 할머니의 성을 따서 만든 예명 '케니 오'로 활동하는 재즈 뮤지션인 아빠가 트럭에 치여 사망한 것이다. 그 때부터 베니는 아빠의 목소리를 비롯해 온갖 사물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이로 인해 학교 생활은 물론 하나 남은 가족인 엄마와의 관계도 힘들어진다. 급기야 정신과 병동에 입원하게 되고, 그곳에서 꿈에서 본 아름다운 소녀 알레프를 만난다. 


베니의 엄마 애너벨에게도 문제가 있다. 사서가 되기 위해 문헌정보학과 대학원에 다니다 베니를 임신하면서 그만두고 모니터링 업체에 취업한 애너벨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들이거나 수집하고 절대 버리지 않는 저장 강박 증세를 보인다. 그 결과 좁은 집에 물건이 가득 쌓여 베니와 집 주인 아들에게 지청구를 듣게 되고, 퇴거 명령을 받기 직전에 우연히 마트에서 <정리의 마법 : 잡동사니를 치우고 삶을 혁신하는 고대 선불교의 기술>이라는 책과 만난다. 


여기까지 읽고 나는 이 소설이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인 문제를 얻게 된 아들과 엄마가 각각 새로운 사람(알레프)과 책(<정리의 마법>)을 만나면서 문제를 해결하고 평범한 일상을 되찾는 이야기일 것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이후의 전개는 나의 예상과 조금 달랐다. 


퇴원 후 소음이 적은 곳을 찾다가 공공도서관으로 간 베니는 그곳에서 알레프와 기적적으로 재회한다. 알레프의 마음에 들고 싶어서 알레프가 추천한 발터 벤야민,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의 책을 읽어 보지만, 이제 겨우 중학생인 베니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베니는 알레프에게 점점 더 깊이 빠지지만, 알레프는 베니를 귀여운 남동생 이상으로 보지 않는다. 결국 베니는 등교 거부와 가출, 자해 등 자기 자신을 해치는 선택을 반복하고, 다시 정신과 병동에 입원한다. 


애너벨은 <정리의 마법>이 눈에 띌 때마다 읽어보려고 애쓰지만 매번 잠에 빠진다. 그도 그럴 게 애너벨은 혼자서 일하면서 살림도 하고 사춘기 아들까지 키우는 상황이다. 그런데 직장에선 해고 위기에 놓여 있고, 집 안에는 물건들이 빼곡히 쌓여 있어 간단한 청소로는 해결이 안 되고, 베니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데다가 등교 거부 중이다. 도와줄 친구나 친구가 있으면 좋으련만, 스트레스가 심한 애너벨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전부 자신을 해치려고 하는 적으로 인식하고 경계한다. 그럴수록 고립은 심해지고, 집 안은 더욱 더 엉망이 된다. 


작가가 베니와 애너벨을 점점 더 힘든 상황으로 몰고 가는 이유는 뭘까. 나는 이것이 곧 '현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은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이나 인생을 바꿔준다는 책을 읽는 정도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오히려 베니와 애너벨의 경우처럼 극심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 등의 정신적 문제를 겪거나, 학업 포기, 일자리 상실, 인간 관계 단절 등의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이런 베니와 애너벨을 구원하는 건, 그래도 책, 결국 책이다. 누구의 말도 듣기 싫은 베니는 도서관의 고요와 침묵을 사랑하게 된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애너벨은 <정리의 마법>의 저자에게 이메일을 쓰면서 고립감을 해소한다. 심지어 이 소설에서 책은 인쇄된 텍스트와 이미지로 내용을 전달하는 매체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사유하고 발화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을 버리거나 사람이 책을 버리는 일은 있어도, 책이 사람을 버리는 일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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