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오피스 오늘의 젊은 작가 34
최유안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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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고 읽는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34권이다. 이 책은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그냥 님이 추천하셔서 읽게 되었다. 각각 다른 업계에서 일하는 세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점이 호기심을 자극했고, 작가 자신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 직접 겪은 일이나 다른 업계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반영했다는 점이 신뢰도를 높였다. 내용이 생생하고 전개 속도가 빨라서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듯하다. 


퀸스턴 호텔의 백오피스 지배인 혜원은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귀한 지 4년이 지났는데도 승진을 못해서 불안한 상태다. 그러다 우연히 대기업인 태형 그룹에서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혜원은 이 건을 반드시 따내서 성공시키겠다고 마음먹는다. 이 행사에 앞으로의 커리어가 달린 사람은 혜원뿐만이 아니다. 이 행사를 기획한 태형그룹 기획실 직원 지영과 행사 준비를 담당하게 될 이벤트 업체 직원 강이도 이 건을 성공시켜야 할 개인적인 이유가 있고, 그런 만큼 절실하게 이 건에 임한다. 


혜원과 지영, 강이는 사생활을 포기하면서 일에 매달리지만, 이들의 노력은 시도 때도 없이 암초를 만난다. 회사의 부패, 상사의 부정, 주변 동료들의 무능, 여자라는 이유로 갇혀버린 유리천장... 세상이, 사람들이 왜 이 따위냐고 비난을 퍼붓고 원망할 수도 있지만, 그러는 대신 당장 눈 앞에 있는 일을 나부터 제대로 해내기로 하고 꿋꿋하게 일에 몰두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멋있었다. 특히 혜원이 눈앞에서 개소리를 시전하는 남자한테 찡그린 표정 한 번 안 짓고 자기 몫만 쏙 챙기는 모습이 멋있었다(이것이 호텔리어의 내공인가!). 


지영과 알렉스의 러브라인이 생뚱맞다는 의견이 있던데, 여자가 큰일 하다 보면 일터에서 만난 남자랑 눈 맞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오히려 워킹맘인 혜원이 전업맘처럼 육아와 살림에 힘쓰지 않는다고 남편한테 비난받고 자기 자신도 괴로워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워킹대디들도 그러냐고요... 일하는 여자, 여자의 일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도 부족하고 질리지 않는다. 부디 더 많은 이야기가 나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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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임솔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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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을 읽고 나서 바로 이 책을 읽었는데 이제야 리뷰를 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단편들이 좋았지만 특히 <단영>이 좋았는데, 절이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신성성과 영원성이 그 절에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세속성과 유한성과 대비되는 점이 재미있었다. 절을 운영하기 위해선 장사를 하고 꽃을 죽여야 하는 비구니. 절에 살지만 햄버거가 먹고 싶은 아이. 남들의 기대와 자신의 욕망이 충돌할 때, 욕망을 택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쉽게 비난할 수 있을까. 


<단영>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다른 작품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와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간호사의 길을 포기했다고 말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 예술에 뜻을 품고 예술대에 들어갔지만 앞날이 막막해 도망치고 싶은 사람. 내가 계속 이 집에 살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하자가 있는 집을 속여서 팔기로 한 사람. 손가락질 하기는 쉽지만, 막상 내가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다른 선택을 할 거라고 자신하기 힘들다. 


젊은작가상 수상작 <초파리 기르기>의 지유도 자신의 병이 산업재해일 수 있음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실험실에서 일했던 경험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결국에는 엄마의 입장을 받아들이고 침묵하는 편을 택한다. 돌이켜보면 <최선의 삶>도 어느 누구도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겨우 소통이 시작된다는 걸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종국에는 입을 닫고 귀를 열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읽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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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자의 딸
카리나 사인스 보르고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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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 캘리 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다.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충격적이다. 첫째는 공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나라 꼴이 얼마나 엉망일 수 있고 인간이 어디까지 자신의 바닥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이고, 둘째는 소설의 배경이 197,80년대가 아니라 불과 몇 년 전이라는 점이고, 셋째는 이 모든 이야기가 작가의 상상이 아니라 작가가 직접 겪은 거의 자전적인 내용이라는 점이다. 


소설은 삼십 대 후반의 베네수엘라 여성 아델라이다 팔콘이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고아가 된 아델라이다는 장례식을 마치고 어머니와 둘이 살았던 아파트로 돌아갔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가 혁명군의 권력을 등에 업고 시민들을 괴롭히는 '보안관' 일당에게 점거당한 것이다. 주인이 있는 집을 생판 남이 무력으로 차지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이 나라에선 충분히 말이 된다. 


이 나라는 유가 폭락으로 인해 오랫동안 경제 공황을 겪고 있고, 정권이 뒤바뀌는 상황에서 이전 정권을 타도하고 권력을 잡은 혁명군이 제멋대로 통치를 하는 상황이다. 간단한 생필품조차 거액의 웃돈을 주지 않으면 살 수 없고, 그마저도 이 나라의 화폐는 안 통해서 달러화를 구해야 하는 상태. 혁명군이 시민을 폭행하거나 살해해도 처벌할 상위 권력이 없는 상태. 이런 상태에서 집을 빼앗겼다고 하소연하는 건 목숨까지 가져가라는 것이다. 


아델라이다는 할 수 없이 '스페인 여자의 딸'이라고 불리는 이웃집 여자의 집을 찾아간다. 그런데 집 문은 열려 있고 이웃집 여자는 죽어 있고 테이블 위에는 스페인 국적의 여권이 있다. 주인이 없어진 여권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순 없다고 생각한 아델라이다는 곧바로 시체를 처리하고 이웃집 여자로 위장해 스페인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살고 싶지만 살기 위해선 자기 자신을 죽이고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하는 - 그러나 다른 사람이 된들 생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막막한 - 아델라이드의 처지가 안타깝다.


이제까지 여러 이유로 신분을 위장하거나, 은둔하거나 탈출하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를 많이 봐왔지만, 이 소설처럼 오직 생존을 위해 모든 불안과 위험을 감당하는 이야기는 처음 본 것 같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점은, 소설을 다 읽고 나서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알게 된 건데, 실제로도 최근 3년 간 베네수엘라 국민 여섯 명 중 한 명이 나라를 떠났고, 그 수가 720만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들 각자는 대체 어떤 지옥을 목격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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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빛
마이클 온다치 지음, 아밀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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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온다치는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원작 소설을 썼고, 역대 부커상 수상작 중 최고로 꼽히는 작품만 받은 '골든 부커상'을 받은 작가로 알고 있었다. 정작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 그의 신작 장편 소설 <기억의 빛>을 읽으면서 <잉글리시 페이션트>는 물론이고 다른 작품들도 전부 구해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근데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이렇게 유명하고 뛰어난 작가인데 국내에 출간된 작품이 별로 없어서 속상했다. 원서로 읽어야 하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막 끝난 1945년 영국 런던. 14세 소년 너새니얼은 어느 날 아침 부모로부터 아버지 일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만 일 년 간 집을 떠나 싱가포르에서 지내게 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그동안 너새니얼과 두 살 위 누나 레이철은 기숙학교에서 지낼 것이고, 무슨 일이 생기면 3층에 세들어 살고 있는 '나방'이라는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라는 말이 덧붙었지만, 남매는 부모의 통보가 워낙 갑작스러운 데다가 나방이라는 남자가 범죄자처럼 보여서 불안하기만 하다. 


마 후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떠나고, 기숙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남매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나방은 남매의 부모가 집을 비우길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손님들을 불러 들였고, 남매는 처음엔 경계하는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점점 이들의 자유분방한 대화와 행동, 생활 방식에 호기심을 느끼고 결국 이들을 따라다니게 된다. 그렇게 매일 런던 안팎을 오가며 모험을 하고, 사랑을 하고, 성장을 하는 날들이 계속될 것 같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행복한 동거는 끝이 나고 너새니얼은 미국으로 보내진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1부이고, 1부만 보면 전쟁 직후에 사춘기를 맞은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성장 소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2부가 시작되고, 영국으로 돌아온 너새니얼이 정보국 요원이 되면서 분위기가 반전된다. 1부에서 아버지의 일을 핑계로 사라졌던 너새니얼의 부모는 사실 자식들에게조차 정체를 밝혀선 안 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특히 너새니얼의 어머니 로즈는 전쟁 중에 적군의 암호를 무수히 해독한 암호 분석원이자 직접 수많은 작전들을 수행한 요원이었고, 그 때문에 로즈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너새니얼은 정보국 요원으로서 어머니의 행적을 조사하는 한편, 아들로서 어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하며 어머니의 삶을 탐문한다. 이 과정에서 너새니얼은 어머니가 너새니얼이 14세 때 집을 떠난 것은 전후 유럽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분쟁을 수습하기 위함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어머니가 가족을 버리고 국가와 전쟁을 택한 것 자체도 충격이지만, 당시 어머니의 곁에 어머니를 그러한 삶으로 이끈 한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란을 느낀다. 너새니얼이 몰랐던 진실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너새니얼은 부모가 떠난 후 부모 대신 자신과 누나를 돌봐준 어른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그 중 한 사람을 만나는데, 너새니얼에게는 아름답고 찬란했던 그 시절이 그에게는 다른 의미였음을 알고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그 때는 어렸기 때문에 그 모든 일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고 여겼던 자신이 누군가에게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긴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대목에서 그저 순진한 소년/청년 같았던 너새니얼에 대한 인상이 많이 바뀌기도 했다.) 


한 번만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감동적인 작품이지만, 다양한 시점의 이야기가 있고, 각 시점의 이야기를 통해 다른 시점의 이야기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는 구성이라서 여러 번 읽으면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이 소설은 너새니얼의 관점으로 쓰여 있지만 로즈나 레이철, 나방, 화살, 아그네스의 관점으로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 것 같고, 소설에선 끝내 밝혀지지 않은 아버지의 이야기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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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우연 - 제1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3
김수빈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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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소설은 신기하다. 이제 더는 청소년이 아닌데도 청소년 소설을 읽으면 마음이 청소년 시절의 그것이 된다. 김수빈 작가의 소설 <고요한 우연>을 읽는 동안에도 그랬다. 주인공 수현은 절친 지아와 하굣길에 밀크티를 마시는 걸 좋아하고, 서점에 가면 문구 코너부터 들르는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수현은 같은 반 남학생 정후를 오랫동안 좋아했는데, 어느 날 꿈에서 한 소년을 보고, 그 소년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는 우연과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음이 설렌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자 주인공 수현이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두 남자 정후와 우연 사이에서 갈등하는, 흔하디 흔한 하이틴 로맨스 소설의 설정처럼 보인다. 수현에 비해 공부도 훨씬 잘하고 외모도 예쁘장한 고요는 수현을 방해하는 라이벌(연적)처럼 보이고. 그런데 요즘 아이답게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긴 수현이 익명의 계정을 사용해 정후와 우연, 고요와 연결되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왕자님처럼 보였던 정후에게는 남모를 슬픈 사연이 있었고, 존재감이 희미한 우연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친구가 없는 고요는 사실 외로움을 많이 타고 누구보다 친구를 원했다. 수현은 환하게 빛나는 달의 뒷면을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것처럼, 그저 지켜보기만 해서는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사연이나 은밀한 속마음까지 알 수 없음을 깨닫는다. 관심과 동경을 사랑과 인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는 어른들에게도 유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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