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작가 초롱
이미상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상 작가의 소설이 기발하고 참신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작가의 첫 소설집 <이중 작가 초롱>을 읽고 과연 그렇다고 생각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 불합리한 관행이나 세태를 적극적으로 조롱한다는 점, 서사의 방식이 관습적이지 않다는 점, 비일상적인 비유와 상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시녀 이야기>를 쓴 캐나다의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가 연상되기도 했다. 


첫 번째 단편 <하긴>은 운동권 출신의 엘리트인 아버지가 고등학생인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그는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치는 딸 보미나래를 미국에 있는 에코 공동체로 보낸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청소년 영화제에 출품, 수상 실적으로 대학에 가겠다는 계획이다. 자칭 '진보'라는 사람이 대학 입시라는 성과에 연연하고 기득권에 편입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풍자함과 동시에, 정치적 입장과 약자, 소수자에 대한 혐오 여부는 무관할 수 있음을 탁월한 솜씨로 보여준다. 


제14회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인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도 좋았다. 집안에서 '모래'로 불릴 정도로 존재감이 미미한 고모와 두 여자 조카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이야기는 더 어린 조카인 무경의 시선으로 진행되는데, 고모와 언니 사이의 유대감, 연대감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화자가 나이가 들면서 차츰 그들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어떤 소외는 성장으로 연결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예리하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마음이 가는 작품은 <티나지 않는 밤>이다. 치과에서 데스크 직원으로 일하는 수진의 취미는 밤마다 원룸 베란다에서 소설을 쓰는 것인데, 수진의 노동과 수입을 필요로 하는 남자들이 그의 유일한 취미를 비웃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표제작 <이중 작가 초롱>도 글 쓰는 여자가 주인공인데, 말할 자유가 없는 여성에게서 글 쓸 자유조차 빼앗는 세상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연결되는 작품으로 읽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보라 환상문학 단편선 1
정보라 지음 / 퍼플레인(갈매나무)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 리스트에 오른 정보라 작가의 초기 걸작들을 모은 소설집이다. <저주토끼>와 마찬가지로 국적이 불분명한, 소설이라기보다는 민담이나 전설처럼 읽히는 기묘하고 으스스한 분위기의 짧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첫 번째 단편 <나무>는 두 소년과 한 남자의 기구한 인연을 그린다. 나무 타기를 하면서 놀기를 좋아하는 두 소년이 어느 날 마을을 지나가던 이방인에게 장난을 친다. 화가 난 이방인이 한 소년을 땅에 묻고, 얼마 후 이 소년은 나무가 된다. 남은 소년은 나무가 되어버린 친구에 대한 죄책감을 견디지 못하고 마을을 떠난다. 그러다 한 식당 겸 여관에서 식객으로 지내다 여관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지만, 과거의 잘못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이런 식으로 악연이 증폭되는 이야기들이 있는가 하면, (정보라 작가의 또 다른 특기인) 인간의 신체를 활용한 이야기들도 있다. 두 번째 단편 <머리카락>은 인간의 머리카락이 온 세상을 뒤덮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일종의 디스토피아 재난물이다. 여성의 신체 일부가 재생되면서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는 설정이라는 점에서, <저주토끼>에 실린 단편 <머리>의 원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장 좋았던 단편은 마지막에 실린 <Nessun Sapra>이다. 이 소설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대표곡 <Nessun Dorma>를 모티프로 한다. 독소전쟁(대조국전쟁)에서 살아남은 간호사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비극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사랑의 불가해함까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놀라운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지음, 백수린 옮김 / 레모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니 에르노의 글은 솔직하다. 외동딸인 자신을 끔찍이 사랑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부와 사회적 지위는 주지 못했던 부모에 대한 애증, 부르주아 계급을 경멸하지만 부르주아 계급에 편입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과거에 대한 환멸, 남자를 사랑하지만 남자를 사랑할수록 낮아지는 자존감과 높아지는 불안감, 우울감 등을 자신의 실제 체험을 통해 낱낱이 보여준다. 2016년에 발표한 <여자아이 기억>도 그렇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첫 성경험에 대해 들려준다. 


1958년. 열여덟 살이었던 저자는 방학을 맞아 여름방학 캠프에서 지도강사로 일하게 된다. 그 전까지 부모의 엄격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가톨릭계 여학교에 다녔던 저자로서는 몸도 마음도 해방되는 최초의 기회였다. 그동안 소설이나 잡지,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낭만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저자에게 거짓말처럼 이상형의 남자가 다가왔고,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캠프에서의 지위도 높은 그의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려워서 그와 밤을 보내게 된다. 


이튿날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간 저자는 남자가 전날 밤 자신과 잤다는 사실을 동료 강사들에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눈 깜짝할 새에 소문이 퍼졌고, 그 때부터 남자 강사들은 저자를 '창녀', '걸레'라고 부르고, 여자 강사들도 저자를 따돌리고 무시했다. 저자와 밤을 보낸 남자도 저자를 피했다. 그 때부터 저자에게 여름방학 캠프는 지옥이 되었다. 저자는 남자를 사랑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명예 회복에 대한 미련이었는지 모르겠다. 


저자는 남자와 딱 하룻밤 잤다는 이유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같이 잔 남자는 아무 문제 없이 생활하는데 자신만 처벌을 받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것이 남자를 사랑한 여자가 감내해야 할 대가라면 또 다시 남자를 사랑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면서도 개학 후 학교에서 동급생들을 보면서 '나는 너희들과 달리 성경험이 있다'고 뿌듯해 하고, 자신을 버린 그 남자의 약혼녀처럼 금발로 염색하고 초등 교사가 되려고 했다니. 내가 다 부끄럽다. 


사실 난 저자가 자신의 첫 성경험을 고백한 것보다 영국에서 오페어로 일할 때 친구와 벌인 절도 사건을 밝힌 것이 훨씬 더 충격적이었다. 첫 성경험은 저자가 피해자였지만, 절도는 저자가 가해자이고 엄연한 범죄인데 이걸 고백하다니. 심지어 저자 자신이 식료품점 딸인데 식료품점을 비롯한 여러 가게에서 물건을 훔쳤다는 게 이해가 안 되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영화 <벌새>에도 떡집 딸인 주인공이 친구와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치는 장면이 있었다. 의외로 흔한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믿음에 대하여 - 박상영 연작소설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상영 작가 하면 남성 성소수자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쓴다는 인상이 있었는데, <믿음에 대하여>를 읽고 실은 사랑보다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써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사랑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대도시의 사랑법>에서도 남성 성소수자인 이십 대 청년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비중 있게 그려졌고, 두 번째 작품인 <1차원이 되고 싶어>에서는 첫사랑으로 가슴 앓이 하는 와중에도 좋은 대학은 가고 싶고, 친구와의 우정도 지키고 싶고, 부모에게 인정받는 자식이고 싶은 마음이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믿음에 대하여>에서는 그 욕망이 훨씬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요즘 애들>의 남준은 인턴으로 일하는 잡지사에서 정직원으로 전환되기를 기대하지만 수습 기간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서 애가 탄다. <보름 이후의 사랑>의 찬호는 방송국 메인 앵커인 남자친구와 아파트를 장만해 한 집에 살게 된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우리가 되는 순간>의 한영은 대기업 마케팅 부에서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사내 정치에 휘말려 입장이 난처해진다. <믿음에 대하여>의 철우는 사진작가 일을 그만두고 이자카야를 개업하지만 팬데믹으로 폐업 위기에 처한다. 


이들의 욕망을 보면서 매슬로의 인간 욕구 5단계 이론이 떠올랐다. 이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생리적 욕구를 먼저 채우려 하고, 그 다음에 안전 욕구, 사랑과 소속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를 만족하려고 한다. 이 소설에서 인물들은 모두 남성 성소수자로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잘 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그 전에 생계를 해결해야 하고, 기왕이면 비정규직보다는 정규직,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어서 이직을 거듭한다. 원하는 직장에 들어간 후 연애를 시작하지만, 직장에서 성과를 쌓고 연봉이 올라가고 여윳돈이 생기면서 쇼핑에 탐닉하고 주식, 부동산에 눈 돌리다 애인과 마찰을 빚는다. 


이런 식으로 각자의 욕망을 향해 달려가던 이들은 상사와의 갈등이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 예상치 못한 팬데믹의 발생 등 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비로소 자신의 현재 생활을 돌아보게 된다. 재미있었던 점은, 어떤 인물은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우울과 허무를 느끼는 반면, 어떤 인물은 (모든 일에는 끝이 있고, 인간은 언젠가 죽으니까) 지금을 즐기자(하고 싶은 걸 하자)는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랑도 욕망도 무상하기는 마찬가지인데, 누구는 무상하므로 구애받지 않으려 하고 누구는 무상하므로 더욱 갈구하는 것이 재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주의 일곱 조각
은모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소설 전체의 길이가 짧기도 하지만, 형식이 워낙 신선하고 내용도 좋아서 구입 이후 여러 번 읽었다. 총 일곱 편의 소설이 담긴 연작 소설집인데, 모든 소설의 주인공이 30대 여자 친구 세 명(성지, 민주, 은하)이고, 각각의 단편이 분리된 듯 보이지만 연결되어 있는 평행 우주라는 설정이다. (작가 후기에 따르면 미나시타 기류와 우에노 지즈코 대담집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에서 어떤 문장을 읽고 이 소설을 집필할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첫 번째 단편에서 성지는 로맨스 드라마의 악녀 아니면 아침 드라마의 젊은 엄마 역할을 주로 맡는 조연 배우다. 민주는 아이 둘을 키우는 워킹맘이고, 은하는 교사이며 결혼을 앞두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은 그동안의 안부를 나누며 각자의 신세를 한탄한다. 성지는 배우 인생 중에 한 번이라도 주연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고, 민주는 일과 육아를 양립하는 게 힘에 부친다. 은하는 자신을 괴롭히는 원가족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람 핀 남자와 결혼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다. 


이어지는 두 번째 단편, 세 번째 단편... 일곱 번째 단편에서 이들의 삶은 조금씩 변화한다. 성지는 배우 아닌 직업을 가져보기도 하고, 마침내 주연 배우가 되어 보기도 하고, 아이돌 가수를 하기도 한다. 민주는 아이 없이 살아보기도 하고, 여자와 사귀어 보기도 한다. 은하는 자신을 괴롭히는 가족과 연을 끊어보기도 하고, 상담을 받아보기도 한다(가장 좋아 보였던 삶은 가정 폭력에 시달리던 엄마가 이혼을 택한 삶이었다.) 


이런 식으로 동일한 조건을 가진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인생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내 인생도 나의 선택에 따라서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다른 세계에서는 거절을 잘 못해서 고생했던 은하가 어떤 세계에서 거절하는 연습을 하면서 전보다 나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갈등을 회피하지 않고 갈등에 맞서는 사람만이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지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