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록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철학자 황제가 전쟁터에서 자신에게 쓴 일기 현대지성 클래식 1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즐겨보는 북튜버가 애독서라고 해서 읽어본 책이다. 이 책을 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는 로마 제국의 16대 황제이자 오현제 중 마지막 황제다. 황제이자 스토아 철학자로서도 유명한 마르쿠스는 12세 때부터 철학에 깊은 흥미를 보였고 유니우스 루스티쿠스로부터 스토아 철학을 계승했다.


마르쿠스가 이 책을 쓴 건 자신의 생애 말기에 외적들의 침공을 제압하기 위해 제국의 북부 전선이었던 도나우 지역으로 원정을 간 10년에 걸친 기간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마르쿠스가 전쟁 중에 쓴 '난중일기'인 셈이다. 마르쿠스는 거의 매일 글을 쓰며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일과 이민족과의 전쟁이라는 외적인 압박감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해방감을 느끼고, 동시에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다잡았다.


이 책에서 마르쿠스는 자신의 핵심적인 신념들과 가치들을 짤막하면서도 강렬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마르쿠스는 제1권에서 자신의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스승들로부터 배운 가치와 교훈을 나열한다. 마르쿠스는 할아버지로부터 선량하다는 것과 온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웠고, 아버지로부터는 겸손함과 남자다움이 무엇인지를 알았다고 썼다. 어머니에게는 신을 공경하며 살아가는 경건한 삶과 사람들에게 후히 베푸는 삶을 배웠다고 썼다. 이를 통해 마르쿠스는 그 누구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혼자만의 힘과 지혜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 되새기지 않았나 싶다.


2권부터 12권까지는 마르쿠스가 원정 중에 쓴 글이 본격적으로 나온다. 마르쿠스는 이런 문장들을 남겼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죽을 수도 있는 사람처럼 모든 것을 행하고 말하고 생각하라.", "설령 네가 삼천 년, 아니 삼만 년을 살 수 있다고 할지라도, 지나가는 것은 오직 지금 살고 있는 삶이고, 너는 지나가는 삶 외에 어떤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문장들은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을 지닌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나 스티브 잡스가 남긴 "내가 곧 죽는다는 걸 기억하는 건, 큰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원동력이다." 같은 말과도 맥락이 비슷하다.


이 책에 실린 마르쿠스의 명언 자체도 좋지만, 로마 황제라는 지상 최고의 지위에 있던 인물조차도 매일 자신의 하루를 반성하고 마음가짐을 바로잡기 위해 일기를 썼다는 사실이 마음에 위안을 준다. 세상을 호령하는 로마 황제도 삶이 버겁고 죽음이 두려워 책과 씨름하며 현자들의 지혜를 구했구나. 어떻게든 가장 적확한 표현을 생각해 내서 자신이 성찰한 바를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어했구나. 이 얇은 책이 2000년 가까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읽히고 전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팟캐스터 - 나는 내 팟캐스트가 제일 재밌다 아르테 S 2
영혼의 노숙자 외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자칭타칭 팟캐스트 중독자다.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출퇴근할 때, 잠들기 전까지 틈만 나면 팟캐스트를 듣는다. 주말에는 주중에 듣지 못한 팟캐스트를 몰아서 들으며 쉬거나 인터넷 서핑을 하거나 밀린 집안일을 한다. 팟캐스트 없는 일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나의 관심을 확 잡아끄는 책을 만났다. <영혼의 노숙자(영노자)>, <세상엔 좋은 책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힘들다(세너힘)>, <어느 남녀의 책읽기(어남책)>, <잘팔리는 문학회(잘팔문)> 등 인기 팟캐스트 넷이 힘을 모아 만든 책 <팟캐스터>이다.


하루 종일 팟캐스트를 듣는다고 말한 게 민망하게도 이 중에 내가 들어본 팟캐스트는 <영노자>가 유일하다. <영노자>, 그 이전에 <독일언니들>을 듣지 않았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영노자>를 알게 된 건 불과 몇 달 전이다. 트위터를 통해 이다혜 기자님이 <영노자>라는 팟캐스트에 게스트로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렇게 알게 된 <영노자>를 관심 가는 회차부터 하나씩 듣다가(정세랑, 요조, 오지은 편) 진행자인 셀럽 맷 님이 예전에 진행한 팟캐스트 <독일언니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대체 어떤 팟캐스트인가 싶어서 1회부터 들어봤는데 1회부터 취향저격이었고(진행자 두 분 모두 일본 오와라이 팬, 쟈니스 팬인 거 알고 내적 친근감 뿜뿜 ㅎㅎ) 단숨에 22회까지 정주행을 달렸다. 그 후 다시 <영노자>로 돌아와 1회부터 정주행하는 중이다.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영노자>를 진행하는 셀럽 맷 님의 이야기가 가장 친근하고 흥미로웠다. 맷 님의 '팟캐스터 변신 비화'는 그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감이다.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하고 일본 최대 코미디언 매니지먼트 회사인 '요시모토'에 들어가려 했다가 독일 유학으로 방향을 튼 맷 님. 몇 년째 힘든 유학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우연히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듣고 대학 시절 단짝이자 독일에서 함께 유학 중인 친구 드라마퀸에게 바로 영업했다. 대학 개그동아리 시절부터 죽이 잘 맞았던 두 사람은 '우리도 코미디 팟캐스트를 만들어 보자'라고 의기투합했고, 그렇게 <독일언니들>을 시작했다. 망하면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팟캐스트가 의외의 큰 성공을 거뒀고, 마침내 하고 싶은 일을 찾은 맷 님은 독일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 단독으로 팟캐스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영노자>다.


팟캐스터 중에는 팟캐스트로 이름을 알려 라디오 진행자가 된 사람도 있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사람도 있고, 사업을 시작한 사람도 있고, 이런저런 방식으로 삶의 전환을 이룬 사람이 아주 많다. 현재로서는 맷 님이 그들보다 더 크게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맷 님이 그들보다 대단한 성취를 해내고 더 크게 될 것 같아 보인다. 단순히 팬심만은 아니다. 팟캐스트를 비롯해 대안 미디어를 찾는 사람들은 기존 미디어가 다루는 주제나 방식이 마음이 들지 않기 때문에 대안 미디어를 찾는다. (나처럼) 기존 미디어가 자신의 관심 분야 - 여성, 페미니즘, 책, 문화 등 - 을 다루는 방식이나 깊이, 분량 등등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팟캐스트를 비롯한 대안 미디어를 찾을 것이고, 그런 사람이 늘어나면 자연히 맷 님과 <영노자>를 알게 되고 팬이 될 것이다.


팟캐스터라고 하면 일단 폼 나고 멋있어 보이지만 실상은 그리 멋있지만은 않다고 한다. 최근에는 방송사나 기업이 직접 운영하는 팟캐스트도 있지만, 대부분의 팟캐스트는 1인 또는 소수의 인원이 직접 콘텐츠를 만들고, 게스트 섭외하고, 녹음하고, 편집하고, 피드백하는 과정을 전부 해낸다. 팟캐스트는 유튜브처럼 자동적으로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도 아니고 광고 단가도 높은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팟캐스트를 하는 이유는 뭘까. 이건 <영노자>는 물론이고 <세너힘>, <어남책>, <잘팔문>의 글과 인터뷰를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느낀 건데, 자신의 관심사를 발견하고 확장하고 홍보하고 소통하는 데 있어 팟캐스트만큼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매체가 또 없는 것 같다. 맷 님의 경우 팟캐스트를 통해 코미디언이 되고 싶은 꿈을 다시 확인했고 이를 전부터 관심 있던 페미니즘과 결합해 여성, 페미니즘 이슈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코미디 팟캐스트 진행자가 되었다. <세너힘>, <어남책>, <잘팔문>의 진행자들도 막연히 좋아했던 책, 독립출판, 문학, 영화, 낭독 등에 대한 관심을 팟캐스트를 통해 풀어내면서 전보다 크게 성장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이 책에는 인기 팟캐스터들의 솔직한 수기와 진솔한 비화 외에 예비 팟캐스터 또는 초보 팟캐스터를 위한 매뉴얼도 실려 있다.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팟캐스트의 이해, 아이디어, 기획, 섭외, 대본 쓰기, 녹음하기, 오디오 편집하기, 방송 등록하기, 소통하고 홍보하기, 광고 등에 관해 상세히 알려주니 놓치면 후회할 듯. 작가, 카피라이터에서 팟캐스터로 거듭난 '예스24 책읽아웃'의 진행자 김하나의 추천사도 꼭 읽어보시라.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바람 2019-02-1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팟캐스트 좋아해요
전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주로
 
비웃는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걷자 - 포기 없이 꿈을 이루는 34가지 단단한 생각들
우에마쓰 쓰토무 지음, 이정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솔직히 이 책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우에마쓰 쓰토무가 누군지 모르고 로켓에도 관심이 없어서 끝까지 읽을 수 있으려나 싶었다. 그런데 웬걸,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고 저자가 출연한 TED 강연 영상까지 찾아봤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책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다.


이 책을 쓴 우에마쓰 쓰토무는 주식회사 우에마쓰 전기, 주식회사 가무이 스페이스웍스의 대표이자, NPO 법인 홋카이도 우주과학 기술창설 센터의 이사다. 기업(그것도 두 개나) 대표에 법인 이사라고 하면 대단한 금수저이거나 엄청난 고스펙의 소유자일 것 같지만, 우에마쓰 쓰토무는 금수저도 아니고 고스펙도 아니다.


이 책은 독자의 질문에 대해 저자가 대답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하는 일을 하려면 관련 회사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어요', '저는 원래 꿈이 없는데요', '돈이 없으면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요' 등의 질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자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으며 꿈을 이뤘는지 알게 된다.


우에마쓰 쓰토무는 1966년 홋카이도 아시베츠 시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종이비행기를 좋아한 그는 나중에 크면 비행기 만드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학교 선생님에게 이야기했더니 '네 꿈은 어차피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라며 비웃고 때렸다. 고등학교 때는 비행기 제조 회사에 들어가려면 도쿄대를 나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도쿄대는커녕 입시 문턱이 더 낮은 대학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졸업 후 나고야에 있는 비행기 제조 회사에 입사했고, 그곳에서 스스로 비행기를 설계했던 경험을 토대로 직접 로켓을 개발하는 현재에 이르렀다.


우에마쓰 쓰토무는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남들이 뭐라고 하든 당장 시작하라'고 말한다. 그는 비행기를 만들고 싶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비행기를 만들었다. 비행기 설계에 관한 책을 열심히 찾아 읽었고, 혼자서 비행기 설계도를 그리고 모형 비행기를 제작했다. 그 덕분에 대학에서 유체 역학을 전공할 때는 성적이 매우 좋았고, 나고야에 있는 비행기 제조 회사에 들어가서도 바로 설계 업무에 투입되었다. 남들 말만 듣고 도쿄대에 들어가기 위해 몇 년씩 재수하고 취업 준비를 했다면 오히려 꿈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우주 개발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다고 세뇌한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우주 개발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사람이 늘어놓는 근거 없는 말 때문에 꿈을 포기하거나 미루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타인의 꿈을 비웃는 사람은 꿈을 이루려고 시도조차 해본 적 없는 사람이다. 돈 있고 머리가 좋아야 어떤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돈이 생기고 똑똑해져도 그 일을 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주어진 자리에서 작은 일부터 도전하는 사람만이 큰 일을 이룰 기회를 잡을 수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모르면 먼저 가능한 집안일을 많이 해보라는 조언도 인상적이다. 저자의 아버지는 자동차, 중장비, 대형 특수 차량 수리 등에 관한 일을 했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기계를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무엇이든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사지 말고 직접 만들어 보라는 조언도 덧붙인다. 요리든, 공예든, 농업이든 뭐든 좋다. 필요한 것, 원하는 것을 직접 만들어보면 그 과정에서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기쁨과 보상을 얻는다. 그 과정이 축적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도 보다 명확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에도 무수히 많은 말과 글을 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근길이나 잠들기 전 어김없이 책 한 권을 손에 드는 건, 상대방에 대한 배려 따위 없는 무성의한 말, 일단 그냥 싸질러보자는 심산으로 쓴 게 분명한 글로 인해 지치고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다. 행여라도 누가 읽고 마음에 상처 입을까 봐 쓰기 전에 몇 번은 고심한 흔적이 느껴지는 단어, 깔끔하게 정리되고 단정하게 가다듬어진 문장을 읽으면 그제야 마음이 편안해지고 머릿속이 말끔하다.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 <나를 뺀 세상의 전부>에 담긴 단어와 문장들은 하나같이 정갈하다. 저자는 언제부터인가 누군가의 주장보다 그 사람의 하루를 지켜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에 더 크게 설득되고 더 큰 경이감이 찾아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도 기존의 산문집과 다르게 되도록 생각한 바와 주장하는 바를 쓰지 않고 다만 자신이 직접 만났거나 겪었던 일들만을 담고자 했다.


그리하여 이 책에 담긴 삶의 단편들은 소소하되 사소하지 않다. 기타가 가지고 싶다고 지나가듯 던진 말에, 음악하는 친구가 집에 남는 기타가 있다며 선물로 준다. 당장 아무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데 생각이 나지 않아 즉흥 자작곡을 짓는다. 친구가 예전에 살았던 동네를 걸어서 둘러본다. 둘이서 삼인 분의 김밥을 사들고 근처 어린이 공원 벚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맛있다는 말을 거푸 내뱉으며 김밥을 먹는다. 엄마와 마주 앉아 김장을 담근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세간을 정리하고 비로소 한가해진 엄마는 '이렇게 살고 있으니 아가씨가 된 거 같다'며 웃는다.


그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보았고, 누구를 만났고, 어떻게 되었다고 적었을 뿐인데도 저자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명확하게 보이는 듯하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저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를 뺀 세상의 전부는 어떤 모습일까. 나를 뺀 세상의 전부가 보여주는 내 모습은 어떨까.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이게 다예요."라고 말할 용기가 아직 내겐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 중요한 것들에 대한 사색
어슐러 K. 르 귄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것은 팬심 때문이었다,라고 쓰면 어슐러 르 귄의 명성에 누가 되려나. 어슐러 르 귄이 말년에 쓴 글을 모은 산문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의 서문에 의하면, 어슐러 르 귄은 수필 쓰기를 늘 버거워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슐러 르 귄은 좋아하는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산문집 <노트북>을 읽게 되었다. <노트북>에 실린 글이 전부 주제 사라마구가 여든다섯, 여든여섯에 블로그에 쓴 글이라는 걸 알고 자신도 비슷한 글을 써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이 책의 공을 주제 사라마구에게 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아니면 말고...).


이 책에는 여든을 넘긴 어슐러 르 귄의 노년에 대한 생각과 문학에 대한 생각, 젠더 갈등, 정치 이슈 등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다. 어슐러 르 귄은 나이를 먹고부터 '스스로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만큼 늙는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운동 또는 식이요법으로 노화를 늦출 수 없고 막을 수도 없다. 사람이 나이 들고 결국에 죽는 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것이고, 이는 결국 "신체 단련이나 용기의 문제라기보다 장수라는 운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 운동, 식이요법 따위로 노화를 늦출 수 있다고 하는 건 노화에 대한 오해를 확산시키는 것이고, 노인들을 모독하는 것이다.


어슐러 르 귄은 여성 작가를 홀대하거나 아주 배제하는 문단의 오랜 관행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비난한다. 신경증으로 따지면 마르셀 프루스트와 버지니아 울프 모두 유명하다. 하지만 마르셀 프루스트의 병증은 천재성의 증거로 받아들여진 반면, 버지니아 울프의 병증은 스스로가 '병든 여자라는 걸 증명'하는 히스테리 발작으로 취급당했다. 최고의 문학상은 가혹하리만치 남성 작가들에게 우호적이다. 남성 작가들은 자기들끼리 최고를 향한 경쟁, 문학 패권을 위한 인맥 형성에 골몰한다. 새로운 문학, 우리가 읽어보기 전까지 필요한 줄도 몰랐던 문학은 소외된 여성(또는 일부 남성) 작가들로부터 나오는데, 지치고 게으른 독자들은 문학상 수상작만 읽고자 한다.


어슐러 르 귄의 독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어슐러 르 귄은 '허세 부리고 가식을 떤 대가로'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걷어찰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하고, '끝을 모르고 과대평가받는' 제임스 조이스와 필립 로스를 볼 때마다 화가 치민다고 말하기도 한다. 애정하는 대상에 대해선 하염없는 찬사를 퍼붓는다. 버지니아 울프, 주제 사라마구에 대해 그렇고, 캐서린 스토킷의 소설 <헬프>와 레베크 스클루트의 소설 <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에 대해 그렇다.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고양이! 어슐러 르 귄은 마지막 반려묘 파묘와의 만남과 일상을 총 세 챕터에 걸쳐 상세히 서술한다. 독설가인 줄만 알았던 르 귄 여사가 실은 고양이라면 껌뻑 죽는 '냥집사'였다니. 반전 매력에 허우적거리는 독자가 설마 나만은 아니겠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