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는 여자 - 체육관에서 만난 페미니즘
양민영 지음 / 호밀밭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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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후로 '운동하는 여자'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계기는 두 권의 책이다. 이영미가 쓴 <마녀체력>을 읽고 더 늦기 전에 마라톤, 수영, 자전거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김혼비가 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읽고 그동안 감히 도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구기 종목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 각. 만.


운동할 생각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는 나와 달리, <운동하는 여자>의 저자 양민영은 수영, 크로스핏, 주짓수 등 다양한 운동을 섭렵한 운동의 고수다. 저자는 지난 1년 동안 운동에 몰입하며 겪은 몸과 마음의 변화, 그리고 운동하는 여성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과 편견에 대해 이 책에 썼다. 이 책은 동네 체육관부터 올림픽 경기장까지 다양한 공간에서 목격되는 '운동하는 여성'을 향한 편견과 배제, 혐오와 차별의 장면을 꼼꼼하게 낱낱이 담고 있다.


여성의 몸은 가만히 있어도 대상화된다. 그런 여성의 몸이 움직이기까지 하면 어떨까? 더욱더 대상화될 것이 자명하다. 대표적인 예가 레깅스다. 레깅스란 몸에 완전히 밀착되도록 착용하는 운동복 하의의 통칭이다. 적당한 압력으로 하의를 감싸면 근력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역도 선수들을 비롯한 남자 운동선수들도 레깅스를 즐겨 착용한다. 하지만 성적 대상화가 되는 건 언제나 여자다. 레깅스뿐 아니라 여성이 입는 옷은 대부분 남성들의 성적 판타지를 위해 소비된다. 이쯤 되면 문제는 여성의 옷이 아니라 남성의 눈이라는 걸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운동은 오랫동안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운동하는 여성은 '남자 같다' 혹은 '위협적이다' 같은 말을 들었고, 지금도 과격하고 도전적인 운동은 남성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명백한 차별이다. 남성이 운동하는 것은 남성성을 추구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 모두가 환영한다. 반면 여성이 운동하는 것은 남성의 고유 영역을 침범하는 불경한 행위로 간주된다. 또 여성이 아무리 운동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기록을 세워도 그것은 예외적인 일, 여성끼리의 경쟁에서 이긴 것으로 간주된다.


'왜 지금까지 싸움을 배울 생각을 못 했을까?' 저자가 주짓수를 배우면서 든 생각이다. 대부분의 여성은 싸움을 모르고 싸우는 방법을 모른다. 싸움은 여성성의 영역이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여성들은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는 법을 모르게 되었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고전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를 읽고 "우리가 싸우는 여성이 되는 것을 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비참할 만큼 발달되지 않은 근육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자리한, 때리는 것에 대한 금기"임을 깨달았다고 썼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강력 범죄 피해자 중 91%가 여성, 성폭력 피해자 중 93.5%가 여성이라는 통계는 그 결과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나도 걸그룹이나 모델처럼 날씬하고 섹시한 몸을 원했다. 그런 몸과는 거리가 먼 내 몸을 사랑할 수 없었다. 지금은 바람 불면 스러질 듯한 앙상한 몸보다 단단하고 풍채 좋은 몸이 더 좋다. 그런 몸과는 역시 거리가 멀지만, 지금의 내 몸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좀 더 노력해서 저자처럼 더블언더를 해내고, 물구나무를 선 채로 푸시업을 하고, 클린이나 스내치, 오버헤드 스쾃 같은 동작을 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생전에 가능하겠지?...).


"여성의 몸과 정신을 해방시킬 힘은 결국 억압의 피해자인 여성, 그리고 페미니즘에 있다." 저자는 더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발견하고 잠재된 가능성을 찾는 방법으로 운동을 택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운동하는 여자는 운동하지 않는 여자보다 강하고 자유롭다. 빠르고 똑똑하다. 힘이 세고 민첩하다. 어떤 여자로 살지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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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중록 1
처처칭한 지음, 서미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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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 이후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중국 소설을 만났다. <잠중록>은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바링허우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처처칭한의 작품으로, 발표 직후 조회수 1억뷰 돌파,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인기에 힘입어 빠르게 드라마화가 결정되었고, 인기 드라마 <삼생삼세 십리도화>의 주연 조우정이 남자 주인공을 연기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많은 관심을 모으는 중이다. 아직 정확한 제작 및 방영 정보는 공개되지 않은 상태인데, 만약 드라마가 방영된다면 찾아서 볼 의향이 아주 많이 있다(그만큼 재미있다).


<잠중록>은 온 가족을 독살했다는 누명을 쓴 소녀가 황실로 숨어들면서 펼쳐지는 미스터리 사극 로맨스다. 소녀의 이름은 황재하. 촉 지방 형부 시랑 황민의 딸로 어릴 적부터 영특하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여자 아이지만 오빠와 거의 대등한 교육을 받았고, 때로는 아버지가 맡은 사건을 해결해 황실에도 그 이름이 전해졌다. 하지만 황재하를 제외한 가족 전원이 독살당하고 유일한 생존자인 황재하가 범인으로 지목되며 도주하는 처지가 된다. 사람들은 황재하가 흠모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부모가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라고 강요해서 온 가족을 독살한 것으로 추측한다.


수도 장안으로 숨어든 황재하는 남장을 한 채로 황제의 아우 기왕(이서백)의 마차에 숨었다가 정체를 들킨다. 정체를 들키고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한 황재하에게 기왕은 뜻밖의 제안을 한다. 영민한 두뇌와 비상한 추리력으로 기왕을 도와주면 정체를 숨겨줄 뿐만 아니라 누명도 벗겨주겠다는 것이다. 그렇게 황재하는 기왕의 제안에 따라 소환관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남장을 한 채로 기왕의 곁에서 황실 안팎에서 일어나는 수상한 사건들을 하나둘 해결해간다.


<잠중록> 제1권의 중심이 되는 사건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장안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연쇄 살인 사건인 '사방안'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기왕의 신부 후보로 간택된 절세 미녀 왕약을 둘러싼 미스터리다. 연달아 두 사건을 훌륭하게 해결하며 황재하는 능력을 인정받고 명성을 높이게 되는데, 그럴수록 황재하의 정체를 수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늘고 황재하 본인도 자신의 처지를 답답하게 여기면서 갈등이 점점 고조된다. 1권의 마지막에 이르면 기왕에 이어 황재하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한 명 더 생기는데 이것이 어떤 위기와 결말을 부를지 무척 궁금하다(2권 주문 완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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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의 문학
스즈키 도시오 지음 / 대원씨아이(단행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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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을 만든 일본의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의 대표이사 겸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스즈키 도시오의 에세이집이다. 개인적으로 롤모델로 삼고(모시고?) 있는 분이라서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흡사 경전을 대하는 마음으로 읽었다.


책은 크게 다섯 장으로 구성된다. 제1장 '뜨거운 바람이 온 길'에는 그동안의 지브리 작품을 돌아보며 제작 비화나 소회 등을 털어놓은 글이 실려 있다. 저자에 따르면 '프로듀서의 기본은 구경꾼 근성'이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로센을 설계한 호리코시 지로를 주인공으로 만화 연재를 구상 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자는 미야자키에게 영화화를 해야 한다고 매달렸다. 미야자키는 어디까지나 취미 삼아 하는 일이라며 거절했지만 저자는 끈질기게 매달렸고 결국 그 만화는 <바람이 분다>라는 영화로 완성되었다. 재미있을 것 같다,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다는 감이 오면 창작자에게 떼를 써서라도 결과물을 받아내는 게 프로듀서의 역할이다.


제2장 '인생의 책장'에는 소년 시절부터 현재까지 저자가 그동안 읽어온 책들의 목록이 나온다. 이어지는 제3장 '즐거운 작가들과의 대화'에는 아사이 료, 나카무라 후미노리, 마타요시 나오키, 마이클 두독 드 비트 등 일본의 인기 작가, 외국 애니메이션 감독과의 대담이 나온다. 저자는 아사이 료와의 대담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아주 오래전에 <스타워즈>의 프로듀서와 이야기한 적이 있었어요. 할리우드는 그때까지 갱 영화가 됐든 역사 영화가 됐든 주제는 'LOVE'였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PHILOSOPHY(철학)'가 없으면 관객은 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선 <스타워즈>에서 다스 베이더가 아버지였다는 설정은 들어가지 않았을 거라는 얘기죠."


나카무라 후미노리와의 대담 중에는 이런 말을 했다. "요전에 이케자와 나쓰키 씨의 책을 읽었더니, 지금 세계에서 평가를 받는 건 이 정도로 사람의 유입이 격렬해진 시대인데도 이주민이나 난민처럼 다른 나라로 간 사람, 그리고 그곳의 언어를 하지 못해 고생하면서 언어를 익힌 사람, 그런 사람이 현지의 언어로 쓴 게 재미있다는 ... 그래서 세계문학전집이 옛날 같은 기준으로는 성립되질 않죠." 이에 대해 나카무라는 "이젠 국가의 개성이라기보다는 본인의 개성으로 쓰지 않으면 매몰되고 말아요."라고 답하며 동조했는데(밀란 쿤데라라든가... 줌파 라히리라든가... 약간 다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라든가...) 깊이 공감한다.


제4장 '지금 여기를 거듭해서'에는 <바람이 분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 등을 제작하던 시기의 일들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5장 '추천사'에는 제목 그대로 저자가 여러 매체에 기고한 추천사가 갈무리되어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이모저모와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생각, 미야자키 하야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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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없이 걸었다 - 뮌스터 걸어본다 5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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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에 이어 읽은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 난다의 '걸어본다' 시리즈 다섯 번째 이야기로, 1992년 유학을 떠난 허수경 시인이 20년 넘게 생활한 독일의 도시 뮌스터를 무대로 그곳의 역사와 문화, 그곳에서 활동한 시인들의 이야기를 차분하게 들려준다.


뮌스터는 독일 북서쪽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에 있는 중소규모의 도시이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약 열 시간 거리를 날아오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다. 공항에서 기차로 약 세 시간 반에서 네 시간을 달리면 뮌스터에 도착한다. 인구는 30만 명 정도인데, 그 가운데 학생의 숫자만 5만 명이 넘는다. 전통적으로 대학과 행정을 담당하는 건물이 많고, 교회와 성당의 수는 백여 개를 넘는다. 라인강이 가로질러서 도시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고 사람들의 일상생활도 여유로운 편이다. 뮌스터 출신의 시인이 많은 것은 어느 때나 하염없이 흐르는 저 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하이네, 트라클, 벤, 작스, 괴테, 릴케 같은 이름난 시인이나 그베르다, 아이징어, 호프만슈탈, 드로스테휠스호프 같은 덜 유명한 시인이나 사려 깊고 꼼꼼하게 소개한다. 그 유명한 <로렐라이>를 쓴 독일의 대표 시인 하이네는 생전에 당대의 시인이었던 아우구스트 그라프 폰 플라텐과 크게 다퉜다. 하이네는 플라텐이 동성애자라고 비난했고, 플라텐은 하이네가 유대인이라고 조롱했다. 19세기 중반에 살았던 두 사람은 불과 몇십 년 후에 자신들의 조국에서 동성애자와 유대인을 모두 혐오하는 정치 세력이 나타나 처참한 살상을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이 책에는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와 마찬가지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저자의 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 자주 나온다. '세계의 노예'가 되기 싫어서 자의로 택한 이방인의 삶이지만, 아직 입에 선 외국어와 익숙지 않은 외국 음식, 차갑고 무뚝뚝한 표정의 사람들 때문에 지치고 힘든 날도 많았다. 그때마다 저자는 낯선 거리를 정신이 들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걷다 보면 낯설기만 한 이 도시도 누군가는 사랑을 하다가 헤어지고 그럼에도 사랑은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현지인이나 나나 결국 여기에 계속 있는 존재가 아니라, 얼마든 살다가 언젠가 떠날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저자는 이따금 뮌스터의 중심가를 둥글게 품은 푸른 구역의 구석에 있는 칠기 박물관에 들르기도 했다. 옛 부유한 이의 빌라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이곳에는 한국, 중국, 일본과 이슬람 세계의 칠공예품이 진열되어 있다. 저자는 우울할 때마다 이곳에 와 한국에서 온 칠공예품과 나전칠기 등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조개들도 내 고향의 해안에서 혹은 바다에서 자랐으리'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고향에 다녀온 듯이 마음이 든든해졌다. ​ 이 외에도 낯선 독일의 도시 뮌스터를 정겹게 느끼게 해주는 잔잔하고 단단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독일어를 열심히 배우고 돈도 열심히 모아서, 언젠가 저자의 행선지를 따라 뮌스터를 여행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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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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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완독한 일본 만화 <마스터 키튼>의 주인공 '히라가 키튼 타이치'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학자로 설정되어 있다. 현재는 보험조사원으로 일하고 있지만 장래에는 고고학자가 되는 것이 꿈인 그는 틈만 나면 각국의 발굴지를 찾아가 유물을 채취하거나 유적을 탐사하며 시간을 보낸다.


허수경 시인이 1992년 돌연 독일 유학을 떠난 것도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한국에서의 편안하고 익숙한 삶을 버리고 독일로 떠난 시인은 기숙사 아니면 셋방을 전전하며 공부에 몰두했다. 여름방학이면 오리엔트로 발굴을 하러 가기도 했다. 그곳에는 기숙사나 셋방만 한 숙소조차 없어서 여러 명이 임시로 지은 텐트에서 생활해야 했다. 서울의 빽빽한 빌딩 숲을 벗어나면 오히려 답답함을 느끼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환경이다. 대체 시인은 거기서 무엇을 찾고 싶었던 걸까.


허수경 시인의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는 2003년 2월에 나온 <길모퉁이의 중국식당>의 개정판이다. 이 책은 저자가 쓴 139개의 짧은 산문과 9통의 긴 편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저자가 독일 유학 중에 경험한 일들이나 만난 사람들, 고향에 대한 그리움, 발굴을 하면서 겪은 일들에 관한 단상을 담고 있다.


저자는 서양의 고급 식당에 앉아서 소리를 내면서 수프를 들이키는 고향 선배를 보며 창피함을 느낀다. 민박을 하는 독일인에게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쌍둥이칼을 많이 사느냐, 너희 민족은 닌자냐는 말을 들으며 민망해한다. 한국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저자가 얼굴을 붉힌 건 조국에 대한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넘쳐서다. 저자는 대학 시절 동기들과 십시일반 돈을 모아 나누어 마셨던 막걸리의 맛을 그리워한다. 중국 식당이나 베트남 쌀국숫집에서 먹는 음식으로는 한국 음식에 대한 갈증을 대신할 수 없어 괴로워한다. 진주 유등축제, 시골 오일장, 강변, 골목길, 주점 등등 한국에만 있는 풍경, 한국에만 있는 특별한 정서를 낯선 이국에선 찾을 길이 없다.


저자가 낯선 이국땅에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발굴지를 탐사하며 찾고 싶었던 건 새롭고 특별한 무언가가 아니라 익숙하고 보편적인 무언가이지 않았을까 싶다.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는 땅에도 한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걸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수천 년에 죽고 사라진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사랑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화해하며 살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과거와 현재가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듯이, 여기와 저기가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고, 너와 내가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부디 하늘에선 편히 쉬고, 맛있는 음식 많이 먹고, 더는 외롭지 않으시기를. 너무 일찍 세상을 등진 이의 글을 읽을 때면 언제나 마음이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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