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싶지 않은 것들 데버라 리비 자전적 에세이 3부작
데버라 리비 지음, 이예원 옮김, 박민정 후기 / 플레이타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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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부커상 최종심에 여러 번 오른 영국 작가 데버라 리비의 산문집이다. 문학동네 강윤정 편집자 님의 유튜브 '편집자K'에서 이 책(또는 이 작가)을 알게 되어 구입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은 데버라 리비의 자전적 에세이 시리즈인 '생활 자서전' 3부작의 첫 번째 책이다. 두 번째 책 <살림 비용>은 2018년에 출간되었고, 세 번째 책 <부동산>은 출간 예정이라고 한다. 1988년부터 다수의 장편소설과 소설집을 발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국내에는 단 한 권도 소개되어 있지 않으니 안타깝다. (부디 소개되기를!!) 


이야기는 출근길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위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만큼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였던 저자가 스페인 마요르카로 혼자서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초콜릿을 사려고 들어간 상점에서 한 중국인 남자와 알게 된 저자는, 그날 밤 한 식당에서 우연히 그 남자와 다시 만나게 되고, 식당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던 자신을 구해준 보답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정책)가 존재하던 시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백인 여자아이로서 유년기를 보낸 이야기를. 


저자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살았던 기간은 겨우 9년 정도지만, 그동안 저자는 갖가지 차별과 억압을 목도하고 경험했다. 흑인 보모인 마리아는 저자의 가족을 살뜰하게 보살피지만 정작 자신의 딸을 돌볼 시간은 없다. 학교에선 백인과 흑인이 따로 수업을 받고, 말이라도 섞었다가는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백인 대모의 딸 멀리사 언니는 피부색이 다른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부모에게 숨긴다. 멀리사 언니네 집 하인인 조지프 아저씨는 백인 경찰에 의해 두 손가락을 잃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만 있는 줄 알았던 차별과 억압은 영국으로 건너온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외국에서 왔다는 것, 억양이 다르다는 것, 어리다는 것, 여성이라는 것 등등이 이유였다. 외국에서 와서 억양이 다른 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아졌고, 어리다는 것도 나이가 들면서 차별의 이유에서 배제되었지만, 여성이라는 사실은 성전환을 하지 않는 한 바뀌지 않기에 계속해서 저자의 발목을 잡았다. 여성성, 모성이 남성 중심 사회가 만들어낸 제도인 걸 머리로는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를 버리지 못하고 기꺼이 엄마 역할을 하며, 자신을 부정하느니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여자들을 깎아내리는 편을 택하는 자기 모순에 괴로워했다.


책에는 소설가 박민정의 긴 추천사와 한강, 김숨, 한유주의 짧은 추천사도 실려 있다. 박민정의 추천사는 본문만큼 좋으니 꼭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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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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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크리스티앙 보뱅의 산문집이다. 황정은의 <일기>를 읽다가 이 책의 제목을 보고 궁금해서 주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에는 서문을 포함해 총 열 편의 글이 실려 있다. 저자가 시인이라서 그런지, 에세이 형식의 글인데도 시처럼 읽힌다. 본문의 글도 좋았지만 서문의 글이 압도적으로 좋았는데, "책이라면 손도 대지 않는 부자들이 있는가 하면 독서에 송두리째 마음을 빼앗긴 가난한 사람들도 있다. 누가 가난한 사람이고 누가 부자일까." (16쪽) 같은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독서가가 있을까.


"글쓰기는 (중략) 계급 체제에 등을 돌림으로써 건드릴 수 없는 것들을 건드리기 위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결코 읽지 않을 한 권의 책을 바로 그들에게 바치기 위해서이다."(17쪽) 같은 문장을 읽을 때는,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를 저자가 먼저 깨닫고 일러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았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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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력 - 젊은 만화가 테마단편집
AJS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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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기>에 이어서 읽은 여성 만화 앤솔로지다. <극락왕생>의 고사리박사 님이 참여했다는 말만 듣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입했는데, 고사리박사 님의 단편 <조용한 세상의 미소>는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아포칼립스 세계에서 자급자족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여성+비건+초능력자들의 이야기랄까요... 영상화될 때까지 존버합니다ㅠㅠ). 


AJS님의 <함안군 가야리 땅문서 실종사건>은 잊고 있던 기억을 재생시켜 무엇이든 찾아주는 사무소가 있다는 설정도 좋고 에피소드 내용도 감동적이라서 장편으로 연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이랑 님의 <바람이 불면>은 평범한 여학생 민아와 '크리스퍼(초능력자)'인 선형이 친구가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작품인데, 학창 시절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민아와 선형 중 어느 쪽이었을까요...ㅎㅎ) 반갑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 시절 여러모로 부족하고 서툴렀던 나를 받아주고 이해해 준 사람들(특히 친구들) 모두 감사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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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발걸음 - 풍경, 정체성, 기억 사이를 흐르는 아일랜드 여행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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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플레인'이라는 용어를 유행시킨 미국의 작가 리베카 솔닛의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대표작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쓰기 훨씬 전인 1997년에 발표한 책이다. 이때만 해도 젊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고, 작가로서의 경력도 일천했던 저자는, 외삼촌으로부터 아일랜드 국적이 생길 거라는 말을 듣는다. 어머니가 아일랜드 이민자 집안 출신이라서 아일랜드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건 알았지만, 저자는 스스로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국인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얼마 후 아일랜드 여권이 나왔을 때도 내 것 같지 않은 어색함을 느꼈다고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여러 번에 걸쳐 아일랜드 더블린과 서해안 지역을 여행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담고 있다. 아일랜드의 역사와 정치, 문화와 예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아일랜드가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였고 현재도 영국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나는 자동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떠올리게 될 때가 많았다. 영국의 식민 지배가 아니었다면 아일랜드의 근대화, 산업화 속도가 지금보다 더뎠을 거라고 주장하는 영국의 모습에서, 현재 일본의 우익과 한국의 보수 진영을 보는 것은 나뿐일까. 


아일랜드의 독립 영웅 로저 케이스먼트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된 인물인데, 검색을 해보니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에도 등장할 만큼 당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가 아일랜드 출신이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지만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아일랜드로 돌아가 목회자로 살면서 경험하고 깨달은 것들을 <걸리버 여행기>에 담았다고 하니, 조만간 <걸리버 여행기>도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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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1-1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앞부분에 말씀하신대로 오래전 조상이 아일랜드출신이라는 이유로 아일랜드 국적이 생기는 이야기 굉장하 신기하더라구요. ^^ 저는 반쯤 보다가 나중에 시간될때 찬찬히 봐야지 하면서 덮어뒀는데 다시 꺼내 읽어야겠어요. ㅎㅎ

키치 2022-01-14 08:20   좋아요 0 | URL
저도 신기했어요 ^^ 덕분에 알게된 아일랜드에 관한 이야기들도 흥미로웠습니다. 덧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원한 유산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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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철거되기 전까지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실제로 존재했던 '벽수산장'이라는 건물이 소재인 소설이다. 도대체 어떤 건물이길래 '아방궁'이라는 별명이 붙었나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과연 아방궁이라고 불릴 만하다. 면적이 무려 200평에 달하고 정원에 연못도 있었다고. (참고 : '큰거문고' 님 블로그 "벽수산장을 아시나요" https://blog.naver.com/graz2000/222599526739) 


이야기는 1966년 이해동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하는 윤원섭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언커크(UNCURK, UN한국통일부흥위원회)'의 호주 대표 애커넌의 개인 비서인 해동은 현재 언커크 건물로 쓰이고 있는 벽수산장의 옛 주인이자 악명 높은 친일파 윤덕영의 막내딸 원섭을 애커넌에게 데려간다. 비록 천애고아로 고모 손에 컸지만,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셨다는 게 나름의 자랑이었던 해동은 친일파의 딸인 데다가 사기죄로 복역까지 한 원섭이 애커넌의 마음에 들어 자신의 윗사람 노릇을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후에도 원섭이 계속 눈엣가시 같은 행동을 하지만, 해동은 좀처럼 벽수산장을 떠날 마음을 먹지 못한다. 지방 출신에 무학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받아주고 과분한 월급까지 주는(그것도 달러로!) 직장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아름답다"라는 탄성이 나올 만큼, 건물 자체가 매혹적이고 세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보기에 좋은 것만이 전부일까.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해동은 자신이 벽수산장에 매혹된 '진짜 이유'는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이 건물이 상징하는 당대 최고의 권력과 부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설에는 두 가지 유산이 나온다. 하나는 벽수산장을 비롯한 '물질적 유산'이고, 다른 하나는 가족이나 애국심 같은 '정신적 유산'이다. 벽수산장은 결국 전소되고 철거되었고, 해동의 유일한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고모네 식구들은 고모의 죽음을 계기로 해동과 등졌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 정신만큼은 계속해서 이어질 줄 알았지만, 이마저도 1965년 한일수교 이래 빛바랜 가치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 <영원한 유산>이 뜻하는 '영원한' 유산은 무엇일까. 어떤 유산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제목일 수도 있지만, 그 모든 환난과 고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살아가는 해동과 그의 새로운 가족들을 보면서, 결국 사람이 유산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을 길러내고 있을까. 벽수산장처럼 종국에는 파괴되어 잊힐 것들만 만들어내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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