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나기라 유 지음, 김선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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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후 인류가 멸망한다면 남은 날들을 나는 어떻게 보낼까.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얼마 전에 읽은 나기라 유의 소설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 때문이다. 나기라 유는 BL 소설 <아름다운 그>로 알게 되어 <유랑의 달>, <신의 비오톱>을 읽으며 더욱 좋아하게 된 작가다. <멸망 이전의 샹그릴라>는 아무 정보 없이 그저 나기라 유가 썼다는 것과 2021년 서점대상 최종 후보작이었다는 것만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기대한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멸망'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이 정해져 있는데도 재미있을 수 있다니. 역시 내공이 대단한 작가라고 느꼈다.


소설은 '에나 유키'라는 남자 고등학생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싱글맘의 아들인 에나는 학교 폭력 피해자로 매일 죽고 싶은 마음과 싸운다. 그런 에나의 유일한 삶의 희망은 어릴 때부터 좋아한 '후지모리 유키에'라는 여학생인데, 부잣집 딸인 데다가 외모까지 완벽한 유키에가 자신처럼 가난하고 뚱뚱한 학폭 피해자를 좋아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잘 알기에 더욱 괴롭다(참고로 에나-유키에의 관계는 <아름다운 그>의 히라-키요이의 관계와 유사하다). 그러던 어느 날 뉴스에서 한 달 후 지구에 소혹성이 충돌해 인류가 절멸할 거라는 정부 발표가 나온다. 어차피 더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던 에나는 유키에가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기 위해 도쿄에 간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따라가기로 결심한다.


이후의 내용은 살인 청부를 받은 야쿠자 '메지카라 신지', 혼자 힘으로 아들을 키워 온 '에나 시즈카', 인기 가수이지만 내면은 공허한 '야마다 미치코'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서로 무관해 보였던 네 사람의 이야기가 연결되는 과정을 보는 것이 흥미진진했고, 무엇보다 멸망 이전에는 죽으나 사나 상관없다는 식으로 살았던 네 사람이 막상 죽음이 예정되자 남은 삶은 '나답게 살자'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오히려 전보다 행복해지고 주어진 삶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행복한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걸 하면서 살아야 행복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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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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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주목 받는 외국 작가 중 한 명이다. 국내에 먼저 소개된 클레어 키건의 책들로는 <맡겨진 소녀>, <푸른 들판을 걷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있는데, <맡겨진 소녀>에는 딸이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여자아이가, <푸른 들판을 걷다>에는 아버지의 학대와 폭력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나는 여자들이,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는 미혼모라는 이유로 아이를 빼앗기고 사회의 냉대를 받는 엄마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다시 말해 클레어 키건은 아일랜드 사회 내의 여성혐오의 양상이나 심각성을 소설로 형상화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온 작가라는 것이다.


클레어 키건의 단편집 <너무 늦은 시간>도 다르지 않다. 이 책에는 2022년에 발표한 <너무 늦은 시간>과 2007년에 발표한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1999년에 발표한 데뷔작 <남극>이 실려 있다. 결혼식 직전에 아내가 될 예정이었던 여자에게 파혼당한 남성 공무원의 어느 하루를 그린 <너무 늦은 시간>, 집필을 위해 작가 레지던스에 머무르고 있는 여성 작가가 모르는 남성의 방문을 받으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가족을 배신하고 낯선 동네에서 외도를 즐기던 여자에게 생긴 어떤 사건을 그린 <남극>은 각각 다른 시기에 쓰였고, 다른 인물과 배경과 사건을 다루지만, 결말까지 읽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비슷비슷했다(남자들은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이 남자를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지는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이 책의 번역판에 원제 대신 'Misogyny(여성혐오)'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작가의 여성과 남성, 역사와 사회를 보는 관점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책이다. 불행한 여자들이 나오지만 타인의 선의와 용기로 도움을 받는 장면이 나와서 어느 정도 감동도 주고 위안도 주는 <맡겨진 소녀>나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달리, 이 책에 나오는 여자들은 누가 와서 도와줄 거라는 기대를 하기도 어렵고, 세 편 모두 남성이 여성에게 추가적인 피해(스토킹, 보복 등)를 입힐 것 같아 두렵다는 점에서, 현실의 여성들이 겪는 공포와 불안을 더욱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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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 2024 부커상 수상작
서맨사 하비 지음, 송예슬 옮김 / 서해문집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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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비행사가 아닌 민간인도 돈만 내면 우주에 갈 수 있는 시대가 멀지 않다고 한다. 혹시라도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나는 우주에 가고 싶을까. 우주는커녕 지구에도 못 가본 곳이 많은 나로서는 우주여행을 할 돈으로 세계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어떤 사람은 없는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우주에 가보고 싶기도 할 것이다. 만약 우주에 가게 된다면, 그것도 관광 목적이 아니라 어떤 임무를 가지고 몇 개월 또는 몇 년을 우주에서 보내게 되면 어떤 일상을 보내게 될까. 그 생활을 다소 짐작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책이 2024 부커상을 수상한 서맨사 하비의 소설 <궤도>이다. 


소설의 배경은 하루에 16번 지구를 공전하는 우주선 속이다. 우주선에 타고 있는 우주비행사는 모두 6명으로, 남성은 넷, 여성은 둘이고, 국적은 미국, 영국, 일본, 이탈리아, 러시아 등이다. 소설은 6명이 우주선 안에서 각자의 일상을 보내는 모습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들의 일상은 대체로 잔잔하고 평온하게 흘러가는데, 그동안 지구에는 태풍이 일어나 엄청난 인명 피해가 일어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등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6명의 우주비행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온갖 희로애락이 펼쳐지고 있는 지구가 우주에서는 그저 '창백한 푸른 점'으로 보이는 것에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지구에선 우주 개발을 두고 러시아와 비 러시아 국가들 간의 경쟁이 존재하지만. 우주선에 타고 있는 우주비행사들 사이에는 그런 경쟁이 존재하지 않는다. 경쟁해 봤자 몇 달, 길게는 몇 년을 한 공간에서 지내는데 서로 불편할 뿐이고 생존에 위협만 된다. 지구에선 또한 신을 믿는 사람과 신을 믿지 않는 사람, 신을 믿는 사람 중에서는 어떤 신을 믿는지를 두고 갈등하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우주선 안에서는 그런 갈등을 표면화하는 일이 없거니와, 있어도 눈앞의 우주 공간을 보면 그런 걸로 다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구인들이 배워야 할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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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신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0
손보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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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C, 즉 선택을 만드는 건 때때로 우연이고, 우연에 의한 선택은 우리를 우리 자신도 상상하지 못한 장소로 우리를 데려간다. 소설가 손보미가 2019년에 발표한 책 <우연의 신>의 내용도 그렇다. 경찰대 졸업 후 경찰청에 근무하다 현재는 민간 조사원으로 일하며 남부럽지 않은 수입을 올리고 있는 '그'는 매년 한 번씩 떠나는 휴가를 앞두고 낯선 의뢰인에게 어떤 제안을 받는다. 휴가를 목숨처럼 중요시하는 '그'인지라 의뢰인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든 감정에 이끌려 제안을 받아들이고 만다.


한편 뉴욕의 한 아트 에이전시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는 학창 시절 자신을 싫어했던 친구 '알리샤'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나면서 자기 앞으로 유품을 남겼다는 연락을 받는다. 대체 왜 자신에게 유품을 남겼는지, 그 유품이 무엇인지 궁금해진 그녀는 함께 사는 개를 이웃에게 맡기고 친구의 어머니가 있는 프랑스 리옹으로 떠난다. 리옹에는 의뢰인의 제안으로 세상에 단 한 병만이 남아 있는 '최후의 조니워커 화이트 라벨'을 찾으러 온 '그'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며칠을 기다려 자신이 찾는 '화이트 라벨'의 새로운 주인이 '그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정체와 본심을 숨기고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와 '그녀'는 각각 서울과 뉴욕에서 이 정도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사실 내면에는 좀처럼 걷어내기 힘든 권태와 우울을 안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일 년에 단 한 번 자신을 '리프레시'하기 위해 떠나는 휴가에 그토록 집착하고, '그녀'가 함께 사는 개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개가 정말 행복한지 걱정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그런 두 사람이 연속된 우연의 작용으로 리옹에서 만나 즉흥적으로 파리로 떠나는 과정을 보면서, 어쩌면 이들은 '최후의 조니워커'를 만나기 위해 여기에 온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후의 조니워커'라는 핑계가 필요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모두 지금처럼 살기 위해 그동안 엄청난 노력을 했을 텐데, 가장 원하는 것이 지금의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니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가 있을까. 이 소설에도 등장하고 손보미 작가의 소설집 <맨해튼의 반딧불이>에 실린 연작의 제목이기도 한 '분실물 찾기의 대가'라는 말에서 '분실물'은 어쩌면 각자의 인생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우연의 신>은 <맨해튼의 반딧불이>에 실린 단편 <최후의 조니워커>를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맨해튼의 반딧불이>를 읽고 쓴 리뷰에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를 연상케 하는 탐정 소설'이라고 썼는데, <우연의 신>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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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손님들 마티니클럽 2
테스 게리첸 지음, 박지민 옮김 / 미래지향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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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 테스 게리첸의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 <스파이 코스트>를 재미있게 읽었다. 주인공 '매기'는 겉보기에는 혼자 사는 평범한 할머니이지만 사실은 은퇴한 CIA 요원이다. 평소에는 닭을 키우며 지내다 이따금 자신처럼 메인 주에 살고 있는 전직 CIA 요원 친구들과 '마티니 클럽'이라는 북클럽(을 빙자한 술 모임)을 하는 것이 현재의 일상에서 가장 큰 자극이다. 매기는 CIA 요원이었던 과거를 뒤로 하고 남은 삶은 최대한 조용하고 평범하게 보내고 싶다. 하지만 어느 날 집 앞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체 한 구를 발견하면서 가까스로 지켜온 평온한 일상에 금이 간다. 


<스파이 코스트>의 후속편 <여름 손님들>은 그 후의 일을 그린다. 매기와 친구들이 사는 '퓨리티'에는 '메이든'이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이 호수 주변에는 다른 도시에 사는 부유한 사람들이 여름에만 와서 지내는 별장이 다수 있다. 몇 대에 걸쳐 여름마다 가족들이 별장으로 와서 지내는 가문 중에 '코노버' 가문이 있다. 그들이 도착한 지 며칠 안 지나, 코노버 가문의 둘째 아들 '에단'과 결혼한 '수잔'의 딸 '조이'가 호수에서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매기의 이웃이자 캐리의 할아버지인 '루터'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루터가 범인이 아니라고 판단한 매기는 마티니 클럽 멤버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초반부터 매기가 전직 CIA 요원인 설정이 중요한 <스파이 코스트>와 달리 <여름 손님들>은 여름을 맞아 호숫가에 있는 별장에 놀러 온 평범한 소녀의 실종을 다룬 이야기이기 때문에 CIA 요원 설정이 굳이 필요한가 싶었다. 그런데 실종 기간이 길어지고 조와 매기, 마티니 클럽 멤버들이 찾는 단서들이 점점 '평범한 소녀의 실종'과는 무관해 보이는 방향을 향하면서 매기와 마티니 클럽 멤버들이 전직 CIA 요원이라는 점이 중요해지고, 실제로 이들이 요원 시절에 받은 훈련과 그 때 쌓은 경험, 지식이 발휘되는 장면들도 나온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면 아주 멋진 장면들이 나올 것 같다.)


여름 한 철에만 별장에 와서 지내는 부유한 사람들이 마을의 주인처럼 행세하고, 평생을 그곳에서 산 주민들은 그들의 하수인으로 일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인식도 인상적이었다. 돈이 많으면 남들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자격이라도 생기는 줄 아는 어떤 사람들의 모습이 연상되었다. 한때 CIA라는 남초 조직에서 활약했던 매기가 젊은 여자라는 이유로 주변 남자 경찰들에게 조력은커녕 무시만 당하는 경찰서장 대행 조 티보듀에게 멘토 역할을 해주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아무 관계 없는 두 여자의 연대와 협력이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나 이성애에 기반한 부부의 사랑보다 위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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