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지치지도 않나 보다. 밤이 깊어갈수록 무게를 더해가는 비다. 처마를 두드리는 빗소리는 귓가를 또렷하게 맴돌고 갓내린 커피향에 책장을 넘기는 손은 더디기만 하다.

연암의 '취답운종교기' 문장 속 벗들은 3경이 지났지만 밤 깊은 줄도 모르고 운종가를 지나 광통교에서 노닐다가 수표교 위에서 멈추고 밝아오는 새벽을 맞는다.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이야 옛사람과 비슷하다지만 어찌 그 속내까지 닮을수 있으랴. 밤은 깊은데 잠은 달아나 버린 까닭이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때문만은 아니다. 문장 속 옛사람의 벗을 대하는 애틋한 마음이 마냥 부러운 때문이다.

뜰의 디딤돌 위에 머무는 젖은 불빛을 바라보며 애꿎은 가을비만 탓하는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월十月의 첫날이다.
十月로 쓰고도 시월時越로 이해하고자 한다. 여름과 겨울, 뜨겁고 차가운 사이의 시간이지만 오히려 그로인해 더 민감해지는 마음 깃에 그 시간을 초월해버리고 싶은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더없이 맑고 한없이 깊으면서도 무엇보다 가벼운 시월의 시간과 마주한다. 

시월時越에 자연과 사람, 사람과 사람, 나와 다른 나와 같은 관계, 사이와 틈에 주목한다. 그 안에서 무엇을 만나 어떤 향기로 남을지는 지금 이 마음으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十月로 쓰고도 시월時越로 이해하고자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금

해마다 피는 꽃이라도
같은 모습은 아니다
그 꽃을 바라보는 나는 같지 않다

* 시인 이정하의 시집 '다시 사랑이 온다'에 실린 '지금'이라는 시의 일부다. 

달콤한 향기를 가득 담은 금목서가 어제는 피는가 싶더니 오늘은 무게를 더하는 가을비에 속절없이 떨어지고 만다. 시인의 말처럼 매해 반복적으로 눈맞춤하는 같은 이름의 꽃도 나도 같지 않다. 피는 꽃도 새로운 생명이며 꽃을 바라보는 나도 무엇하나 같은게 없다. 비로소 민낯의 자신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늦은 봄 노각나무에서 문턱을 넘어선 가을 금목서까지 올해는 유독 떨어진 꽃에 눈길이 간다. 떨어지고서야 비로소 온전히 다시 꽃으로 피어나 제 사명을 다하는 꽃에서 다시없을 소중한 순간을 주목하게 된다.

오늘, 지금, 이 순간이 담고 있는 소중한 가치를 온전히 품을 수 있다면 모든 생명은 매 순간은 꽃이 아닌 때가 없다. 떨어진 꽃은 자신을 떨군 이 가을비 보다 더 무거운 향기로 계절의 깊이를 더하고 스스로 온 곳으로 가는 중이다.

꽃으로 피었다 지며 향기로 남을 우리 모두도 그렇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참새가 재잘거리듯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에 이른 아침을 맞는다. 이 비로 한층 더 깊어질 가을을 받아들이라는 계절의 예비신호 치고는 빨리도 무거워져 둔탁한 소리로 변했다.

예기치 못한 여분의 시간은 빗소리를 벗삼아 책을 손에 잡아보지만 깨어나기에는 더딘 눈보다는 이미 빗소리에 집중해버린 열린 귀가 먼저인 까닭에 책보기는 진즉 어긋나 버렸다.

마루에 앉아 까만새벽 비가 오는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빗소리에 집중한다. 머리를 맑게 해주는 것이 책보다 훨씬 좋은 벗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서둘러 잎을 놓아버린 벚나무 아래 가을비와 함께 머문다.

억새도 꽃을 피우고 여우팥, 도둑놈의갈고리, 동부콩, 꽃피운 쑥, 새콩, 매듭풀, 차풀까지 눈을 돌리는 곳마다 꽃이다.

굵어지는 빗방울이 안개를 뚫고 먼 곳의 그리운 소리를 전해준다. 뚝방에 서서 가을비와 눈맞춤하는 동안 더디게 아침을 열었던 그 시간이 빠르게도 지나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