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저 너머에 - 아직도 가야 할 길 그리고 저 너머에
M. 스캇 펙 지음, 손홍기 옮김 / 열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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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소 무겁고 난해한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는 자신이 목적하는 바가 따로 있겠지만, 그 기저에는 지적 허영심 내지는 우쭐함이 잠시라도 머물게 된다.
재미와 감동을 우선으로 하는 문학 작품들의 실제적이고 감각적인 텍스트와는 달리 철학이나 심리학과 같이 추상적이고 모호한, 독자의 지적 수준에 따라 때로는 암호 해독가가 되어야만 하는 이러한 부류의 책을 좋아라 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많은 독서인 중에 소수가 된다는 것.
물질만능의 시대에 형이상학을 탐독한다는 것.
이런 수단으로 지적 허영심을 너무나 쉽게 충족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주의자'라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사회 봉사자들도 마음 한켠에는 봉사를 통한 뿌듯함을 충족하려는 이기심이 상존하는 것이다.  물론 나도 그렇고 봉사자들도 그렇고 본 목적이 그것 하나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사람의 심리나 일상 생활은 그만큼 복잡하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저자 스캇 펙 박사에게 끌리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저자의 나이 마흔에 썼다는 <아직도 가야할 길>을 내가 처음 읽게 되었을 때, 기존의 심리학 서적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몇 가지 차이점을 보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라고 믿기 어려운 문학적 재능과 불완전한 존재로 남을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심, 그리고 많은 임상 경험과 사유가 없었으면 불가능할 법한 쉽고 평이한 문장 전개가 그것이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프로이트, 카를 융, 애들러 등의 심리학 서적을 이해하는, 어쩌면 그 벽을 넘어서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런 이유로 스캇 펙 박사의 책이라면 더 이상 그 필요성에 선택 기준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야말로 조건 없는 책읽기가 시작된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예순이 되어 자신이 그동안 출간했던 책들의 내용을 정선할 필요성을 느껴 집필한 책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듯이 그것은 요약이 아닌,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통합(synthsis)'하는 과정이요, '넘어 섬'을 의미한다.
책의 구성은 총3부로 되어 있는데,
개인과 사회가 가진 병리 현상의 근저에 있는 원시적이고 나태한 단순 사고를 비판한 1부와 우리가 훌륭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하는 복잡한 선택의 문제를 다룬 2부, 그리고 적절한 지적, 감정적 대가를 치르고 났을 때 우리가 어떤 곳에 다다를 수 있는가에 대하여 쓰고 있는 3부가 그 주요 내용이다.
사실 스캇 펙 박사의 책 중에 이 책을 처음으로 선택한 독자라면 전체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의 삶의 목적이 그저 고통 없는, 곧 언제나 편안하고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니기에 저자는 이 책에서 깊이 있는 사고를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
  깊이 있는 사고를 한다는 것은 피상적인 사고를 하는 것보다 훨씬 고통스럽다.(P.86)
저자가 강조하는 '생각하기'의 중요성이 삶을 이해하고 충만한 삶을 영위하는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그가 지은 다른 책에서도 언급하였듯이 모든 중요한 일에는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하는 까닭에 우리는 생각하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질문은 너무 중요한 것이어서 네 스스로 그 대답을 찾아야 하는 경우도 있단다.(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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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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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내게도 나조차 통제할 수 없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독서에 대한 편향성이다.  일상이 바쁠 때에는 오히려 팍팍한 일상을 책에서나마 보상 받으려는 심산으로 가볍고 부드러운 소설이나 시 또는 신변잡기적인 수필에 매료되지만, 시간적 여유가 조금이라도 생기면 여지없이 철학에 빠져들곤 한다.
학창시절부터 시작된 이러한 독서 습관이 때로는 두렵기까지 하다.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졸업 무렵까지 장장 5년을 철학 서적에 묻혀 살았던 기억.  그에 따르는 행동의 편향성(금욕적 스토이즘에 가까운).  대학에 입학한 이후에도 당시의 대학생들이 즐겨 출입하던 학사주점이나 당구장 또는 카페에서 노닥거리는 모습을 보면, 속으로는 늘 '인간 쓰레기' 또는 '밥벌레들'로 치부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그야말로 대부의 '돈 클레오네'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되어 나만의 세계에서 나와 배치되는 외부적 환경과 싸우곤 했다.  일단 그런 습관에 빠져들면 벗어나는 데만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었다.  그런 까닭에 사회에 진출한 이후에도 그런 습관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부던히도 애를 썼었다. 나는 어쩌면 선천적으로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심리학 관련 서적에 넋을 놓아, 나를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선택한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어느 여행기도 그렇지만 독자의 입장에서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을 때에는 작가가 여행한 여행지의 정보를 얻으려는 목적보다는 내가 현 시점에서 닿을 수 없는 곳에 대한 막연한 동경, 책을 읽으면서 맛보는 일상탈출의 짧은 휴식이 우선이 되는 경우가 많다.   막상 우리가 여행을 떠나고자 결심한 순간에는 전문 웹사이트나 여행 전문서적을 뒤지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하기에 여행기는 일종의 성인들을 위한 동화와 같은 것이다.  큼직큼직한 총천연색 사진과 약간의 감상, 그곳의 역사적 배경을 적당한 지면에 할당하는 작업.  여행작가로서의 임무는 그것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가끔 신영길이나 오다나처럼 아마추어 여행작가는 절제되지 않은 문체로 자신들의 감정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전업작가에게서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란 지극히 어렵다.  전업작가에게 여행기는  자신의 직업적 특권으로 누릴 수 있는 손쉬운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또는 그녀의) 명성과 역사적 지식을 배경으로 한 권의 책을 세상에 선보일 수 있는 또다른 기회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이 책을 선택한 것은 나의 목적이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계획할 무렵의 작가는 각종 문학상을 휩쓴 소설가로, 교수로, 방송인으로 또는 한 여자의 남편으로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했었다.    소설가로서의 본업에 충실하고자 모든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캐나다 밴쿠버에서 1년을 보내기로 결심한 작가는 비어 있는 일정 동안 시칠리아 여행을 계획한다.  사실 여행이란 장소와 환경만 바뀐 또 다른 일상에 지나지 않는다.
로마에 도착하여 시칠리아로 떠나는 여정에서의 혼란과 시칠리아 북쪽의 작은 화산섬 리파리에서의 평범한 일상.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에서 아그리젠토에 이르는 여러 도시들과 그곳의 사람들, 작가의 감상이 곁들여진 음식과 여행지의 역사적 배경.  절제되고 평이한 문체.
가끔 이러한 여행기를 읽을 때는 옆에서 이국의 지명을 지도에서 찾아주는 비서를 따로 두고 싶을 때가 있다.  낯선 지명이 나올 때면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명을 찾고야 마는 내 성미가 독서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보고 들은 진기한 것들'에 더하여 '잃어버린 것들'을 보태 적는다고 했다.
나는 그 '잃어버린 것들'에 대하여 곰곰 생각하고 있다.
작가가 말하는 '잃어버린 것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서두에 잠깐 등장하는 자신의 과거였을까 아니면 많은 지면을 차지했던 여행지의 지난 과거였을까?
아무튼 나는 내가 바라는 소기의 목적이 이 책을 통하여 이루어졌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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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 칼릴지브란
칼릴 지브란 지음, 강은교 옮김 / 이레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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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정수는 역시 시가 아닐까 ?
소설이나 수필, 희곡이나 평론 등 여타의 다른 쟝르의 문학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전해지는 중저음의 느낌을 글로 옮기려 할 때,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한 막막함.  그렇게 며칠이고 불면의 밤이 지나서 잿더미 속에 묻힌 몇 알의 낱알을 보석처럼 건져내는 것.  하세월이 지난 후 한알 두알 모아진 그 곡식을 눈앞에 펼쳐 보이는 것.

  이 말들이 비록 모호하다 해도 결코 명백하게 말하려고 애쓰지 말라.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끝이 아니라 시초.
  그러므로 바라건대 그대들 언제나 시초로서 나를 기억하기를.
  생명, 살아 있는 모든 존재란 결정(結晶)으로부터가 아니라 안개 속에서 잉태되어지는 것.

칼릴 지브란이 그의 산문시 <예언자>를 쓸 때 그런 기분이었을까?
정든 고장 오펄리즈 시를 떠나는 알무스타파.
선택받은 이이며, 가장 사랑받은 이, 또한 시대의 여명이었던 예언자 알무스타파.
작가 자신이 직접 전하기에는 너무나 길고 깊었던 이야기들.
한계를 느꼈음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 안에 전할 자신이 없었음이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은 생명이 탄생하고 파괴되는 십이지(十二지)의 약속된 기한.
우주가 순환하는 그 열두 해의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을 남겨진 사람들에게 전해야 하는 많은 이야기들.  돌아갈 그의 배는 안개에 휩싸여 오고 있었다.
사랑, 결혼, 아이들, 나눔, 먹음과 마심,일, 기쁨과 슬픔, 집, 옷, 매매, 죄와 벌, 법, 자유, 이성과 열정, 고통, 자기 인식, 가르침, 우정, 말하기, 시간, 선과 악, 기도, 쾌락, 미, 종교, 죽음 등 남겨진 사람들의 질문은 끝이 없는데, 이제는 가야할 때.

  어제란 오늘의 추억이며, 내일이란 오늘의 꿈임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대들 속에서 노래하고 명상하는 것은 우주에 별이 흩뿌려지던 최초의 순간, 그 속에 아직도 살고 있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대들 가운데 누가 그 사랑의 무한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누가 아직 바로 그 사랑을, 무한함에도 존재의 핵심에 둘러싸여져 이 사랑의 생각에서 저 사랑의 생각으로 움직이지도 않으며, 한 사랑의 행위로부터 다른 사랑의 행위로 움직이지도 않는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가?
  사랑이 그렇듯 시간도 무한하며, 결코 나누어지지 않고, 자취도 없는 것이란 말인가?

이 책은 화가로, 철학자로, 시인으로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칼릴 지브란의 산문시이며 오펄리즈시에 남겨진 사람들이 떠나는 알무스타파에게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의식주의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종교와 죽음의 근원적 질문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깊은 성찰을 통한 깨달음을 감성적 언어로 전하고 있다.
레바논에서 태어나 서구 세계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살았던 그는 이 작품을 통하여 '현대의 성서'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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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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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신(또는 조물주)으로부터 "네가 한번 살아보고 맘에 안 들면 미련없이 버려라"는 말과 함께 던져진 것이라면, 일회용 종이컵처럼 한 번 쓰고 비참하게 버려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게 될까?
운 좋게 자신이 바라던 바를 성취한 사람은 ’그래 죽을 때까지 살자.’라고 할테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살을 선택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실체인 신이나 운명에 저주를 퍼붓고, 그 무형의 실체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극단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한번쯤은 자살을 생각하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와 광범위하게 퍼진 이러한 현상('실존적 공허')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가치있는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과 방법에 대하여 작가는 자신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3부로 나뉘어 있는데 제1부는 라슈 교수가 영어로 옮긴 저자 프랭클 박사의 끔찍한 체험 수기이다.  온갖 잔악성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죽음의 강제 수용소에 얽힌 실상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제2부는 1부에서 기교적으로 다룬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이 사례와 함께 간결하게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제3부는 <무의식적인 신 : The Unconscious God>이라는 제목으로 로고테라피의 실존분석을 다루고 있다.
정신의학자인 프랭클 박사는 스스로 창안한 현대의 '실존적 분석'과 '로고테라피'의 목적을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의미와 책임의 유형으로 짜 만드는 것이라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한계를 알 수 없는 잠정적 실존이라고 규정한  것처럼 강제 수용소에서의 실존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도 없었을뿐 아니라 지나간 과거에 몰두함으로써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일반 죄수들의 모습과 결국에는 강제 수용소의 '잠정적 실존'이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인식하게 됨으로써 살고자 하는 의지마저 상실하게 되는 혹독한 과정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목격하고 같이 겪으면서도 정신의학자로서 자신이 겪는 실존의 고통을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던, 그리하여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자신의 체험을 통하여 운명을 초월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증명하였다.
개개인은 삶에 질문을 던질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저자는 미래에 대한 믿음과 살겠다는 의지가 살아가야 할 이유이며 어떤 목적이라고 말한다.  삶의 의미는 결국 삶의 문제에 대해 올바른 대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책임을 지는 것이며 삶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로고테라피는 개개인의 삶에서'의미(logos)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자신의 실존을 인식하고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삶은 우리의 행동과 처신에서 그 대답을 제시할 것이다.
책에서 저자가 자주 인용하고 있는 "살아갈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도 참고 견디어 나갈 수 있다."는 니이체의 말은 참으로 유용하다.

나의 심리학적 소양이 부족하여 2부와 3부의 내용은 반복하여 읽었음에도 확연하게 깨닫기 어려웠다.  그의 방대한 이론을 간략하게 요약한 탓도 있겠지만 비전공자에게는 분명 그 한계가 존재할 수 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이미 두번째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가라!"외치는 저자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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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
김상운 지음 / 명진출판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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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불과 일년  전만 하더라도 '애들은 열심히 놀고 건강하면 되지 공부하라고 들볶을 필요까지야....' 했던 내가 막상 아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조금씩 생각이 바뀌는 걸 보면 나도 영락없는 한국의 학부형이다.
동네의 작은 서점에 들러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다 눈에 들어온 것이 겨우 '아버지도 천재는 아니었다' 라니....
예전의 내 모습을 기억하는 지인들은 그럴 것이다.
"너도 별 수 없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애보다 부모가 더 몸이 달을테니 두고 봐라." 
서점을 나서는 내 뒷꼭지가 불편하다 느꼈던 것은 괜한 자격지심이었을 게다.
책의 내용은 우리가 흔히 보았던 성인용 자기계발서에서 더 나아간 것이 없다.
방송기자로 일하는 저자가 "왜 나를 천재로 낳아주지 않았냐?"는 딸의 푸념에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저자 자신이 딸과 대화를 하듯 다정한  문체로 자신이 겪었던 에피소드를 섞어 조곤조곤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생각의 힘과 몰입의 중요성, 목표의식과  마음관리의 방법 등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자기계발서의 내용과 특별한 차이를 느끼기 어렵지만 딸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읽을 수는 있겠다.
공부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내가 느끼는 공부의 핵심은 동기의식과 지속성이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그 분명한 이유를 납득해야 하고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부가 재밌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랑같지만 나는 학창시절에도 공부가 재밌었고 지금도 여전히 공부는 재밌는 오락처럼 느끼고 있다.
아마도 내가 중학교  1학년 시절이지 싶다.
당시 내가 다녔던 남자 중학교에는 유난히 여선생님의 수가 적었다.   지금이야 오히려 남자 선생님의 수가 적다고 아우성이지만 그때는 예체능 과목을 빼면 여선생님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교생 실습을 나오시는 선생님들 중에 여선생님이 있으면 모든 학생들의 관심이 그분께 집중될 수 밖에 없었다.
어느 날 사회 과목을 담당하는 교생 선생님이 실습을 나왔다.
늘 뒤에서 담당 선생님의 수업을 참관만 하시더니 하루는 교생 선생님이 직접 수업을 하신단다.  사춘기 사내아이들이 다 그렇겠지만 싱글벙글 하는 아이들 표정에서 들뜬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교생 선생님의 자기 소개와 짧은 수업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 시간.
나는 기회가 왔다고 내심 쾌재를 불렀다. 

더구나 선생님은 어떤 질문이라도 상관없다고 말씀 하지 않으셨던가. 
"선생님, 코샤크족이 뭐예요?"
일순 교실이 조용해지고 선생님의 얼굴이 빨갛게 변하더니 말조차 더듬으셨다.
조금 경력이 있는 분들이라면 대충 얼버무리고 마셨을테지만 처음 강단에 서신 그 선생님은 그럴만한 융통성이 없었다.   선생님은 종이 울리기도 전에 출석부 챙기는 것도 잊은 채 교실을 뛰쳐나가셨다.  그 이후 수업이 몇번 더 있었지만 질문은 받지 않으셨고 책을 읽으실 때는 나를 요주의 학생으로 생각하셨던지 강단을 내려와 내 주위를 맴돌았다.
가끔 퇴근시간에 나와 몇몇 친구들을 불러 학교 앞 빵집에서 빵을 사주시기도 하며 가깝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때의 질문 덕분이었다.
물론 나는 질문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고골리의 < 대장  불리바>나  미하일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여러 번 읽었던 나는 코샤크족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설명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공부는 정말 재밌는 것이구나' 라고 진심으로 느꼈다.
비록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닐지라도 공부에 한번쯤 미쳐본 사람만이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아직도 공부가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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