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고재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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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사는 문제에 급급하면 할수록 개인은 그가 속한 국가나 기업에 순종적일 수밖에 없으며, 결과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억압되고, 지배자는 온갖 대의명분을 내세워 국민들을 마치 그들의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노예화의 작업을 가속화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영웅처럼 떠받들도록 하는 우상화 작업 역시 병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산업화를 추구하는 개발도상국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하고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선 국가에서도 개인 간의 경쟁을 부추기고 상대적 박탈감을 주입함으로써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이제 막 출발선에 선 경주마처럼 인식하게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국가는 하나의 악이다. 그것도 거대한 악이다. 이에 비하면 조직폭력배의 악함은 실로 보잘것없다. 국가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재다. 그야말로 우리는 한 줌의 무리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환상에 결코 속지 마라."  (p.95)


일본의 노작가 마루야마 겐지의 산문집 <사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는 마치 한 권의 잠언집처럼 읽힌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깨달은 평생의 지식을 시나 경구처럼 하나의 문장에 압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기에 독자는 하나하나의 문장을 허투루 읽을 수 없다. 짧은 문장을 읽고 곰곰 되새기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밖에 없다. 읽고 생각하고, 다시 읽고 생각하는 단순 작업이 마치 한 걸음 한 걸음 앞을 향해 내딛는 우리의 삶과 닮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인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싸움의 연속이다.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도망친다면 악랄한 현실이 그 틈을 예리하게 찔러 곧바로 추락하는 고통을 맛보게 된다. 사는 동안 느긋한 생활을 맛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 꿈은 이 세상을 뜨고 나서 꾸는 수밖에 없다."  (p.167)


힐링만 구하지 말고 혹독한 현실과 대결할 것을 주장하는 1장 '개인과 가족의 싸움', 국가를 손아귀에 넣고 흔드는 지배층과 싸우는 것이 국가를 진정으로 위하는 길이라고 말하는 2장 '가족이나 국가를 과신해서는 안 된다', 반골 정신과 강한 의지를 기르고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그것에 매진하여 충만한 삶을 살라고 강조하는 3장 '정신과 마음을 기른다는 것', 이 세상에 기댈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절대적인 진리를 직시하라고 하는 4장 '고독을 잊어서는 안 된다'로 이루어진 이 책은 각각의 문장이 모두 명령이나 확언에 가까운 격정적인 문체로 쓰인 까닭에 짐짓 국가의 전복을 기도하는 어느 반체제 인사의 선동 글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가난과 비참을 핑계 삼아 악으로 빠지지 않고 이겨 낸 사람은 마음속 깊이 사무친 풍부한 감성을 갖고 있다. 그것이 지성이나 이성에 의해 다듬어지면 자애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타애적인 마음으로 해방되고 그 길을 밟는 사이에 삶의 깨우침을 얻는다."  (p.83)


국가와 국민을 위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아 왔던 작가이지만 이 책에서 작가는 국가를 '거대한 악'으로, 그 뒤에는 국가를 사유하고 좌지우지하려는 소수의 지배층이 있음을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정치인과 기업인은 가용한 돈이 모두 자기 것인 양 착각하여 마구 쓰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그들이 아니라 그런 집단을 내버려 둔 국민이라고 말한다. 그들 소수의 무리에게 영혼을 뺏겨 부조리에도 분노하지 않고, 분노할 줄도 모르는 '들개'로 전락했음을 작가는 개탄한다. 일본인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이 '소극주의', '사대주의', '예속주의'이지만 이에 더하여 지배층의 폭정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무력함'이라고 작가는 단언한다.


격정에 찬 마루야마 겐지의 글이 비단 일본인에게만 필요하지는 않을 터,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언론을 장악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개개인을 검찰 권력을 통하여 입막음을 시도하는 등 과거 독재 정치로의 회귀를 꾀하는 현 정부의 모습은 마루야마 겐지가 지적하는 국가와 개인의 실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 보인다. 게다가 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여 젊은이들로 하여금 '먹고사는 문제'에 더욱 집중하도록 하고, 이를 통하여 젊은이들이 한편으로는 정치에서 멀어지고 이념적으로는 우경화의 늪에 빠지도록 하는 모습은 작금의 일본과 비슷하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는다.


"인간답게 존재하기를 바란다면 평생 간직해야 할 것은 저항이다. 오로지 그 숭고한 싸움을 계속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인생을 참되게 산 증거가 된다. 거기에야말로 사는 의미와 목적이 감추어져 있다."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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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옷의 세계 - 조금 다른 시선, 조금 다른 생활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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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세계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짧은 생을 구축하고 마감한다. 생명이 있는 대개의 것들이 그런 것처럼. 그런데 시인의 눈에 비친 어떤 것들은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던 새로운 세상으로 안내하기도 한다. 우리가 알던 세상, 너무도 익숙하여 거부감이나 툭툭 걸리는 느낌이 전혀 없는 세상, 눈을 감고도 그 세세한 부분까지 오차 없이 모두 그려낼 수 있는 세상, 마구 흐트러진 상태에서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세상, 격식을 갖추지 않은 부스스한 차림으로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오가는 세상, 우리는 대개 좁디좁은 그런 세계가 자신이 알고 있는 전 우주인 양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네가 알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어느 시인의 손길이 없었더라면.


"이번 선물은 시옷의 낱말들이다. 사람이, 무엇보다 사람의 사랑이, 사랑의 상처가, 실은 그 선물이, 그리하여 사람의 삶이, 삶의 서글픔이, 그 서글픔이 종내는 한 줄 시가 된다. 세상을 바꾸려는 손길이 아니라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려는 시선이 되는. 그런 시에다 옷을 입히듯 나의 이야기를 입혀보았다. 나의 이야기가 내가 좋아하는 시 구절과 사이좋게 사귀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P.8 '사귐 이 책을 건네며' 중에서)


김소연 시인의 에세이 <시옷의 세계>는 다가가는 것에 서툰 시인의 성품을 반영하듯 그렇게 조용한 설명으로 시작된다. 머리말 「사귐」을 필두로 「사라짐」「사소한 신비」「산책」 등을 거쳐 「씩씩하게」까지, 35개의 낱말을 국어사전에 실린 순서대로 다루고 있는 이 책은 각각의 낱말에 대한 사전적 정의라기보다 해당 낱말을 화두로 저자가 자라온 이야기에서부터 아끼는 사람과 사물에 관한, 글귀에 관한, 그리고 시인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시인 자신의 세계에 대한 안내서인 셈이다. 대부분의 독자가 그렇겠지만 나 역시 『마음사전』을 통하여 시인에 대한 궁금증을 쌓아왔던 터라 이 책 <시옷의 세계>는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내가 만약, 시에 아프다는 말을 썼거나 불편하다는 말을 썼다면,  그건 아픔을 흔쾌히 허락한다는 뜻이고, 괴로움을 흔쾌히 수용한다는 뜻이고, 불편함을 흔쾌히 수락한다는 의지다. 그걸 즐기겠다는 것도 아니고, 넘어서겠다는 것도 아니고, 견뎌내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그걸 시인하겠다는 태도다. 불가능성에서 불구인 채로 시를 얻겠다는 것이다."  (P.128 '손짓들' 중에서)


시인의 이런저런 이야기들 속에는 다른 시인에 대한 이야기도 섞여 있다. 송경동, 쉼보르스카, 신해욱, 심보선 등 여전히 시옷으로 시작하는 시인의 세계. 그곳에서 김소연 시인은 자신이 거닐었던 그들 세상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한다. 시인의 일상이라는 게 어디 뭇사람의 일상과 크게 다를까마는 시인이 들려주는 또 다른 시인의 세계는 사뭇 새롭다. 곱게 빗질을 한 언어는 그렇게 한 폭 그림으로, 더없이 나긋한 한 장의 엽서처럼 다가온다.


"비밀 수집가 심보선은 그 비밀들을 시에 담는다. 비밀을 사랑하는 만큼 심보선은 비밀을 고백하는 걸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그의 시에는 비밀이 없다. 그에게 시는 비밀을 나누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누고자 하는 비밀이 깊고 큰 것일수록 그의 시는 친절해진다. 평이한 나탈 하나하나가 모여서 비밀을 관통해간다. 능청스러운 말투 하나하나가 모여서 고백을 점묘해간다. 그의 시는 그래서 난해하지 않은 채로 깊다. 우리는 그의 시를 읽으면서 언어의 무늬에 매혹당하기보다는, 비밀을 고백한 시인에 매혹당한다."  (P.240~P.241 '심보선 감염의 가능성을 생각함' 중에서)


언젠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되는 구절은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어디에선가/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길 하겠지요./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선택했다고/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로 끝나는 마지막 연이 아닐까. 김소연 시인은 이 책의 '상상력'에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숨겨진 공간들, 그 경계의 영역들, 그 이상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모호함을 시인은 상상력의 힘으로 정확하게 호명해낸다."고 썼다. 어쩌면 시인은 '시옷'이라는 다채로운 세상을, 뭇사람들이 느껴보지 못했던 생경한 세상을 애정을 담아 소개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한 뼘 넓어졌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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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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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에 있는 누군가의 어깨가 축 처져 있거나 초점을 잃고 멍한 눈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볼라치면 가까이 다가가 어깨를 토닥여주거나 내 손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나누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타인의 아픔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기운 없는 모습을 보면 나조차 의욕을 잃게 되는 까닭입니다. 매 시간 내가 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까닭에 타인을 보면서 으라차차 기운을 내고자 하는, 어찌 보면 가장 이기적인 마음의 발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때로는 멀리 떨어져 쉽게 만날 수 없는 지인의 기운 없는 목소리를 전화로 들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 나는 상대방에게 시(詩)를 권하곤 합니다. 한 편의 시를 소리 내어 낭독하고 나면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지요. 시는 한 편의 이야기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에너지이며 삶의 리듬이자 진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의 리듬이 가슴으로 전해질 때까지 되뇌어 낭송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삶의 에너지를 흠뻑 들이마시고 나면 우리는 다시 또 기운을 내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됩니다. 시의 효용이란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문학 평론가 신형철이 쓴 <인생의 역사> 역시 시의 힘을 이야기로 풀어낸 책이라 하겠습니다. 저자가 사랑한 시를 모아 함께 나눌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완성되는 하나의 시화(詩話)는 평론가로서의 신형철이 아니라 시를 사랑하고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의 방식을 재정립하는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게다가 이 책에는 저자가 직접 번역한 아홉 편의 시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시를 번역한다는 것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를 살아내는 하나의 방편이기에 이 한 권의 책에는 오롯한 시적 체험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 하겠습니다.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대단한 예술이다. 시는 행行과 연聯으로 이루어진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글자들이 옆으로 걸어가면서行 아래로 쌓여가는聯 일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  (p.7 '책머리에' 중에서)


'책머리에'와 '프롤로그'를 지나면 5부로 이루어진 본문과 부록 그리고 '에필로그'와 '본문에서 인용한 글과 책'이 이어집니다. 1부 '고통의 각', 2부 '사랑의 면', 3부 '죽음의 점', 4부 '역사의 선', 5부 '인생의 원', 부록 '반복의 묘'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각 부의 소제목을 찬찬히 살펴보면 마치 우리 인생의 면면을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각자의 삶에서 뾰족뾰족한 고통의 '각(角)'과 사랑의 '면면'을 겪은 후 찾아오는 죽음과 그 개별적인 죽음의 '점'들이 모여 역사의 '선(線)'을 이루며, 인생은 둥근 '원'처럼 순환하고, 시대를 초월하여 반복되는 '묘'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서시란 서문을 대신하는 시이므로 시집 맨 앞에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한강의 「서시」는 시집의 끝에 있는가. 죽음에 대한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인생의 끝에서야 쓰게 되는 서시 같은 것이므로. 그때야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다시 처음인 듯 살아가고 싶어지니까. 그러나 그건 너무 늦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미리 써야 하고 매일 써야 한다. 나는 죽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 시를."  (p.157)


시를 평론하는 사람은 무릇 시인이 살아낸 삶의 격랑 속으로 들어가 시에 깃든 삶의 에너지를 가늠하고 내재된 삶의 리듬을 타고 시인과 함께 동행하는 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평론가는 시에 깃든 시인의 리듬을 독자들에게 찬찬히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시인의 리듬을 어느 평론가를 매개로 비로소 감응하게 되고, 나의 안테나를 세워 시인의 주파수에 동조할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은 순전히 평론가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작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므로 시는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는 것이며, 시인이 보내는 삶의 리듬에 저항하지 않고 일체가 되는 동조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타자의 실종과 사랑의 위기라니, 관념의 유희라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시인의 우울한 투정이야 어느 때나 있는 것이라고 냉소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뉴노멀'이라고 말하면 이전의 모든 것이 '노멀'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 '코로나 시대의 사랑'이라고 말하면 이전에는 사랑이 자명하게 있었던 것처럼 돼버린다. 올해 들어 부모님의 가게는 월세를 못 내게 되었고 자신도 아르바이트에서 잘렸을지 모르지만, 취업이 불투명하고 연애 따위 안중에도 없었던 것은 그전부터다. 그들이 지금 쓰고 있는 것은 코로나 이전에도 이미 썼던 마스크라는 것. 모두가 마스크를 쓰자 '간단한 자살'들이 묻혀버렸을 뿐."  (p.260)


신형철이 쓴 <인생의 역사>는 저자 개인의 주관적 경험이지만, 동시대의 우리가 다 함께 겪어야만 하는 일반적 경험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들 대부분은 시로부터 멀어지고, 시로부터 소외되고, 데면데면 어색한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시에서 얻는 에너지는 아무런 쓸모도 없이 허공으로 사라지고, 시인은 괜스레 헛심만 쓰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를 읽는다는 게 괜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멀어졌다는 부끄러운 자기 고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는 곧 삶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한 편의 시를 가만가만 읊어보노라면 어쩌면 나도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기운을 내서 다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저 먼 발치로부터 스멀스멀 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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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S. A. 코스비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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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이거나 선정적인 내용의 소설을 그닥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따금 생각날 때가 있다. 그것은 마치 해산물을 싫어하는 사람이 바닷가 관광지의 어느 횟집을 지나칠 때의 느낌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배는 고픈데 딱히 눈에 띄는 식당은 보이지 않는 난감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한 끼 때우고 나면 허기는 면해지겠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신의 취향이나 선호를 내려놓게 되는 상황. 물론 책을 읽는 것과 같은 2차원적 욕구를 생존을 위한 1차원적 욕구와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시간은 남고 머리는 어지러울 때, 말하자면 현실의 문제로 머리가 복잡하거나 어려운 책을 이해하느라 머리를 무겁게 하고 싶지 않을 때, 사적 보복을 다루는 범죄 소설을 읽곤 한다. 사적 보복을 다룬 소설이 대개 그렇듯 구성은 단순하지만 보복은 매우 잔인하며, 개인의 원한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회 시스템의 허점은 크게 부각하기 마련이다. 그럴수록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책의 내용에 크게 공감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소설의 주인공이 대신해 주는 것에 대해 열광하고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물론 주인공의 모든 행위가 불법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아이크는 버디 리 눈의 살기 어린 광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건 그의 정맥에 흐르는 분노였다. 자신의 일부까지도 사멸해버리는 독이었다. 스스로를 나약하게 만드는 부분들. 그것은 아이크의 정맥에도 흐르고 있었다. 강력하지만 치명적인, 단단하지만 무모한 그 무엇. 그건 도리어 스스로에게 날을 들이밀어 자신의 목을 베어버릴 분노였다."  (p.197)


S. A. 코스비의 소설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역시 사적 보복을 다룬 범죄 소설임은 분명하다. 이전의 범죄 소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소설의 전면에 동성애와 인종 차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정의? 엿이나 먹으라 그래.'라고 생각하는 대부분 국가의 사법 체계에 있어서 개인의 원한이나 불만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숫제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 권력 계층의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한 도구일 뿐 수없이 많은 소시민의 원성을 하나하나 들어줄 만큼 한가하거나 그렇게 자비롭지는 않은 까닭에 범죄 소설은 끝없이 생성되고 또 읽히게 된다. 불합리하게 피해를 입은 어느 소시민이 자신의 피해 구제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 사법 체계에 분노하여 직접 보복에 나서게 된다는 뻔한 구조의 소설을 언제까지고 읽고 소비하는 것이다. 싫증을 내거나 조금도 질리지 않은 것처럼.


흑백 동성 부부였던 아이지아와 데릭이 어느 날 와인 바에서 나오는 도중에 잔인하게 살해된다. 그러나 수사는 지지부진한 채 진전이 없고, 이를 답답하게 여긴 데릭의 아버지 버디 리는 장례식에서 만났던 아이지아의 아버지 아이크를 떠올린다. 조경 회사를 운영하는 아이크를 찾아간 버디 리는 아들 부부의 사건을 같이 조사하자는 제안을 하지만 거절당한다. 며칠 뒤 아들 부부의 묘비까지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아이크 역시 분노하고 버디 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버디 리와 아이크 두 사람은 모두 전과가 있다. 게다가 아이크는 수감 시절 교도소 내 갱단 두목을 한 전력도 있다. 버디 리의 아내는 그가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는 바람에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로 혼자 사는 처지가 되었고, 아이크는 석방 후 굳게 결심을 하고 아내 마야와 아이들을 돌보며 사업에 매진해 왔다. 두 사람은 아들을 죽인 범인을 찾아내 반드시 원한을 갚겠다는 뜻으로 의기투합해 아들들이 살았던 집부터 수색을 시작하는데...


"여전히 무지하지만, 그래도 배워나가고 있죠. 나도 그렇고요. 우리 둘 다 배우는 중이에요 우리 모두 후회스러운 말들을 했고, 되돌리고 싶은 헛짓거리들을 했어요. 당신 인생의 어느 순간들에는 형편없는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점점 좋아지고 있고. 이제는 그런 농담에 웃지 않으니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p.309)


자신의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지 않은 채 차마 해서는 안 될 모진 말과 행동으로 아들들을 마음 아프게 했던 두 사람은 결혼조차 제대로 축복해 주지 않았던 자신들의 잘못을 후회하며 반성하는 한편, 전과가 있는 흑인으로서 아이크가 다시 범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혹독하게 참아왔는지 같은 전과자이지만 백인인 버디 리는 뼈저리게 느낀다. 단서를 찾아가던 그들은 트랜스젠더 파티걸의 연관성을 알게 되고 그녀에 얽힌 범죄 집단의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직감한다.


"맞아요. 흑인이란 사실은 숨길 수 없죠. 하지만 내가 누구인지를 사람들에게 숨겨야 한다는 그 사실이 바로 핵심이에요. 킹 목사도 말했잖아요. 어딘가에 있는 불평등은 어디에나 있는 평등에 위험이 된다고요."  (p.221)


아들들의 원한을 갚기 위해 나선 두 아버지의 앞길은 그야말로 매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험난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사건은 이제 파티걸 탄제린의 배후로 이어진다. 미모의 트랜스젠더 탄제린은 사실 현직 판사이자 주지사 후보로 나선 제럴드 켈케퍼와 교제를 하는 사이였고, 제럴드는 버디 리의 전처인 크리스틴의 현재 남편이기도 했다. 주지사에 당선되기 위해서는 탄제린과의 불륜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는 건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제럴드는 자신의 권력을 동원하여 자신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했던 아이지아와 데릭을 청부 살해했고, 탄제린마저 없애려 했다. 그러나 버디 리와 아이크의 개입으로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검사가 수사권으로 보복하면 그게 깡패지 검사입니까?"라고 했던 어느 검사는 이제 더 막강한 권력을 쥐고 정적 제거에 혈안이 되어 있다. 말하자면 깡패보다도 못한 짓을 서슴지 않는 것이다. 권력의 속성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인간이라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부끄러움은 알아야 하고, 그와 같은 양아치 짓거리를 '공정과 상식'이라는 말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 양아치보다도 못한 어느 전직 검사에 의한 야만의 시대를 살고 있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야만의 시대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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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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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스 페르민의 <눈>은 한 권의 소설인 동시에 시집이며 시집인 동시에 소설이다. 이와 같은 구성을 통하여 작가가 추구하고자 했던 목표는 분명한 듯 보인다. 궁극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은 '시'이며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궁극의 아름다움은 결국 소설에서 집약되는 '눈'이라는 것이다. '눈(雪)'은 백색인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無)이며 '눈멂'을 통한 흑색 공간과도 맞닿아 있다. 어쩌면 이 소설은 한 편의 꿈인 동시에 어느 날 꿈속에서 보았던 아련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생일날 아침 유코는 은빛 강가에서 말했다. "아버지, 저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승려의 미간이 깊은 실망을 나타내며 찌푸려졌다. 태양이 물결무늬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개복치 한 마리가 자작나무들 사이를 지나 나무다리 아래에서 사라졌다. "시는 직업이 아니야. 시간을 흘려보내는 거지. 한 편의 시는 한 편의 흘러가는 물이다. 이 강물처럼 말이다." 유코는 고요하게 흘러 사라지는 강을 깊이 바라보았다."  (p.11)


신도 승려였던 유코의 아버지는 아들 유코가 승려 혹은 군인이 되길 바랐다. 유코는 결국 아버지와의 타협책으로 겨울에만 77편의 시를 쓰기로 한다. 눈에 매료되었고, 7을 숭배하는 시인이었던 까닭이다. 유코의 나이 열일곱 살이었다. 이 또한 의미가 있어서 유코가 쓰는 하이쿠 역시 열일곱 음절로 구성되는(5-7-5) 짧은 시로 한 음절도 더할 수 없다. 눈과 하이쿠에 매료되었던 유코의 시는 외부의 주목을 받게 되고, 궁정 시인이 방문하기에 이른다. 궁정 시인은 유코의 시에 색이 결여된 것을 지적하면서 소세키 선생에게서 배움을 받으라고 제안한다.


소세키 선생을 찾아 나섰던 유코는 도중에 심한 눈보라를 만났다. 유코를 구원한 것은 이미지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세키를 구원한 것도 하나의 이미지였다. 주인공 유코와 스승 소세키의 삶이 젊은 여인의 이미지를 통하여 하나로 엮인다. 다만 유코가 보았던 것은 죽어 있는 여인이었고, 무사였던 소세키가 본 것은 '직선의 단 한 줄에 삶과 생명이 걸린' 곡예사, 즉 프랑스 파리에서 온 네에주(눈)였다.


"소세키의 눈에 그녀는 한 편의 시였다. 한 폭의 그림이었고 서예였다. 춤이었고 음악이었다. 그녀는 네에주였다. 눈. 예술의 모든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p.78)


네에주와 소세키는 결혼하여 딸(봄눈송이)을 낳고 한동안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네에주가 마지막 줄타기 공연을 시도하기 전까지. 네에주의 공연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몰려온 사함들. 너무도 높은 곳에서 하얀 점처럼 나아가던 그녀는 줄이 끊어짐과 동시에 추락하여 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소세키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딸의 교육과 예술에 전념한다. 밤낮으로 자신의 아내를 그리며 눈을 혹사하던 소세키는 실명하고 만다. 유코는 자신이 보았던 네에주의 시신을 소세키에게 알린다. 유코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알지만 소세키는 네에주를 보러 가자는 유코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리고 자신이 갈고닦은 예술을 유코에게 가르친다.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시쓰기라는 줄 위에 계속 머물러 있는 일일세. 삶의 매 순간을 꿈의 높이에서 사는 일, 상상의 줄에서 한순간도 내려오지 않는 일일세. 그런 언어의 곡예사사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일세." (p.100)


소세키는 네에주 옆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반면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온 유코는 다채로운 색의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1년이 흐른 어느 날 봄눈송이가 찾아온다. 유코는 봄눈송이와 혼인한다. 유코는 궁정 시인의 길을 포기하고, 봄눈송이는 곡예사가 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둘은 사랑한다.


8,90년대를 지나쳐 온 사람들은 시에 대한 막연한 부채의식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권력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제도적 자유를 꿈꾸던 그 시절에 시는 곧 영혼의 탈출구였고, 욕망의 해방구였으며, 궁극의 아름다움이었다. 시는 작가가 정의하지 않은 무한의 아름다움이었으며, 구석구석 묘사하지 않은 상상의 공간이었으며, 흰 여백에 그려진 나만의 꿈이었다. 수많은 '계절들이 시간의 모래시계 속에서 떨어져 내'리는 동안 '시간이 되면 언젠가 시를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움켜쥔 손 안에서 화석처럼 구르고 있었다. 앤 카슨의 소설 <빨강의 자서전>을 떠올리게 하는 막상스 페르민의 <눈>. <눈>을 읽는다는 건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궁극의 아름다움을 깨닫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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