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 TOMY가 알려주는 1초 만에 고민이 사라지는 말 - 일, 생활, 연애, 인간관계, 돈 고민에 대한 마음 치료제
정신과 의사 TOMY 지음, 이선미 옮김 / 리텍콘텐츠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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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낙천적이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일지라도 고민 한두 가지는 늘 달고 살게 마련이다.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크게 의식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마음속으로 괴로워하며 속을 태움'이라는 고민의 사전적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고민이 생기는 근본적 원인은 대개 자신의 삶을 더 나은 쪽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근본적 욕심 혹은 그에 상응하는 개인의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것 또한 사람마다 천차만별의 주장이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더 잘 살겠다는 의지 또는 욕구를 완전히 제거할 수만 있다면 고민이 없는 완전한 평화, 순수의 행복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생명을 유지하는 인간의 속성상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욕구를 제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뇌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더라도 인간은 죽음 직전에야 비로소 모든 것을 포기한 완전한 평화 상태에 도달한다고 하니 삶을 유지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고민과 함께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고민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고민을 스스로 해결하거나 자연적으로 소멸하고, 또 새로운 고민이 생겨나고, 또 스스로 해결하거나 소멸하고, 또 새로운 고민이... 이와 같은 순환이 끝도 없이 벌어지는 게 우리네 삶이라면 너무 지겹고 답답한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010 삶

사는 것은 등산과 다릅니다. 거기에 산이 있어도 오르지 않아도 됩니다.

삶은 등산과는 다른 것이에요. 등산에서는 안 해도 될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삶에선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면 됩니다. 꽃을 따거나, 나비를 쫓거나, 누워서 쉬거나, 김밥을 먹거나 할 수 있어요. 삶은 즐겁게 살아도 된다는 거죠."  (p.23)


<정신과 의사 TOMY가 알려주는 1초 만에 고민이 사라지는 말>은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환자들과의 상담 과정에서 그가 했던 조언을 차곡차곡 쌓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말하자면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내린 221개의 상황별 처방전인 셈인데 짧고 간결하며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문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어느 철학자의 조언처럼 '인생을 이렇게 이렇게 살아라' 하는 식의 현학적이거나 듣는 이를 주눅 들게 하는 명령조의 문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차를 보고 자신의 상황에 어울리는 소제목을 찾아 그에 해당하는 몇 문장의 짧은 조언을 읽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스르르 마음이 풀리는 경험을 한두 번쯤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126 마일리지

신뢰를 쌓는 건 오랜 기간 쌓아온 '마일리지' 같은 거예요. 관계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친구니까, 가족이니까, 잘 아는 사람이니까 믿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믿음 마일리지'를 보세요. '믿음 마일리지'를 쌓으세요."  (p.150)


저자는 서문에서 자신을 정신과 의사이자 칼럼니스트라고 소개하며 동성애자라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쓰고 있는 셈이다. 어쩌면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 이러한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를 더 신뢰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말 전체를 부정하는 편견으로 작용할 수도 있음을 저자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의 30대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계속 저를 지켜주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이어 몇 년 뒤, '나는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 동성애자로 태어났구나.'라고 생각할 정도였던 파트너의 죽음이 저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런 괴로운 때 제가 메모해 둔 말이 저를 지탱해줬습니다. 또 그 경험 속에서 많은 말이 떠올랐습니다. 트위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그런 말들을 나누며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어떤 고민이든 공통되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라고 생각했거든요."  (p.10~p.11 '시작하며' 중에서)


저자의 221번째 마지막 조언 제목은 '현실'이다. 그에 대한 조언을 간략히 옮겨 보면 이렇다. '우리가 흙으로 돌아가는 저쪽으로는 아무것도 못 가져가는 까닭에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이뤘는지 아닌지는 환상 같은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이라는 꿈을 즐겁게 꾸는 것이다'라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서로 헐뜯고 경쟁하며 곧 잡아먹을 것처럼 사납게 군다.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게 헛된 짓이었음을 한숨을 내쉬며 고백하게 되지만 말이다. 커다란 바위가 풍화되는 것처럼 우리의 욕심도 시간에 비례하여 줄어드는 삶의 과정인 듯싶다. 우리가 하는 고민은 우리의 욕심에서 비롯된 부산물 혹은 작은 파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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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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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빗줄기가 훑고 간 도시의 주택가는 마치 커다란 습식 사우나로 변한 듯 후텁지근합니다. 도시에 사는 떠돌이 비둘기 떼가 먹이를 찾아 아파트 이쪽 동에서 저쪽 동 옥상으로 비행을 하고, 금세라도 비를 뿌릴 듯하던 하늘은 구름 사이로 빼꼼 푸른빛이 감돌고 있습니다. 비라면 이제 넌덜머리가 난다고 하는 사람들. 그러나 며칠째 이어지는 비구름은 쉽게 물러나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합니다.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말입니다. 긴 장마 덕분에 나는 퇴근 후 시간이 날 때마다 밀려 있던 책들을 마저 읽었고, 빗소리를 들으며 이따금 오래된 추억들을 소환하여 시간의 순서를 아랑곳하지 않고 뒤죽박죽 늘어놓았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까무룩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 역시 장마로 집에 묶이지 않았더라면 표지만 보고 무심히 흘려보냈을지도 모르는 귀한 책이었습니다. 인연이란 이렇듯 반드시 만나야 할 것들을 어떻게든 만나게 해주나 봅니다.


"나는 아까 이 집에 도착했을 때처럼 집시 아이 같은 내가 아니라, 지금처럼 깨끗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고 뒤에서 아주머니가 지키고 서 있는 내가 보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p.30)


아일랜드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로 알려진 클레어 키건의 몇 안 되는 작품 중 국내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맡겨진 소녀>는 1981년 아일랜드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쓰인,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와 같은 작품입니다. 무뚝뚝하면서 애정이 없는 아빠와 집안일과 여러 자식들을 돌보느라 늘 삶에 쫓기고 허덕이는 엄마 밑에서 태어난 까닭에 "네"라는 대답조차 온전히 하지 못하는 아이로 자란 '나'는 엄마의 출산을 앞둔 어느 날, 아이가 없는 먼 친척의 집에 맡겨지게 됩니다. 서둘러 오느라 변변한 옷가지도 챙겨 오지 않았던 아빠는 '나'를 마치 귀찮은 짐짝처럼 낯선 친척 집에 떨어트려 놓고는 훌쩍 떠나버립니다. "불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너."라는 말과 함께. 그러나 '나'를 떠맡게 된 킨셀라 부부는 첫날 매트리스에 오줌을 싼 '나'의 실수를 덮어주는 것은 물론 달리기 연습을 시키기도 하고, 잠들기 전에 귀지 청소를 해주는 등 이제껏 집에서도 받아보지 못했던 애정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킨셀라 부부의 정성어린 돌봄과는 다르게 인근의 이웃들은 처음 보는 소녀에게 과한 호기심을 보이며 상처를 주곤 합니다. 평온하고 특별하지 않은 하루하루가 그 전날과 비슷하게 흘러갑니다.


"달이 다시 나오자 아저씨가 램프를 끄고, 우리는 달빛 속에서 사구를 내려왔던 길을 쉽게 찾아 따라간다. 사구 꼭대기에 도착해서 신발을 신으려 하자 아저씨가 나를 말리며 직접 신겨준다. 그런 다음 자기 신발을 신고 끈을 묶는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멈춰 서서 바다를 돌아본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 개가 됐구나." 내가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 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  (p.75)


어느 날 킨셀라 부부와 함께 상갓집에 들렀던 나는 한 이웃으로부터 킨셀라 부부에 대한 비밀을 듣게 됩니다. 지금의 '나' 정도의 아들을 사고로 잃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나'에 대한 부부의 친절과 환대는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한 보삼 심리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섣부른 판단과 왜곡된 시선과는 다르게 킨셀라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나'나 부모님이 원하는 날짜에 언제든 보내 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그와 함께 짧고 행복했던 '나'의 날들도 끝이 났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p.96)


작가인 클레어 키건은 이 짧디 짧은 소설을 통해 영원히 끝나지 않을 이야기들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것은 문자 텍스트가 아닌 여백 텍스트로 존재할 뿐이지만, 여기에서 파생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어느 독자에게서 다른 독자에게로, 한 명의 비평가로부터 다른 비평가에게, 혹은 키건의 소설을 그저 이야기로 전해 들은 어느 행인으로부터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지면서 새로이 만들어지고, 부풀려지고, 오늘 내리는 빗물처럼 흘러넘쳐서 결국에는 이야기의 바다에 이르게 될지도 모릅니다. 킨셀라 아저씨는 말했습니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입니다. 마음을 터놓고 서로의 진심을 전할 상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요즘, 인터넷 세상에는 서로의 체온을 느낄 수 없는 빈 말들이 유령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처음부터 갖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대화가 사라진 유령의 세계에 사는 우리로서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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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실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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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다시 말하면'이라고 운을 떼는 순간 당신은 당신의 설명에 대한 나의 이해가 무척이나 절실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책이나 그런 부분이 있게 마련이지요. 너무 전문적이어서 전문가인 누군가의 설명이 따로 필요하다거나, 설명이 부족하여 저자의 별도 설명이 필요하다거나, 나처럼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전무하여 책은 한낱 문자 텍스트에 불과할 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의 언저리에도 이르지 못하는 경우에는 책을 먼저 읽고 이해한 또 다른 누군가의 긴 설명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의 별도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책도 더러 있는 법이지요. 예컨대 리 차일드의 소설이 그런 부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의 분량은 다소 늘어나겠지만 순간순간의 세세한 설명과 묘사가 덧붙여지는 까닭에 나처럼 어눌하고 어리벙벙한 사람도 주인공의 행적을 따라 쉽게 이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리처는 길이 왼쪽으로 굽어지는 지점이 다가오는 걸 봤다. 100미터쯤 앞이었다. 큰 도로와 비스듬한 각도로 만난 그곳은 마지못해 그런다는 듯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런 후 계속 뻗은 길은 사과농장을 관통했다. 그는 그쪽으로 계속 걸었다. 절반쯤 갔을 때 거대한 견인 트럭이 지나갈 수 있도록 풀밭인 갓길로 올라서야 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그 트럭은 밝은 빨간색에 흠집 하나 없이 깔끔했다."  (p.202)


내가 중학생이던 무렵 무협지에 한동안 빠져 지냈던 적이 있습니다. 무협지라는 게 말이죠 모든 무협지에 양념처럼 자주 등장하는 기본 단어들과 지명들만 알면 무협지는 그야말로 유아용 만화책에 버금갈 만큼 쉽디쉬운 책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내가 무협지에 빠져든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게 부정적이고 시큰둥하게만 보였던 남자 중학생의 눈에 무협지는 자신의 무료한 시간을 채워줄 꽤나 괜찮은 도구였던 셈입니다. 리 차일드의 소설은 어쩌면 중학생 시절 내가 읽었던 무협지의 재판이거나 서양판 무협지쯤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 여전히 그와 같은 소설을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이 때로는 부끄럽지만 나의 수준이 딱 거기까지인 걸 어쩌겠습니까.


"그는 총을 겨눴다. 그녀는 쏟아지는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그걸 뚜렷하게 봤다. 그녀는 시청했던 TV 드라마들에 나온 그 총의 브랜드를 알아봤다. 글록. 확실했다. 상자 모양으로 오밀조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앞부분의 총신은 새틴으로 마무리돼 있었다. 정밀한 부품. 가격이 1천 달러는 돼 보였다. 그녀는 숨을 내쉬었다. 패트리샤 마리 선드스트롬, 25세, 칼리지 2년 재학, 제재소 노동자. 술집에서 만난 감자 농사꾼하고 짧은 기간 행복했다. 평생 예상했던 것보다 더 행복했다. 그녀가 알던 행복보다 더 행복했다.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딱 한 번 더."  (p.513)


리 차일드가 쓴 잭 리처 시리즈가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주인공 잭 리처는 그야말로 천하무적입니다. 어떤 무협지의 주인공도 정의의 반대편에 선 자에게 쓰러지거나 무릎을 꿇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10호실>에 등장하는 우리의 주인공 잭 리처는 메인에서 샌디에이고로 가던 도중 낯익은 지명에 이끌려 잠시 샛길로 빠지게 됩니다. 주인공의 아버지 스탠 리처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 그곳은 바로 뉴햄프셔의 래코니아였습니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매던 잭 리처는 원치 않았던 사건에 이리저리 휘말리게 되지만 헌병으로 복무했던 그의 화려한 경력과 녹슬지 않은 실력 덕분에 위험천만한 상황을 가뿐하게 넘어서곤 합니다.


'희망은 최선을 기대하며 품는 것이고 계획은 최악을 대비해서 세우는 것이다.'  (p.176)


대부분의 잭 리처 시리즈에 등장하는 이 문구는 작가의 좌우명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악인들을 상대함에 있어 무자비한 면모를 보여주는 잭 리처의 활약은 모든 걸 법과 제도에 의지하는 현대의 독자들에겐 한 줄기 청량제 구실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책의 리뷰를 마침에 있어 한 가지 개인적인 소원을 덧붙이자면 우리나라에서 유난히 자유를 사랑하고 틈만 나면 공정과 상식을 주장하는 한 사람, 비록 겉으로는 정의의 사도인 양 행세하지만 세상의 모든 악이란 악은 모두 제 손아귀에서 주무르는 듯한 그 사람을 잭 리처가 나타나 소설에서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해줬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10년 묵은 체증이 한순간에 사라질 듯합니다. 문을 여닫을 때마다 눅눅한 습기가 묻어 들어오는 걸 보면 다음 주에도 장마가 이어질 듯합니다. 현실처럼 눅눅하고 어둑어둑한 장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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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금니 깨물기 - 사랑을 온전히 보게 하는 방식
김소연 지음 / 마음산책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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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시인의 애독자가 된 계기는 아마도 시인의 산문집 <마음사전> 덕분이지 싶다. 시인이 정리한 단어들의 의미는 단어 자체의 실질적인 의미를 넘어 시인 자신의 체험과 느낌에서 비롯된 섬세한 감정까지 담아낸 정밀한 사전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매 쪽을 넘길 때마다 감탄을 쏟아내며 읽었다. 시인의 감성과 시선은 이토록 정밀하고 흠잡을 데 없이 적확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이어졌었다. 이와 같은 느낌은 다른 독자들도 대부분 공감하는 바이겠지만 나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시인이 쓴 다른 작품들을 모두 읽었던 것은 물론 시인이 나왔던 유튜브 동영상도 빼놓지 않고 보게 되었다. 시인이 진즉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스토커로 경찰에 신고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금니 깨물기> 역시 그 연장선상의 일환이었다.


"나는 엄마를 보고 배웠다.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그걸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늘상 주먹을 꽉 쥐며 생각해왔다. 지키려는 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겨우 얻게 된 것들과 꼭 얻고 싶었던 것들을 잘 지키는 것으로써 엄마처럼은 살지 않으려고 애를 써왔다."  (p.24)


책에 등장하는 여러 꼭지의 산문 중 나는 첫 꼭지인 '엄마를 끝낸 엄마'를 읽으면서 주책없이 눈물을 쏟을 뻔했다. 남존여비의 가부장제 질서가 지배하던 시절에 태어난 시인은 엄마로부터 오빠와 자신에 대한 노골적인 차별을 경험하며 성장했고, 이러한 차별이 엄마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이어졌다고 했다. 그러다가 엄마가 알츠하이머를 앓기 시작하면서부터, 누군가의 엄마로 살았던 시간들을 거의 다 망각하고 25년 전에 죽고 없는 오빠와 아빠에 대한 기억만 온전히 간직하게 되었을 때, 시인은 자신만 홀로 엄마를 엄마로 기억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엄마에 대한 해묵은 감정을 잊어버리기로 했단다. 요양원에 입소하기로 한 전날 밤, 처음으로 엄마 집에 가서 엄마와 함께 잠을 잤다는 시인은 코로나 시국에 요양원에 입소한 엄마의 모습을 마치 남의 일인 양 아주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었다.


"엄마에 대해서 이제 나는 거짓말처럼 아무 생각이 없다. 가끔 그립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엄마의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자문하면, 그 무엇인가는 텅 비어 있는 느낌이다. 이유가 텅 빈 그리움에 대해서 나는 잘 알고 있다. 그저 그리움일 뿐이다. 그런 그리움을 엄마를 향해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럴 수도 있구나 한다."  (p.20~p.21)


어느 유튜브에서 보았던 시인은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중간 지점에서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딱 부러지는 말투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어려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깍쟁이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고 자랐음직한 시인의 겉모습과 태도를 보면서 나는 내심 시인 역시 많이 힘들었겠구나, 생각했었다. 조금의 빈틈이나 허술함도 용납하지 않는, 야물딱진 시인의 성격은 그녀가 쓴 여러 책의 문장 곳곳에서 드러나곤 한다.


"장소라는 말과 공간이라는 말은 엄연히 구별된다. 장소는 시간이 부여해준 가치와 역사가 부여해준 이야기를 함께 담은, 고유한 이름이 있는 공간이다. 그 공간을 영위하는 한 개인의 양태들이 냄새처럼 고스란히 밴 곳이기도 하다. 장소는 유일하고 공간은 보편이다. 장소는 변화를 겪고 공간은 그대로다. 장소는 파괴되지 않지만 공간은 파괴될 수 있다."  (p.61)


이 세상에 자신의 주장을 온전히 남기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시인이 아니라는 걸 나는 김소연 시인을 통해 배운다. 그 목소리가 작든 크든 상관없이, 어쩌면 옳고 그름을 구별할 필요도 없이 오직 자신의 내부에서 뻗어 나오는 하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자만이 시인으로 살아갈 자격이 있음을... 그리하여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하나로 겯는 어느 날 비로소 계관을 쓴 시인이 그 공로를 인정받게 된다는 사실을.


"단어가 아니라 문장이, 문장이 아니라 맥락이, 맥락이 아니라 노래 비슷한 것이, 노래가 아니라 울먹임이, 울먹임이 아니라 불꽃이, 불꽃이 아니라 잿더미가 비로소 백지 위에 하얗게 쌓인다. 시는 온갖 실의와 실패를 겪어가며 끝장을 본, 한 줌 재인 셈이다."  (p.74~p.75)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때로 어금니를 깨물고 버텨야 할 만큼 힘들고 고달픈 일이겠으나 지나고 보면 그 모든 게 하나의 시였고, 동화였고, 지워지지 않는 전설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시인도 아마 그런 시절을 살아왔을 터, 때로는 어금니를 깨무는 것으로도 모자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바들바들 떨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언제나 그런 아득함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온전히 보게 하는 방식'이라는 부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현실이라는 아득함에 시간이라는 조미료를 솔솔 뿌려 추억이라는 이름의 짙은 사랑을 어렵게 찾아내곤 한다. 인간이란 어쩌면 되돌릴 수 없는 어떤 순간에 이미 사라져 버린 어떤 소중한 것을 그리워하는 미련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고, 다른 누군가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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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파티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1984Books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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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잡한 일상을 쉼 없이 살다 보면 자연에 대한 그리움이나 향수처럼 자연을 닮은 맑고 투명한 글이 가득한 책 한 권쯤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우리의 육체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순수함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에 대한 향수도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한 편의 시가 그리워지기도 하고, 가슴 절절한 한 편의 소설이 생각나기도 하고,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한 편의 에세이가 떠오르기도 한다. 책 없이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이들에게 내린 천형(天刑)! 순수함으로부터의 도피를 도통 용납하지 않는 시대 부적응자로서의 삶을 살아야만 하는 이러한 운명을 나는 독서 애호가 중 한 명으로서 기꺼이 순응하며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을 하듯 책을 읽는다. 사랑에 빠지듯 책 속으로 들어간다. 희망을 품고, 조바심을 낸다. 단 하나의 몸 안에서 수면을 찾고, 단 하나의 문장 속에서 침묵에 가닿겠다는, 그런 욕구의 부추김을 받으며, 그런 욕구의 물리칠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다. 조바심을 내며, 희망을 품는다. 그러다 때로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이 목소리처럼, 일체의 조바심을 몰아내고 일체의 희망에 딴죽을 거는 무언가다. 그것은 위로하려 하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키며, 유혹하지 않고 황홀감을 준다. 자체 안에서 자신의 종말과 죽음의 슬픔, 어둠을 품고 있는 무언가다. 스스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것에 귀 기울이는 자는 이제 자신이 피신할 데도, 의지할 데도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자신에게서 해방되어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p.108~P.109)


프랑스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크리스티앙 보뱅을 모르는 이는 아마 없겠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의 순수함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어느 날 아침 문득 들었다면 그의 글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와 같은 생각의 저변에는 보뱅의 글에서 느낄 수 있는 깊은 사유와 자연을 닮은 서정성에 기반하고 있다. 그것은 상업적 작품에만 몰두하는 어느 베스트셀러 작가의 얕은 지식과 일회성의 사유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비교불가의 위로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울림이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전해지는 저릿저릿한 느낌과 원시에 가까운 순수로의 무모한 회귀. 고해성사를 하듯 나는 보뱅의 글을 읽는다.


"위대한 책은 그 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시작된다. 어떤 책이 위대하다는 건, 그 책에서 점차 드러나 보이는 절망의 위대함을 의미한다. 책 위에 무겁게 드리워져 책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한참을 가로막는 그 모든 어둠을 의미한다. 책은 그렇게 시작된다. 그 책이 있기 전, 글이 써지기도 전에 모든 것이 시작된다."  (p.47)


짧은 서문과 아홉 편의 텍스트를 모아 엮은 보뱅의 산문집 <작은 파티 드레스>는 제목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에세이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난해함이나 기이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문장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일상의 황폐함에서 오는 순수함으로부터의 거리일 수도 있다. 일상의 피로에 찌들 대로 찌든 우리네 삶이 방향을 잃은 채 표류하는 동안 우리의 영혼 역시 자연의 순수함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오고야 말았던 게 아닐까.


"객관적인 눈으로 차분히 행하는 독서가 완벽한 독서는 아니다. 그런 독서가 핵심에 이르는 독서는 아니다. 그런 독서는 책의 검은 광맥을 건드리지 못한다. 책에 담겨 있고 당신의 눈과 삶의 저변에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반짝이는 진실의 핵을 건드리지 못한다. 당신의 눈 속, 삶의 저변. 즉 근원에 가 닿는 또 다른 독서만이 당신의 마음을 끌어당긴다. 당신 안에 자리한 책의 뿌리로 직접 가 닿는 독서, 하나의 문장이 살 속 깊은 곳을 공략하는 독서."  (p.48)


힘들고 팍팍한 현실 탓인지 내 영혼에서도 서걱거리는 모래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게다가 이 시대를 책임져야 할 젊은이들 역시 각종 자격증 취득을 위한 수험서나 자기 계발서 등 실용서 위주의 독서만 할 뿐 문학서적은 쳐다도 보지 않는다. 장마가 코앞인데 현실에서 체감하는 온도는 영하의 찬바람이 부는 듯한 것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글을 쓰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가난한 삶만 있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책을 읽는 건, '고통이 제자리를 찾게 하려는 거'라고 썼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가난한 삶과 그로부터 오는 고통을 통하여 글도 쓸 수 있고, 자신의 고통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마치 꿈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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