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장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조 페슬러 지음, 홍한별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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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교과서에 등장하는 흔하고 일반적인 답변도 있겠지만 어떤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대답 또한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함일 수도 있고, 상대방의 심리를 알기 위함일 수도 있고, 필요한 지식을 쌓기 위함일 수도 있으며, 삶의 의미를 깨닫고자 혹은 언젠가 셰익스피어와 같은 멋진 작품을 쓰고자 함일 수도 있겠다. 때로는 위에 열거했던 여러 목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을 테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남들에 비해 책을 읽는 속도가 현저히 느린 축에 속하는 나는 책을 읽는 동안에는 본의 아니게 꼼꼼히 읽게 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대체로 책에서 인상 깊었던 문장이나 전체의 줄거리, 심지어 책에 대한 인상까지도 모두 잊으려 노력한다. 시간이 흐른 뒤에 책의 제목을 보더라도 처음 보는 책인 양 반길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드물고, 읽었는지 안 앍었는지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남들은 다들 책의 내용이나 문장을 하나라도 더 기억하려고 애를 쓰는데 이게 뭔 말이냐고?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다. 머리가 나쁜 나로서는 처음 받은 책을 단 한 번 읽어서는 책의 내용을 도무지 기억도 못할 뿐만 아니라 책 속의 아름다운 문장을 기억한다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 까닭에 어설프게 읽은 책을 나중에 다시 읽기 위해서라도 책의 내용이며 저자 혹은 책과 관련된 다른 정보들을 모두 잊으려 노력하는 것이다. 책을 읽은 후 어쩔 수 없이 리뷰를 남겨야 하는 경우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지만 말이다.


문예지 '애틀랜틱' 온라인에 '바이 하트'를 운영하는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조 페슬러는 책으로 인해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을 주목했었나 보다. 어찌 보면 나와는 상반된 입장에서 독서의 효용을 관찰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 문장은, 내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의 저자인 조 페슬러는 스티븐 킹, 할레드 호세이니, 엘리자베스 길버트 등 작가 33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의 인생을 바꾼 한 문장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작가는 다른 이의 글이나 문장이 어떻게 자신의 작품이나 삶에 영향을 끼쳤는지, 그 순간들을 서술한다.


"글을 쓰다가 장애물을 맞닥뜨렸을 때에도 고집스러운 기쁨에 매달리는 것이 나에게는 최선의 방법이다. 글쓰기란 심리적으로 매우 극단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비극, 재앙, 감정, 실패 등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일이 잘 되지 않을 때의 고통을 비극이 아니라 신기한 것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자 작가로서의 길이 한결 평탄해졌다."  (p.30)


예컨대 어떤 문장을 접한 후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어떻게 성숙해지고 깊어지며 견고해졌는지, 문득 떠오른 창의적 영감이 다른 작품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리고 작가의 인생관이나 작품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이야기한다. 이와 같은 과정은 의도하지 않았던 우연한 순간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자신의 꿈이 채 영글지 않은 청소년기에 다가오기도 하며, 늦은 나이에 모든 것을 버리고 책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이 책의 성격에 대해 "어떤 면에서는 문학비평이고 어떤 면에서는 작법 수업이고 어떤 면에서는 공개작업실이었다"라고 말한다.


"나는 사람의 진정한 면은 여러 다양한 이유 때문에 감춰져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비스럽고 묘한 부분이다. 나는 사람은 정말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의식하고 쓰지 않아도 내 글에 그런 면이 드러난다고 믿는다. "  (p.232)


인생을 바꾼 한 문장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싶다.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전업 작가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세상을 처참하면서도 경이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잭 길버트의 시를 읽고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는 엘리자베스 길버트나 주노 디아스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를 읽고 문학이 역사의 희생자들을 위한 치유의 공간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잔신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책에 밑줄을 그은 한 문장을 통해 나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게 되었거나 그 시발점으로 작용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작가들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던 하나의 시를 언급했던 점은 의미심장하다. 삶의 은유가 담긴 시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지향점을 알려주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꿈을 꾼다. 독자가 서점에서 시집 코너를 훑어본다. 한 권을 뽑아 몇 편을 읽는다. 그런 다음 책을 다시 꽂는다. 이틀 뒤에, 새벽 네 시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생각한다. '그 시 다시 읽고 싶어! 어디에 있지? 그 책을 구해야겠다.'"  (p.283)


나는 오늘도 읽었던 책을 모두 잊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한 번 읽었던 그 책을 기필코 다시 읽겠다는 다짐이자 가까운 미래의 내 삶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다. 나는 비록 책 속의 멋진 문장을 암기하여 낭랑한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들려줄 수는 없지만 내 몸에, 내 시간에, 내 삶에 스며든 한 권의 책이 나를 조금 더 유익한 방향으로 안내하리라고 믿는다. 그런 까닭에 책은 스며드는 것이지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나의 고집을 여전히 꺾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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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아이
츠지 히토나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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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가을, 추석을 코앞에 둔 어느 날 농산물 절도 사건 용의자로 체포된 한 할머니의 사연은 온 국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세 살 터울의 언니마저 돈을 벌어 오겠다며 떠난 뒤 호적 등록도 되지 않은 몸으로 75세의 할머니가 될 때까지 줄곧 혼자 살아왔다는 할머니의 사연은 그간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모두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삶이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니와 헤어진 후 식모살이와 식당일로 생계를 유지하던 할머니는 60대에 접어들면서 주덕읍의 한 여인숙에 자리를 잡고 산나물을 캐 장터에서 팔아 생활을 이어왔지만 여인숙 월세 15만 원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던 할머니는 결국 다른 이의 농작물에 손을 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할머니는 경찰의 도움으로 주거지와 긴급복지서비스를 받게 되었고 호적 취득 절차도 밟게 되었다고 하는 데, 이와 같은 따뜻한 도움에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며 "이 세상에 없는 사람으로 살았는데, 이제는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츠지 히토나리의 소설 <한밤중의 아이>를 읽는 독자라면 어쩌면 평생을 무적자로 살았던 그 할머니의 사연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렌지 역시 호적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가는 어린 소년이기 때문입니다. 유흥가에서 생활하는 엄마 아빠는 어린 렌지를 홀로 남겨 두었고, 돌봐줄 사람 하나 없었던 렌지는 나카스 전역을 떠돌면서 시간을 보내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가게 쪽에서도 렌지는 귀여운 마스코트가 되었다. 담장을 넘어 어디선지 모르게 찾아오는, 잘 길들여진 남의 집 고양이 같은 존재였다. 엄마 아카네는 클럽에서, 그리고 아빠 마사카즈는 호스트로 밤일을 하고 있었다. 렌지가 태어난 곳도 이곳 나카스였다. 쥬오 거리 일대에서 렌지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간혹 이름까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한밤중에 술 취한 어른들 사이를 쪼르르 뛰어다니는 어린애라고 하면 이미 유명 인사였다 나카스 사람들은 그를 '한밤중의 아이'라고 불렀다."  (p.36~37)


경찰학교를 졸업하고 나카스 파출소에 첫 부임한 히비키는 한밤중에 유흥가 주변을 맴도는 어린 렌지가 그저 불쌍하기만 합니다. 순찰 도중에 렌지를 만나기라도 하면 음료수를 사주기도 하고, 근무가 없는 날에는 렌지가 호적을 취득할 수 있는 방법을 다방면으로 알아보곤 합니다. 히비키는 아동종합상담센터로, 다시 구청이나 법무국을 오가며 마치 제 일처럼 힘을 씁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부모를 설득해 서류를 제출하라는 형식적인 대답뿐 달리 뾰족한 해결책을 찾지 못합니다. 친구도 없이 나카스 전역을 떠돌던 렌지는 어느 날 자신과 나이가 같은 여자 아이 히사나를 만납니다. 호적이 없어 초등학교에도 다니지 못하는 렌지와는 달리 룸살롱을 경영하는 유코를 엄마로 둔 히사나는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비록 아버지는 없지만 말입니다.


"요즘 히사나는 내 친아빠는 저런 식으로 눈이 핑핑 돌게 바뀌는 엄마의 남자들 중 누군가였는지도 모른다고 추측하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일은 깊이 따져 보고 싶지도 않았다. 동시에 가족이라는 것에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았다. 나라는 인간은 아무도 원치 않는데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인지도 모른다. 렌지의 소문은 그런 히사나에게 뭔가 큰 힘이 되었다." (p.136~p.137)


밤거리를 배회하며 나카스 지역의 사람들과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던 어느 날, 엄마인 아카네가 출산에 대비해 외가로 떠나게 됩니다. 집에는 이제 아빠인 마사카즈와 렌지 두 사람뿐입니다. 그때 마침 아카네의 전 남편이 찾아와 마사카즈를 폭행합니다. 머리를 크게 다친 마사카즈는 결국 병원으로 후송됩니다. 갈 곳이 없어진 렌지는 외가로 보내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카타 지역으로 되돌아옵니다. 멀쩡한 집을 두고 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던 겐타는 자신의 집을 렌지에게 내어줍니다. 아무도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렌지를 어린 히사나가 헌신적으로 보살핍니다. 자신의 엄마에게서 받은 용돈으로 생활비를 하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렌지에게 가르치기도 합니다. 사고 이후 밖에 나가는 것을 극도로 꺼리던 렌지도 지역 축제인 하카타 기온 야마카사를 다시 보게 되면서 전에 알던 사람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합니다.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열일곱 살이 된 렌지는 나이를 속인 채 호스트 클럽의 넘버원이 됩니다. 그런 렌지 앞에 어느 날 엄마인 아카네와 여동생 토마가 찾아옵니다. 그 후로 아카네는 매일같이 찾아와 렌지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결국 렌지는 호스트 클럽을 그만두고 요리사인 헤이지 밑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렌지는 헤이지와 함께 어릴 적부터 그렇게 원했던 야마카사 축제에 참가할 준비를 합니다.


"렌지는 육체나 규칙이나 사회성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영혼, 특별한 요소로 구성된 존재인 것이라고 겐타는 생각했다. 늘 정의를 품고 대했고 순간순간 외경심을 느끼는 일도 있었다. 렌지가 처한 환경에 대해서도 겐타는 정령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렌지를 덮친 슬픈 폭력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도 렌지라면 대처할 수 있다, 성장을 위해 미리 준비된 시련, 숙명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생각에 딱히 걱정도 하지 않았다."  (P.324)


유코의 룸살롱에서 일하던 아키네를 감옥에서 출소한 그녀의 전 남편 후미아키가 찾아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렌지도 결국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데...


우리는 어쩌면 서로의 형편과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각자의 좁은 세상에서 평생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뉴스에서 보도되는 어떤 큰 사건이 터졌을 때나 겨우 아주 잠깐 타인에 대해 생각할 뿐 대부분의 시간은 오직 자신의 삶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이지요. 참으로 이기적인 동물이 인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까닭에 일본의 정치인도, 대한민국의 정치인도 모두 일제의 만행에 대해 두 눈을 질끈 감는 것일 테지요. 마치 남의 일인 양 말입니다. 더없이 맑은 봄날, 미세먼지로 대기는 온통 탁하고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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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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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수 있다는 것과 글을 쓰고 싶어 한다는 것은 그 의미와 실행의 측면에서 너무도 큰 차이를 보인다. 흩어졌던 삶의 흔적들을 어떻게든 한 곳에 모아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하고, 간추리고 덧붙이며, 객관적 사실에 가깝도록 기록하고자 하는 욕망은 글을 쓸 수 있는 아무개가 어느 날 갑자기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한 자리에 앉아 오래도록 기억을 되살리고, 때로는 생각나는 누군가와 긴 통화를 이어가며, 쓰고자 하는 글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동안 어깨가 쑤시고, 때로는 눈이 침침해져 오며,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설 때마다 우두둑우두둑 뼈마디 부러지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참아내야 하는 수고보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더 큰, 소수의 몇몇 사람만이 글로써 자신의 삶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남편과 아내라는 두 단어의 클리셰를 생각 없이 받아들인 건 얼마간 젊음과 무지 때문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상과 평범함이라는 환상은 관습적인 결혼이 추구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침실에서 거실에서 서재에서 작업실로 갈 때마다 우리가 발 들인 이 과정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결혼이라는 마법이 통하게 하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행동들을 점점 더 예리하게 느꼈다. 우리는 스스로를 창의적인 작업에만 집중할 줄 아는 사람들로 보았다."  (p.217)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혹은 에세이스트로서 독보적인 글쓰기를 보여주었던 작가 비비언 고닉의 회고록 <사나운 애착(Fierce Attachments)>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아, 작가란 천상 타고 태어나는 것이구나.' 하는 절망 섞인 탄식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근래에 읽었던 어느 책에선가 '일상과 그 반복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면, 그것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느냐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 아닌가?' 하는 물음에 대해 비비언 고닉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대답하고 있는 듯했다. 뉴욕 브롱크스의 유대계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비비언 고닉은 자신의 엄마와 긴 세월을 함께 보냈던 브롱크스의 4층짜리 다세대주택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것은 지금의 고닉을 만든 정신적 토대인 동시에 그녀 엄마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그곳에서 함께 살았던 노동계급, 이민자 여성에 대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 순간 나는 그 거리의 여자가 나를 어떤 면에서 감동시켰다고 인식했다. 그의 존재감, 그의 외양 하나하나가 나를 동요시켰다. 그를 낙담한 사람, 망가지고 병든 존재로 상정하고 내가 그를 치유하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 이미지는 무의식의 장막을 뚫고 들어와 스스로 발전해나갔다. 나는 그를 치유하고 그는 변화한다. 어느덧 여자의 좁았던 어깨는 넓어지고 피부는 깨끗해지며 머리는 단정해진다. 무엇보다 눈빛이 진지해지고 결연한 의지가 생겨난다. 그러나 내가 무슨 상상을 하건 가을은 깊어졌고 밤은 점점 더 추워졌으며 여자는 얇은 드레스와 찢어진 숄 안에서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p.88~p.89)


현재 로어 맨해튼에서 서로 1.5km 정도 떨어져 살며 종종 만나 함께 산책도 한다는 고닉 모녀는 그때마다 서로를 향한 애정이나 애틋함으로 감싸기보다는 할퀴고 물어뜯는 말로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내기 일쑤이다. 그럼에도 산책을 멈추지 않는다. 다닥다닥 붙은 다세대주택 안팎에 살았던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를 서로 묻고 대답하면서 시간 여행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고닉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 시나브로 자신의 것으로 적용하고 체화해갔던 여자들의 사랑, 시기, 질투, 신의, 성애적 욕망을 둘러싼 미묘한 신경전과 움직임 등은 사실 고닉 자신의 정체성인 동시에 다시 떠올리기 싫은 희미한 기억일지도 모른다.


다세대주택에 살았던 다른 여자들에 비해 엄마는 똑똑하고, 웃기고, 활기 넘치고, 권위와 영향력이 있었다. 비록 엄마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진짜 세상이 있음을 알고 있었고 때로는 그 세상을 열렬히 원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엄마는 아빠를 사랑했고 아빠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엄마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부엌을 떠나지 못했지만 말이다. 아빠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엄마는 다른 모든 이의 슬픔을 독차지하려 했고, 아빠의 죽음에서 절대로 빠져나오지 않기로 결심한 듯 행동했다. 이때부터 엄마의 고통은 딸을 구성하는 요소이자, 딸이 거주하는 국가, 바짝 엎드려 따라야 하는 법과 규칙이 되었다. 그런 엄마를 보며 딸은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엄마의 고통에서 기원한 그 다짐은 딸의 새로운 고통이 되어 자신을 겨누고 만다.


"그날 저녁 내내 슬프고 고요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줄곧 엄마에게 내려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밤 엄마는 그 자체로 완벽한 작품처럼 보이는 주름지고 지친 노인의 얼굴. 하지만 지난 세월은 엄마를 엄마만의 세계로 끌고 가고 눈에는 다시 그 혼란이 찾아온다. 엄마를 놓아주지 않는 저 끈질긴 삶이라는 혼란.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p.300)


비비언 고닉의 회고록 <사나운 애착>은 여성 작가의 회고록에 마치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진부한 소재이지만, 생생한 묘사와 구체적 대화를 적절히 엮은 기록으로 인해 글이라기보다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들 모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진에 담는 전속 촬영기사를 어린 시절부터 곁에 두고 일을 시켰던 것처럼 어쩌면 그렇게 세세한 것들을 기억하여 글로 옮길 수 있었는지 읽는 내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팔순의 노모를 대하는 사십대 후반의 딸은 남편을 잃은 슬픔을 끌어안은 채 상실의 늪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엄마의 모습이 답답한 게 아니라 흐르는 세월을 붙잡지 못하는 자신의 불안과 곧 다가올 자신의 상실이 두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에 '만족스러운 해결책은 아닐지언정 책상이 잠재적 구원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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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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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삶의 언저리에는 언제나 부유하는 시간의 잔재들이 떠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영혼이 채 영글지도 않았던 사춘기의 어느 시점에 용하다는 어느 무당이 자신의 운명을 미리 정해준 까닭에 성인이 된 이후에도 줄곧 자신의 삶 언저리에는 언제나 사춘기에 경험한 그 무당의 말이며 행동들이 시간에 부식되지 않은 채 쟁쟁거리며 떠다니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의 영혼이란 이렇듯 허약하기 이를 데 없어서 영혼의 지배를 받는 개인의 삶 또한 작은 운명의 둑이나 언덕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것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생존의 문제가 너무나 중한 나머지 예정된 운명의 향방을 미리 점쳐보거나 가늠해 볼 시간조차 없었던 운명 무지렁이의 삶은 얼마나 담대한 것인가.


"아창과 샤오메이는 서로를 보고 있었지만 사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창의 눈에는 당혹감만 가득하고 샤오메이의 눈에는 눈물밖에 없었다. 당황한 눈은 맞은편의 눈물을 보지 못했고 눈물 속 눈은 맞은편의 당혹감을 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우물과 강물처럼 처지가 달랐다. 한 사람은 우물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강물에 대해 생각했다."  (p.546)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위화의 신작 소설 <원청: 잃어버린 도시>는 600쪽에 가까운 장대한 분량임에도 가독성이 좋아 생각보다 빠르게 읽힌다. 주인공인 린샹푸와 샤오메이의 삶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사실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이 소설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한 남자의 기구한 운명, 재주도 많고 의지도 강한 사람이었지만 그마저도 그가 살았던 불운한 시대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고난의 자취를 감명 깊게 그려내고 있다. 청왕조의 끝자락인 신해혁명기, 북양군과 국민혁명군이 전쟁을 일으키면서 국토는 쑥대밭이 되고, 먹고살 길이 막막해진 백성들이 무기를 모아 다른 무고한 백성들을 수탈하는 토비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던 무정부 상태의 암흑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양쯔강 건너 남쪽 600리 아래 도시를 일컫는 '원청'을 소설의 제목으로 내세움으로써 존재하였지만 그 어디에서도 존재성을 인정받지 못했던 인간 군상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하여 책을 덮는 독자들은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자신에 대해 안도하는 한편 시대의 역경 앞에서 너무도 쉽게 꺾이는 인간의 삶을 생각할 때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허무와 상실감에 한동안 사로잡히게 된다.


"이 북쪽 출신 농민은 땅에 대해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아이가 엄마 품에 매달리는 것과 비슷한 절절함을 가지고 있었다. 12년 전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뒤 딸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았을 때 그는 떠오르는 아침 햇살 속에서 처음 완무당, 물과 땅이 어우러진 그 넓은 전답을 보았다. 뿌리째 뽑힌 나무가 사방에 흩어져 있고 벼가 짓밟힌 잡초처럼 여기저기 쓰러져 있으며, 망가진 배의 판자 조각, 수북한 띠, 굵은 나무와 뼈대만 남은 지붕이 수면 위로 떠내려가고 있었음에도, 린샹푸는 그 엉망으로 망가진 풍경 속에서 원래의 풍요로운 완무당을 볼 수 있었다. 노부인의 얼굴에서 젊은 시절의 미모를 발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p.147)


소설의 주인공인 린샹푸는 '원청'에서 1000리 떨어진 황허 부쪽 남자로 5살에 아버지를, 19살에 어머니마저 여의었지만 적잖은 재산과 단단한 성품을 물려받았다. 농사를 짓는 틈틈이 목공 기술을 익힌 그는 집사인 톈다 5형제의 보살핌을 받고는 있으나 혼인을 하지 못한 24살의 노총각이 된다. 그해 가을, 꽃문양 치파오를 입은 여자와 그녀의 오빠라는 남자가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 청하고, 이튿날 오빠라는 남자 아창은 아프다는 동생 샤오메이를 두고 떠난다. 곧 데려가겠다는 약속만 한 채. 홀로 남겨진 샤오메이는 린샹푸와 관계를 맺고 다음 해 초봄 보름치 음식과 새 옷을 지어 집에 남긴 채 린샹푸의 금괴를 훔쳐 사라진다. 다섯 달 만에 또 혼자가 된 린샹푸는 오열했으나 얼마 뒤 아이를 밴 채 나타난 샤오메이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또 떠나면 "아이를 안고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당신을 찾을 거"라던 린샹푸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샤오메이는 출산을 한 후 곧 사라진다.


"그 뜬구름 같은 원청은 샤오메이에게 이미 아픔이 되었다. 원청은 린샹푸와 딸의 끝없는 유랑과 방황을 의미했다."  (p.559)


전 재산을 집사에게 맡긴 린샹푸는 딸아이를 업은 채 샤오메이와 아창이 왔다는 도시 '원청'을 향해 떠난다. 100여 집의 젖을 먹었다 해서 붙인 딸의 이름은 린바이자(林百家). 이 딸에게 젖을 얻어 먹이기 위해 눈보라 속에서 찾아 들어간 집의 큰아들 천야오우는 그때 두 살이었다. 오누이처럼 성장했던 그들의 운명은 토비에게 인질로 끌려가던 린바이자를 대신하여 잡혀갔던 천야오우에 위해 뒤바뀐다. 토비에게 귀를 잘리고 고문을 당했던 천야오우. 두 사람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애틋하다. 어쩌면 그들도 린샹푸와 샤오메이의 운명처럼 기구했는지도 모른다. 소설에는 몸을 팔아 남편의 아편 값을 대는 여자 추이핑과 그녀에게 자신의 남은 삶을 의지하며 마지막에는 자신의 딸과 상인회 회장 구이민 등에게 유서와 같은 편지를 남기는 린샹푸의 이야기도 펼쳐지고, 장도끼와 스님 일파와 같은 토비들이 저질렀던 일반인에 대한 잔혹한 행위와 이에 맞서는 상인회 회장 구이민을 비롯한 민병대원들의 처절한 대응도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당시 무정부 상태 중국의 일반 백성들이 겪었던 참혹한 삶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민중의 삶이 절절하기만 하다.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언저리에는 언제나 부유하는 시간의 잔재들이 떠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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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 계속 쓰려는 사람을 위한 48가지 이야기
은유 지음 / 김영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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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되지 않고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보상이라곤 일절 주어지는 게 없는, 말하자면 지극히 비생산적인 일을 십수 년째 해오고 있다.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다고 비생산적인 그 일을 계속함으로써 기술이 향상된다거나 타인의 삶에 보탬이 된다거나 하다못해 일의 성과에 대한 작은 자부심이라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업에 바쁘다는 핑계로 이따금 그 일을 소홀히 할라치면 '내가 너무 무심했었나?' 하는 자책과 부담감을 나도 모르게 느낄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떤 특별한 동기나 이끌리는 까닭도 모른 채 십수 년을 이어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이다.


글쓰기의 장점을 줄줄이 늘어놓거나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려는 N잡러들의 시도를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 요즘이지만, 나는 사실 글쓰기를 통한 다른 어떤 시도도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광고를 빙자한 흔한 유혹이 나라고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나는 다만 블로그라는 공간이 나를 제외한 다른 누구의 간섭이나 권리 주장도 없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어느 정도의 심리적 자유가 보장되는, 다른 어떤 이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는 정신적 해방구로서의 공간으로 남기를 바라왔고, 그렇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심지어 나는 가족이나 친한 친구들에게도 블로그의 주소는 물론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도 함구하고 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내가 쓴 글을 읽게 된다는 사실이 계면쩍기도 하지만 글을 쓸 때 그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을 떠올리거나 문장을 써나감에 있어 다른 사람을 의식한다는 건 글 자체를 왜곡하거나 미화할 소지가 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무엇이든 쓰고 있다는 행위는 일견 답답하고 고지식하게 비칠 수 있다. 적어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 않은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대한 어떤 기대나 욕심이 전혀 없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동안의 독서 이력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글쓰기에 관련된 책들을 남들 못지않게 읽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글쓰기 관련 책을 열심히 읽는다고 없던 글쓰기 실력이 갑자기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글을 잘 쓰려면 책을 많이 읽어야 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도 있겠어요. 어떤 읽기는 읽는 사람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고요. 제 경험을 근거로 말씀드리면 '좋은 엄마란 뭘까' '인간답게 산다는 건 뭘까' 이렇게 자기 삶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수험생의 마음으로 한 독서는 쓰기에 큰 도움이 됩니다."  (p.222)


십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글쓰기를 이어왔다면서 글쓰기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보이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부끄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나는 또 은유 작가의 체험에서 비롯된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읽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은유 작가의 책이라면 가리지 않고 읽어왔으니 애독자 중 한 사람으로서 읽는 게 당연하지,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글.쓰.기'라는 세 글자에 눈길이 갔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글쓰기가 지금까지 제 삶에 좋은 영향을 미쳤는데요.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 인간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 이 냉혹한 진실까지 자각시켜준 것이 글쓰기입니다. 참으로 믿을 만한 자기 객관화의 장치가 아닐 수 없죠. 여러분도 잘 활용해보시길 바랍니다."  (p.289)


글쓰기 수업과 강연에서 자주 받은 질문을 토대로 글쓰기에 대한 마흔여덟 개의 질문과 대답으로 구성된 이 책은 책을 통해 글쓰기의 고민을 해결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물었음직한 보편적인 질문들을 통해 '나만 이런 고민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고민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글쓰기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기대한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먹고살기 위해, 고통스러울 때 살기 위해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작가의 솔직한 고백은 세상만사가 그렇듯 글쓰기 역시 절실함에서 비롯된다는 걸 다시금 깨닫게 한다.


"글을 쓰는 고난의 시간대를 거치고 나면 쓰기의 결과물에 딸려오는 선물이 있어요. 전에 어떤 작가가 그랬거든요. 책 쓰는 일은 지독히 고통스러운데 책을 쓴 유일한 보람은 좋은 사람을 많이 알게 된 것이라고요. 크게 공감했어요. 글은 중매인처럼 인연을 맺어줘요. 저도 그랬습니다."  (p.291)


그럴지도 모르겠다. 얼굴을 맞대고 직접 대면한 적은 없지만 블로그에 쓴 짧은 글을 통해 많은 블로거들과 인연을 맺기도 하고, 글에 달린 댓글을 통해 일희일비한 적도 더러 있다. 삶에는 기대하지 않았던 깜짝 선물이 이따금 주어지는 까닭에 질긴 목숨을 이어갈 수 있는 것처럼 글쓰기 역시 좋은 인연이 있어 토막토막 단절된 시간들을 이어갈 수 있게 되나 보다. 돌이켜보면 십수 년의 긴 시간 동안 나도 블로그를 통해 꽤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어쩌면 그게 글쓰기의 가장 큰 선물이라면 선물일 터, 나는 그 인연들을 너무나 쉽고 가볍게 여겨왔던 게 아닌가. 크게 반성하는 시간이다. 바깥공기가 탁해 창문조차 열 수 없는 휴일, 그 여유로운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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