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눈물을 자아내는 영화일 것이 분명해 보이니까.


그런데 이 영화는 의외성이 강했다. 우선 생각보다 최루성이 그다지 강하지 않았고, 스토리는 그다지 새로워 보이진 않는데 담백하다. 새로워 보이지 않는 대신 과연 이런 엄마가 있을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이를테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남아선호 사상에 남아 있지 않은가. 더구나 배경이 전라도 깡촌이다. 그렇다면 그 보수적 경향 때문에 여느 엄마라면 아들을 더 끔찍이 여겼을 법한데 영화는 반대로 딸을 더 끔찍이 여긴다. 내 새끼. 내 새끼 하며 불면 날아갈까 그런 애지중지가 없다. 


나름에 이유는 있다. 

엄마가 이 영화의 화자인 지숙을 낳기 전 얼굴도 모르는 언니를 낳았지만 얼마 안 있어 죽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자신이 태어났는데 엄마가 거의 집착에 가까운 사랑을 퍼붓는 것이다. 그런데 비해 지숙의 남동생은 거의 학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구박을 한다. (아들이야 구박은 해도 그 기저엔 남아선호가 깔려 있으니 그러려니 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이만하면 엄마의 딸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돈지 짐작이 갈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서사를 따라가기보단 인물에 집중해 보는 것이 좋다. 엄마 역의 김혜숙 배우의 연기가 단연 압권이다. 워낙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라는 건 이미 다른 영화나 드라마에서 입증한 바 있으니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 영화에서 시골 깡촌의 촌부 역을 그야말로 찰떡 같이 소화해 낸다. 그녀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볼만하다.


      

    우리네 엄마들은 왜 그렇게 바리바리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시는 건지...



이 엄마의 딸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하냐면, 원래 종교가 천주교다. 신부에게 고백성사를 하는데 딸을 그렇게 지켜주고 싶다면 묵주나 십자가 목걸이라도 해 줄 일이지 자꾸 부적을 해 주는 것이다. 그것이 죄라는 걸 아니 자꾸 고백성사를 하는 것이다. 신부는 그러면 안 된다고 단단히 충고하려 하지만 답답증에라도 걸린 걸까? "아, 신부님도 아를 낳아 보쇼. 내 맴을 알텐께. 아참, 신부는 결혼을 안 하니 아를 못 낳제. 그러니 나 마음을 알리 없지." (뭐 이 비슷한 대사를) 하며 속죄소를 박차고 나간다. 



그만큼 딸에 대한 엄마의 사랑은 하늘을 찌를 듯하다. 나 같으면 그런 사랑 줘도 안 받고 숨이 막힐 것 같은데 적당한 사랑만 준 울 엄마가 얼마나 고맙던지. 솔직히 요즘에 과연 이런 엄마가 있나 싶다. 할머니라면 가능할 것 같긴 하다.


어쨌든 지숙도 엄마가 자신을 사랑해주니 사랑은 길을 잃지 않는다고 못지않게 엄마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정말 나만이 하는 사랑이다. 그렇게 사랑하면 누구에게 말해도 부끄럽지 말아야 하는데 지숙은 촌스러운 엄마가 자기 엄마라는 걸 차마 남에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학부모 참관수업을 위해 나름 학교에 조신히 차려입고 온 엄마를 거의 쫓아 보내듯 돌려보낸다. 문득 이 지점에서 난 그 옛날 나의 외할머니를 떠올렸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학급 환경미화를 위해 물품을 준비해야 했는데 조그만 나의 몸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니 일단 나는 학교에 먼저 가고 엄마는 마침 집에 와 계신 외할머니를 시켜 그 물건을 보내겠다는 것이다. 지금 같으면 퀵을 시켰겠지. '학교에 누구를 보내겠다고? 외할머니를...?'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내가 외할머니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누구한테 내보일 만큼 자랑스러워했던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는 나름 오랫동안 한복에 쪽진 머리를 하고 계셨다. 

그때 외가가 부천에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곳은 꽤 시골이었다. 시골이야 나이 든 여성들이 한복에 쪽진 머리가 흔했으니 그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는데 문제는 할머니가 그다지 예쁜 스타일은 아니었다. 입도 크고, 코도 큰 그야말로 여장부 스타일이라 가끔 뵈면 어린 마음에도 놀라곤 했다. 물론 그건 할머니가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느껴지면 이내 가려지곤 했지만 그게 또 남의 눈도 가릴 만큼은 아니었으니 누가 할머니를 알게 되는 것이 싫었다. 어린아이의 눈도 눈 아니겠는가. 


할머니는 학교에 5분도 채 계시지 않았을 것이다. 물건만 담임 선생님께 바로 넘겨 드리고 가셨으니. 그런데 왜 내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지. 아마도 그때가 내가 위선을 처음으로 경험한 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날 집에 돌아와 할머니한테 얼마나 미안했던지. 용서를 구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가 떠오르면서 영화 속 지숙의 마음이 너무 이해가 가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사랑하면 신도 시샘을 한다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자신의 사랑으로 딸이 승승장구하고, 시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해 토끼 같은 손녀도 낳아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 싶을 때 하필 딸이 췌장암에 걸린다. 처음엔 아무런 이유 없이 혼자 친정에 온 딸이 그저 반가울 뿐이었는데 사랑하면 직감은 더 예민해지는 법이다.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하는 것도 수상하지만 결정적인 건 딸이 욕실에 들어간 사위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고 그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건, 그 후 지숙의 투병과 이를 간호하는 엄마를 통해 모성을 보여주려 했다면 그렇고 그런 뻔한 드라마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이제 보면 다시 못 볼 엄마를 만나고 기차에서 헤어지고 바로 딸의 장례식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딸을 먼저 보낸 엄마의 절절한 슬픔을 밀도 있게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본지 하룬가 이틀 후에 이태원 압사 사고를 뉴스를 통해 접했다. 처음에 그 보도가 참 생뚱맞다고 생각했다. 나름 치안이 잘 되어 있다고 하는 나라. 밤을 낮 삼아 돌아다녀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은 몇안 되는 (아마도 거의 유일할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160명 가까운 사망자가 났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차라리 세월호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물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사람이 다니는 좁은 골목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압사 사고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다소 못 살고 후진 국가라면 이해할 것도 같다. 이런 선진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뉴스는 건조하라만큼 사고 경위와 사상자를 보도하고 있는데 눈에선 알 수 없는 눈물이 자꾸 흘렀다. 내가 이 정돈데 하루아침에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는 어떤 마음일까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내가 이런 소식을 접하려고 그 영화를 봤던 걸까? 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2, 30대의 피해가 가장 컸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런 생각이 전혀 도움은 안 된다는 걸 알지만, 하나 아니면 둘 낳는 시대에 그들의 부모는 어떤 자식에게서 이 슬픔을 위로받을 수 있을까. 그 자식을 가슴에 묻기까지 또 얼마나 가슴 쓰리고 참혹한 시간을 보내야 할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영화는, 엄마가 딸의 장례식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엄마의 일상은 이미 예전의 일상과 같지 않다. 이제까지의 일상은 사랑으로 충만한 일상이었다면 앞으로의 일상은 하늘나라에 간 딸을 만나기 위한 부서진 일상을 사는 것이다. 영화는 저 세상으로 간 딸에게로 가기 위한 첫날을 세는 것에서 끝이 난다. 

오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며칠에 해당하는 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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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1-04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보고 엄청 울었던 영화에요. 지금 일이 있어 시청에 왔더니 합동분향소가 있네요. 헌화했습니다. 많이들 찾으시네요.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보고 말하고 걱정하는 관점이 어찌나 제각각 다른지 놀랍고요. 그게 당연하겠지만요.

stella.K 2022-11-04 14:10   좋아요 1 | URL
역시 보셨군요.
전 의외로 담백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ㅠ
관점이 다르니까 할 얘기도 많은 거겠죠?
김혜숙 씨 연기가 참 인상적이더군요.

시청에 오셨군요.
그래도 슬픈중에 위로가 되는 건
이렇게 시민의 한 사람으로 알지도 못하지만 같이 슬퍼한다는 거겠죠.
현장에선 심폐소생술도 같이 했다고 그러고.
잘 하셨네요.^^

프레이야 2022-11-04 15:23   좋아요 0 | URL
아뇨 영화는 담백하고요. 이번 사건 사고를 두고 보는 초점과 하는 말들이 다양해요.

stella.K 2022-11-04 16:50   좋아요 0 | URL
이크, 제가 오독했네요. 제가 이렇습니다. ㅠ

바람돌이 2022-11-04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신부님과 엄마의 대화가 재밌네요. 우리 옛날 어머님들 진짜 딱 저러셧을걸요.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은 어떻게 해도 극복이 안될거 같아요. 이태원사건 이후 계속 우울해서 무슨 말을 하기도 어려웠는데 아마도 제가 나이가 들어 희생자분들의 주 연령대가 우리집 애들 나이이다 보니 더 참담해지는듯 합니다.

stella.K 2022-11-04 16:57   좋아요 1 | URL
뭐 그만큼 딸을 사랑한다는 표현일텐데 재미있죠? 저는 이제 저의 엄마를 말리지 않습니다. 정말 이고 지지 못 할 때가 올 테니까. 대신 지난번처럼 정류장에 나가 있으려구요. 운동삼아서. ㅋ
맞아요. 다 비슷한 연령대 부모, 자식들이라 남의 일 같지가 않죠. 영화도 이런 식으로 연결이되고. 에고~ 그냥 한숨만 나오네요.ㅠ

라로 2022-11-04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영화를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네요.
뭐 그건 그렇고, 쭉 읽어 내려오면서 묵직하게 글을 쓰셔서 그런가
가슴이 답답합니다. 그 생각은 못했는데 이태원 사고의 희생자들의 부모에겐
어쩌면 단 하나인 자식일수도 있겠군요.ㅠㅠ
자꾸 알아갈수록 참담한 마음입니다.

stella.K 2022-11-04 17:01   좋아요 0 | URL
자식이 열이 있어도 한 자식 없으면 다 마음 아픈거죠. 근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 죽어간 분들의 부모는 어떻게 사나 걱정이되더라구요. ㅠㅠ

페넬로페 2022-11-04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보면서 울 것 같아요.
자식을 먼저 보내는 상황은 언제나 슬프고 힘들잖아요.
세월호도, 이번 이태원 참사도 젊은 사람들이 희생되어 안타까운 맘이 크지만 그들을 잃고 비통해 할 부모의 마음까지 생각되어 더 맘이 무겁네요^^

stella.K 2022-11-04 19:17   좋아요 1 | URL
맞아요. 이 영화 지금은 보지 마세요.
저는 사고 전에 봐서 그냥 담담하게 볼 수 있었는데
이런 일이 있고 보면 슬퍼질 것 같아요.
울고 싶을 때나 덤덤할 때 보세요.
2, 30 때면 한창 예쁘고 보기 좋을 땐데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어갔다는 게 넘 마음이 아프네요.
다신 이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말이죠.ㅠ

2022-11-07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07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작가의 인생 공부 - 잘 쓰기 위해 잘 살기로 했다
이은대 지음 / 바이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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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관한 책은 보통 세 부류의 사람이 내는 것 같다. 문학 그것도 주로 소설가가가, 자기계발이나 성공학 분야에서 내거나 또는 신문 기자들이 내거나. 이 책은 두 번째에 해당하지 않나 생각한다.

요즘엔 워낙에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와 다 읽을 수는 없고, 자신에게 맞는 책을 선택할 필요가 있다. 나도 한때는 글쓰기에 관한 책들을 제법 읽었고 지금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읽으려고 하는데, 내가 선호하는 쪽은 문학이나 기자들이 쓴 책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었다는 건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읽은 건 제목에 끌려서다. 그저 단순히 글을 어떻게 하면 잘 쓸 것인가에 대한 기술적인 측면보단 작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어 관심이 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책은 구성이나 발상은 좋은데 나처럼 이 분야 의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굳이 추천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새롭게 관심을 갖는다면 읽을만하다. 글쓰기에 관해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기존의 그것과는 색다른 측면이 있어 그 점은 좀 높이 사고 싶다. 즉 문장의 구성요소를 가지고 삶의 관점에서 대입시켜 보는 것이다. (그것은 이 책의 목차를 참조해서 보면 금방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게 나름 노련하다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저자는 글쓰기 강사로도 일하고 있는데 어떻게 가르칠지 알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시종일관 경어체로 썼다. 한 쳅터씩 읽을 때마다 꼭 저자가 미지의 독자 아니 미래의 작가에게 편지로 조언을 해 주는 것 같다. 특히 매 꼭지 말미에 네댓 줄로 내용을 요약하기도 하는데, 꼭 제자에게 보약 달여 먹이는 스승의 느낌이 들어 저자는 가르치는데 진심이구나 싶다. 단지 (자기계발 책들이 그렇듯) 너무 나이스한 게 좀 아쉽달까.

앞서 나는 세 부류의 사람이 글쓰기에 관한 책을 낸다고 말했는데, 그 세 분야가 결이 좀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문학은 진지하고, 주로 성공을 가지고는 말하지 않으며 은밀하고도 음습한 것을 쓰라고 독려하는 반면, 기자들은 특성상 진실과 객관성을 유지할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있다. 그리고 자기계발 쪽은 뭔가의 확신, 개조란 측면을 강조한다.

그런데 책을 읽다가 재미있는 부분을 발견했다. 저자도 문학책 꽤나 읽었나 보다. 그 분야는 주로 위로를 많이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긴 한때 문학이 그런 경향을 보였고, 지금도 그건 여전하다. 그게 또 어찌 보면 문학의 한 기능 아니겠는가. 아무튼 그런데 비해 자기계발 책들은 등짝을 후려치듯 단호함이 있어 선호하게 됐고 말한다. 과연 그렇기도 하겠구나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저자는 자신의 인생의 경험들을 재료 삼아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작가가 뭔가를 가르치려고 한다면 그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일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글 쓰기는 성공 가지고 말하기보단 실패 가지고 말해야 하는 게 작가의 숙명에 더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그렇게 읽어가다 '마감'(154p~)이란 챕터에 눈이 머물렀다. <작가의 마감>이란 책이 따로 있을 정도로 작가에게 마감이란 상당히 스트레스며 동시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 마감에 '책임지는 인생'이란 부제를 달아 놓기도 했다. 전에 나는 작가냐 아니냐를 가름하는 게 원고료를 받느냐 아니냐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 마감에 있지 않나 싶다.

소싯적에 나도 작가가 돼보려고 이것저것 써놓은 게 좀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러니 공모는 고사하고 누구에게 내 작품을 읽어봐달라고 부탁도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교회에서 짧은 극본을 쓰게 됐고 이게 참 나를 여러모로 바꾸는 개기가 되었다. 물론 그 일은 힘들면 안 해도 되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의 일엔 두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힘들어서 포기하는 일과 힘들어도 해내게 되는 일. 나는 포기가 빠른 인간이다.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도 금방 손들고 나가떨어진다.

그런 내가 이 일만큼은 끝까지 해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게 꼭 원고료가 주어지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전에 마감이 있어서다. 원고를 잘 쓰건 못 쓰건 주어진 분량을 주어진 시간내에 써 내야 한다. 글이 안 써질 땐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뛴다. 그런데 어느 때가 되면 내가 쓴 작품이 무대에 올라가 있다. 그때마다 내가 느끼는 희열? 뭐 그것도 만만치 않지만 그보다 난 내가 쓴 글을 마무리하는 걸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어느새 그 상황이 익숙해져 마감의 스릴을 즐길 줄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난 그 일을 그만둔 적이 있는데 안 하니까 처음 얼마간은 좋았지만 다시 그 일이 그리워졌다. 몇 년 전 요즘 젊은 작가들 사이에 유행하는 이메일로 글을 배달하는 구독 서비스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일을 겁 없이 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마감의 스릴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일은 나름 오래 했고, 내 보잘것없는 글을 구독해 주신 분들께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의뢰받은 글은 어떻게든 쓰는데 혼자 쓰는 글은 여전히 마무리를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작가에게 마감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작가는 혼자 글을 쓰면 안 된다. 공저를 하든지 출판사의 독촉을 받든지, 함께 그룹을 만들어 공언하고 서로서로 이끌어주든지 해야 한다. 말의 힘을 믿어야 한다.

사실 어떤 사람이 작가냐는 건 논란의 여지가 좀 있다고 생각한다. 책 한두 권 냈다고 해서 그게 과연 작가라고 할 수 있는 건지, 스펙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그런 사람에게까지 작가라고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또한 작가가 된다는 건 정말 평생을 걸어야 하는 일인데 마치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해 줄 것처럼 너무 희망적으로 얘기해도 되는지 의문스럽기도 하다.

근래에 들어 글을 쓰겠다는 사람은 많아졌다. 하지만 읽는 사람은 여전히 그리 많아진 것 같지는 않다. 이 균형을 어찌해할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쓰려면 읽어야 한다. 한쪽에서 이렇게 글쓰기를 강조하면 자연스럽게 읽는 인간도 늘어나려나. 무엇보다 난 평생 한 사람이 한 권의 책은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말은 옛말이다. 사람은 죽기 전에 책을 남겨야 한다.

 

저자가 이런 말을 한다. 생각과 행동 사이 거리가 멀수록 평범하거나 실패하는 인생이고, 생각과 행동 사이 거리가 좁을수록, 즉 실행에 옳길수록 성공 가능성이 커진다고. 실행력의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리라. 사람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돼야 하는지를 알게 되면 그에 걸맞은 태도와 삶을 살도록 되어있다. 작가는 확실히 멋진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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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0-28 19: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으잉? 스텔라 님께서 이런 책을 읽으셨다고요? 아이고.....
지금 충분히 잘 쓰시는데 나 참, 밋칩니다. 경어체 많이 쓰는 인간들을 조심하세요. 그거 사람 죽이는 겁니다. ㅋㅋㅋㅋ

stella.K 2022-10-28 20:16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미쳤나 봅니다. ㅠㅠ ㅋㅋ 근데 문트님 경어체 쓰는 사람에게 되게 당하신 적 있으셨나 봅니다. 다음부턴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Falstaff 2022-10-28 20:24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제가 가끔 경어체로 글을 올리거든요. 그럼 반응이 무척 좋아요.
아하, 이래서 사기꾼들이 그렇게 친절하고 반듯하구나... 하고 알았습지요. ㅋㅋㅋ

stella.K 2022-10-28 20:28   좋아요 3 | URL
ㅎㅎㅎ 정말요? 저 못 본 거 같은데... 다음부턴 조심해야겠는데요? 제가 사실 경어체 쓰는 사람만 보면 쓰러지거든요.🤣

mini74 2022-10-30 1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자에게 보약 달여먹이는 스승에서 웃었어요.

stella.K 2022-10-30 16:46   좋아요 2 | URL
ㅎㅎ 역시 미니님은 리액션이 좋으셔. 알라븅~♡
 
흥얼흥얼 노래하는 고슴도치 이야기 새싹
조소정 지음, 신외근 그림 / 하늘우물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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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그림책을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그림책이 흔하지도 않았지만 꼭 봐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 시절 내가 그림책에 관심이 없었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나도 눈 달린 사람이다. 어디선가 그림책을 보고 홀딱 빠질 만큼 좋았는데 차마 부모님께 사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글은 듬성듬성이고 그림만 무성한데(그림책이 원래 그렇잖나) 부모님은 그것의 가치를 잘 알지 못하셨다. 무엇보다 잠깐 보자고 그걸 사 보나 한 번 보고 말걸, 그러셨던 것 같다.

마치 아이는 금방 자라니 속옷이고 겉옷이고 무조건 길고 낙낙한 것을 입혀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는 애에게 책은 2, 3학년이나 읽을 법한 동화책부터 읽혀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독서의 선행학습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그림 같은 만화는 TV에서도 해 주는데 무슨 그림책인가 하셨을 것이다.

어쨌든 그래서 그런지 어른이 되어서도 그림책엔 그다지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린이의 마음 어디 안 가는 것 같다. 어찌어찌해서 운 좋게 이 책을 보게 되었는데 마냥 좋았다. 빨려 들어 갈듯이. 그러면서 내 안의 어린아이는 사라진 게 아니었구나. 어디선가 잠들어 있다가 이렇게 조금의 자극에도 반응하는 것이구나 싶었다.

이 이야기는 행복을 찾아 떠난 아기 고슴도치의 이야기다. 아기 고슴도치 치곤 너무 철학적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존재를 긍정할 수 없는 아이가 행복을 찾아 떠나는 길에서 자신을 긍정하게 되고, 덤으로 자신의 (노래하는) 재능을 발견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가족과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은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의 또 다른 버전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 역시 나는 어른은 어른인가 보다. 내용과 그림에 매료되었음에도 여전히 현실을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과연 오늘날의 어른과 교육이 어린아이로 하여금 자아를 찾아가도록 허락하고 있는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아이의 선택은 무조건 잘못됐거나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부모가 권하는 것만이 좋은 것이라고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철학은 어른들이나 하는 것이라며 어린이를 위한 철학은 알지도 못하며 외면해 온 건 아닌지. 한마디로 난 아이들에 대해 너무 무지했구나 싶었다.

사실 고슴도치는 그 가시 때문에 그렇지 엄청 귀여운 동물이다. 주인공이 자신을 깨달아 가면서 처음엔 자신의 가시가 다른 이를 아프게 한다며 안타까워하지만, 나중에 바로 그것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건 감동적이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가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자세는 너무 중요하다. 넌 왜 그렇게 생겼냐고 손가락질하고 윽박지르면 고슴도치의 그 털은 정말 가시가 되어 상대를 공격하고 종국엔 자신도 찌르게 되는 무기가 될 것이다.

글쓴이는 아들 때문에 고슴도치를 키우게 됐고 그 경험을 바탕 삼아 이 책을 썼다고 했다. 더 정확히는 아들이 게임에 중독되다시피 했는데 그것을 벗어나 보겠다고 한 아들의 선택이었는데 나중에 이를 허락하고 키우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아들은 실제로 게임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난 그게 좀 놀라웠다. 어쩌면 아이들은 자신의 상태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방법을 모르는 거겠지. 정말 그럴 땐 부모가 그것을 벗어날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고 격려해 줘야 한다.

그런데 언뜻 내용이 어린아이가 읽기는 조금은 어렵지 않나 싶기도 하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 책을 읽고 행복을 찾아 떠나야겠다며 정말 가출을 감행하는 아이는 없겠지. 학교에서 학원으로 뺑이 치는 치는 삶을 살고 있는데 가출은 무슨. 그런데 어찌 보면 가출도 좀 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늘 감싸기만 하는 자식 다 커서도 늘 품 안에만 있으려고 하면 그 아이의 독립심, 자립심은 언제 키울 것인가.

물론 이 이야기는 어린이의 자아 정체를 위한 하나의 은유이긴 하지만 이를 위한 노력은 교육에서 참으로 중요하겠다 싶다.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고, 어려운 수학 문제 풀 줄 안다고 그게 교육의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참내, 늘 에세이나 소설만 읽을 줄 아는 내가 그림책 한 권 읽고 이렇게 생각이 많을 줄이야. 이 분야에 종사자들 고민이 참 많겠다 싶다. 솔직히 요즘에 그림책부터 보는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사물을 인식할 때부터 바로 게임으로 직행하는 게 요즘 아이들 아닌가. 책 읽기 어려운 시대를 사는 건 어른이나 아이나 같은 것도 같다. 그렇지만 책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다. 모쪼록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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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1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때는 그림책은 구경도 못하던 시골출신이라지요. ㅎㅎ그래서 그런지 저희집 애들이 어릴 때 애들 읽어준다고 그림책을 많이도 봤는데 아이들보다 제가 더 좋아했어요. 그림도 글도 어찌나 좋은 책들이 많던지.... 그러던게 또 애들이 크니까 안보게 되네요. 스텔라님 글보니 한번 날잡아서 도서관 어린이실에 앉아 그림책을 잔뜩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

stella.K 2022-10-21 19:16   좋아요 0 | URL
와, 바람돌이님 좋은 엄마시네요.
아이들에게 그림책도 읽어주시는.
당연 아이들이 크면 그림책도 멀어지죠.
근데 이렇게 나이들어서 그림책 보니까 그도 좋더라구요.
사실 어린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글을 짓는다는 게
쉽지 않을텐데 동화작가들 대단한 것 같아요.
앞으로 잘 됐으면 좋겠어요.^^

yamoo 2022-10-21 17: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그림책을 읽으셨나봅니다~
그림책 읽고 저두 스텔라님처럼 장문의 리뷰를 쓴 적이 있어요.
겐지의 은하철도의밤도 그림책이 있는데, 아주 끝내줬습니다.
생각을 많이하게 하는 그림책들이 있어요. 요는 그런 책을 잘 모른다는 거..^^;;

stella.K 2022-10-21 19:19   좋아요 1 | URL
앗, 어딨죠? 알라딘에서 으나철도의 밤 치면 나오나요? ㅎ
나중에 찾아 보겠습니다.^^

pek0501페크 2022-10-21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로그인 안 해도 댓글이 써지는 서재였나요? 한번 시도해 본건데 하하~~. 스텔라 님 용감하십니다.ㅋ
오늘 무척 바쁜 하루였어요. 이제 처음 누워 봅니다. 일복 없이 살던 제가 갑자기 일복이 많아졌어요.
저야말로 동화책을 읽어야 해요. 어릴 때 제 나이에 맞는 동화책이 없었던 때를 아직도 기억하거든요.
이미 다 읽었거나 너무 어려운 문학책이 있었던 거죠. 옛날 어머니들은 알뜰함이 지나쳐 생략이 많았어요.
독서보단 공부가 우선이던 분위기에서 자랐죠. 독서는 방학때 독후감 쓸때나 필요한...
그 점이 지금도 아쉽게 느껴집니다.
리뷰, 잘 쓰셨는 걸요. 저보다 훨씬 잘 쓰십니다. ㅋㅋ^^

페크pek0501 2022-10-22 15:56   좋아요 1 | URL
제가 제 닉네임의 순서를 바꿔서 썼네요. 자기 닉네임도 정확히 모르다니... 제가 이래요.(페크, 를 앞에다 쓰는 거였군요.ㅋㅋ)
지금도 생각하면 어릴 적에 독서광으로 자라지 못함은 아쉬운 부분이에요. 성인이 되고서야 독서의 즐거움을 느꼈던 것이죠. 그럼에도 뒤늦게라도 독서의 즐거움을 안 것을 큰 행운이라 여겨요. 아직도 책만큼 매력적인 걸 찾지 못했어요.
10월이 점점 가고 있어요. 매일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2022-10-22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22 2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2-10-22 0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그림책 누구나 봐도 된다고 하죠 어린이만 보는 게 아니다고... 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은 동화예요 만화 <은하철도 999>를 그리게 했다고 하는.... 그런 말이 있지만 많이 다르더군요 찾아보니 <은하철도의 밤> 그림책으로도 나왔네요 원작 동화로 그림책 그렸군요 후지시로 세이시...

미야자와 겐지 시로 나온 그림책도 있어요 <비에도 지지 않고>로 2021년에 나왔어요 그림을 한국 사람이 그렸어요 이것보다 전에 나온 건 그림을 일본 사람이 그렸네요

저도 잊어버렸는데 <은하철도의 밤> 그림책 나온 거 스치듯 본 것 같습니다 저게 그림책으로 나왔네 했을지도...


희선

stella.K 2022-10-22 20:52   좋아요 0 | URL
아 그게 그런 건가요? 역시 희선님은 일본통이신가 봅니다.
그걸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희선님 이리 말씀하시니 더욱 궁금하네요.
주민센터 도서관에라도 가서 함 찾아봐야겠어요.^^

프레이야 2022-10-22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릴 적에 안데르센그림책을 엄마가 사줘서 봤던 사람요 ㅎㅎ 엄마가 할부로 전집을 사서 안겨주셨어요. 요즘 아이들 그림책 많이 보고 자라면 좋겠는데 책보다 스마트폰 게임이나 영상이 더 가까이 있죠. 아이들 어릴 때 진짜 그림책 같이 보며 저라는 엄마도 같이 자랐는데 말이죠. 일러스트 멋진 그림책 어찌 많은지. ^^

stella.K 2022-10-23 19:51   좋아요 2 | URL
저는 엄마가 나만을 위한 책은 안 사주시더라구요.
언니와 오빠를 위해선 사 주는데.
뭐 결국 다 같이 보라는 뜻이었겠지만
그땐 내것 네것 얼마나 편가기가 심해요?
엄마가 다정해서 저나 동생을 위해 그림책을 읽어주고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어요. 그게 좀 아쉽긴 하더군요.
진짜 나이드니까 일러스트던 뭐든 그림 하나는 배워보고 싶긴하더군요.
(생각만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

2022-10-23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23 19: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25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0-25 1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02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02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이 영화 보다가 완전 뒤집어졌다. 

물론 이 영화 절대로 웃긴 영화 아니다. 보고나면 정말 우울해지는 칙칙한 영화다. 


원래 드라마의 법칙 중 하나가 밝고 환하고, 잘나고 잘 사는 사람이 나와줘야 한다. 그래야 관객의 돈이 아깝지 않다. 이렇게 칙칙하고 우울한 것이 통하는 장르가 있는데 그건 소설일 것이다. 그런데 가끔 그 반대되는 영화가 나와줘도 용서가 되는 영화가 있다. 물론 흥행과는 상관이 없다. 그래도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나름 성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밀레니엄 전후로 우리나라에도 여성 감독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던 것으로 아는데 그 명단 거의 첫줄에 올릴만한 감독이 임순례 감독은 아닐까 한다. 


솔직히 남자 감독들도 살아남기 어려운 영화판에 무슨 영화를 만들었을까 싶은데, 199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임 감독은 뚝심과 부지런함으로 영화를 만들어왔다. 다른 건 몰라도 <리틀 포레스트>와 <제보자> 정도는 웬만한 사람은 알지 않을까. 그걸 임순례 감독이 만들었다는 걸 함께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런지.


아무튼 나도 분명 이 영화를 본적이 있긴 하다. 상영관에서 봤는지 아니면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 봤는지 아니면 tv에서 봤는지 기억은 잘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상영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봤던 걸로 기억한다. 그땐 보고나서 어찌나 떨떠름 했던지. 워낙 영화에 대한 찬사 때문에 함부로 욕은 못하겠고, 그렇다고 좋았다고 말하면 거짓말하는 것이니 대략남감이었더랬다.


솔직히 난 남자들이 삶에 쩔어 가지고 술 먹고 꼬장 부리는 거 딱 질색인데 이 영화는 거의 95% 이상이 그렇다고 봐도 될 것이다. 그나마 편집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런데로 봐 줄만하다고 용서를 했을지도 모른다. 장면 넘어가는 게 너무 아마추어적이라 그것도 마땅치 않았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건 나와 비슷한 또래의 다른 삶을 보여줬다는 게 공감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나야 워낙 온실속의 화초처럼 젊은 시절을 살아가고 있었으니 물론 뭐 이런 삶도 있구나 하면 되는거긴 하지만 크게 공감할만한 요소는 없었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볼 생각을 거의 안하고 있었다. 어젠 조금 보다 말려고 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이 영화 장난 아니다. 코미디 영화는 이미 웃을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정말 나를 웃겨줄 수 있나, 웃긴다면 얼마나 웃겨줄 것인가를 지켜보겠지만,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지점에서 빵 터지고 말았다. 그건 와이키키 브라더즈의 4인방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에서다. 고등학생으로 어렵게 어렵게 동년배의 여학생들과 친구가 되어 바닷가에서 노래를 부르며 한창 분위기가 좋았다. 그런데 선배들이 끼어 들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와이키키 4인방은 뭐 씹은 기분이 되어 한쪽에 찌그러지는 형국이다. 그러다 기분이 나빴던지 누군가 술에 취해 결국 선배들을 받았고 결국 한판 뜨게 된다. 그걸 보는데 얼마나 웃기던지. 정말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다.


물론 이건 나만의 웃음의 포인트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그 장면을 보면 뭘 그렇게까지...? 라며 오히려 벙쩌하거나 나를 좀 이상하게 볼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 영화에 그런 장면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어쨌든 난 이제야 이 영화의 진가를 발견한 셈이다. 그때부터 중간중간 보면서 얼마나 웃었던지. 지금도 비실비실 웃음이 난다. 이런 영화가 정말 잘 만든 영화다. 누구는 그러지 않았나, 드라마는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이걸 가장 잘 수행한 몇 안 되는 영화중 하나는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처음 봤을 때는 하나도 웃기지 않았던 영화가 이제 다시보니 이렇게 웃기다니! 도대체 이걸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나의 비극은 누구에겐 희극이 될 수 있어서일까? 아니면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와 비슷한 나이의 배우들이 인생의 한 시기를 통과해 가고 있었구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서일까. 지금의 중견 배우들이 이제 막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을 때 찍은 영화다. 박해일이 아역 배우로 나온다는 걸 그때는 몰랐는데 두번째로 보니 알겠다. 황정민 못지 않게 박원상이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는 것도 이 영화를 보니 알겠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성우 역을 맡은 이얼이란 배우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이 배우를 언제부터 알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최근 4, 5년전에야 비로소 조금씩 알기 시작해서 S 본부의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야 비로소 확실히 각인되었던 것 같다. (그 보다 <라이브>란 드라마가 먼저다.) 그때 거의 스러져가는 야구 감독의 역을 맡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연기를 곧잘해서 연극판을 한동안 굴렀겠구나 했다. 그런데 아깝게도 지난 5월 식도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58세다. 이 영화에선 상당히 참하게 나오는데 역시 보고 좀 놀랐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세상에 80% 이상이 남자 이야기다. 이 남자 이야기를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이긴하다. 보통 남자 감독이 남자의 이야기를 하지만, 드물게는 여자가 하기도 한다. 여자 감독이 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확실히 그 질감이 다르긴 하다. 남자 감독은 당연히 거친 느낌이지만 여자하면 글쎄, 이렇게 웃프게 표현할 수도 있다니! 감독이 좀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뚝심 하나로 만들었겠구나 새삼 존경심이 느껴진다. 지금의 MZ 세대는 잘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5, 60대는 옛날을 추억하며 볼 수 있는 영화다. 추억을 팝송도 들을 수 있고. 지금은 밴드라고 하지만 예전엔 그룹사운드라고 했다. 그 시절의 영화다. 

참, 배우 류승범의 앳된 모습도 볼 수 있다. 새삼 우리나라에 탈색머리의 역사가 깊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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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10-15 2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크흐 이 영화 좋아하면 연식 나오는건데 말이죠. 저도 좋아해요. ㅎㅎ 웃프고요. 노랑머리 류승범 지금은 코로아티아에선가 멋지게 살고 있더군요. 박해일 파릇한 얼굴도 나오고요. 이얼 배우 참 안타까워요. 누드로 서서 기타 치며 노래하는 장면 ㅠ 마지막에 오지혜가 부른 사랑밖에 난 몰라 좋아합니다. ㅎㅎ 수안보 온천 개발 초기 때라 시위하는 사람들이며 그런 시대 배경도 슬쩍 담은 임 감독^^

stella.K 2022-10-16 18:47   좋아요 0 | URL
사실은 웃긴데 슬픈것이 아니고 슬픈데 웃기죠.
유승범 나이들어가면서 멋져지는데 왜 연기를 안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직 한창인데. 결혼해서 잘 사나 모르겠어요. 이얼 배우 그 장면 정말 처연하죠? 아까운 배우여요. 😢

바람돌이 2022-10-15 21: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 말씀처럼 연식 나오는 영화. ㅎㅎ 며칠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한 임순례 감독님 사진을 보는데 뭔가 변하지 않은 그 분위기가 너무 좋았어요.
이 영화 본지 오래 됐는데 다시 찾아보고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글이에요. ^^

stella.K 2022-10-16 18:24   좋아요 0 | URL
임순례 감독이 왔군요. 오래오래 감독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스산한 기을에 보기 좋은 영화죠. 함 보세요. 새로운 걸 발견하게될지도 몰라요.ㅋ

나와같다면 2022-10-15 2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늦가을 이였을거예요. 씨네큐브에서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보고 나와서 광화문을 걸었던 그 날이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오지혜의 ‘사랑밖에 난 몰라‘ 가 계속 맴돌던 그 날.

stella.K 2022-10-16 18:30   좋아요 1 | URL
앗, 그렇다면 나와같다면님 연식이...? ㅋ 엔딩이 그렇게 끝날 줄 몰랐어요. 그렇게 끝나는 것도 괜찮구나 싶더군요.^^

책읽는나무 2022-10-16 07: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영화 평이 좋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 번 봐야지~ 했었는데 여적 못봤어요.
임순례 감독님 영화였었군요?
그래서 유명했었나 보군요!
저는 <리틀 포레스트>는 재미나게 보았어요.
계속 봐도 질리지 않는...^^
이얼 배우를 잘 몰라서...그런 일이 있었군요?
<라이브> 드라마도 오래 전에 참 재미나게 봤었는데??
기억이 안나네요.ㅜㅜ
앗!!! 금방 검색해서 봤는데 얼굴을 보니 알겠어요!!! 에궁~ㅜㅜ
참 친근감있게 연기하신 분이었는데..안타깝네요.ㅜ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stella.K 2022-10-16 18:35   좋아요 1 | URL
이거 꼭 보세요. 리틀포레스트는 뭐 워낙 원작이 좋으니. 아무래도 임순례가 좀 더 잘 만들지 싶어요. 울나라 음식 가지고 만들어 일까요? 암튼.^^

호우 2022-10-16 09: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너무 유명해서 익숙한 느낌인데 보지는 못 했네요. 2001년이면 한창 육아 전쟁을 치르면서 일도 하고 살아내느라고 주변을 잘 못 돌아 볼 그런 때 였네요. 영화 한 편으로 인해 또 나를 돌아보게 되네요. 한 번 봐야겠어요. 스텔라님, 감사해요~~^^

이얼 배우는 <인사동 스캔들>에 나왔던 역할이 기억에 남았어요. 우정 출연인데도 내공이 느껴져 아주 강렬했었는데.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stella.K 2022-10-16 18:39   좋아요 1 | URL
와, 그럼 호우님 자녀분 지금 다 컸겠네요. 이제 함 보세요. 여유롭게.
이얼 배우 인사동 스캔들에 나왔다는데 전 기억이 없어요. 나중에 다시 봐야겠어요.^^

북프리쿠키 2022-10-16 14: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영화제 수상작 위주로 챙겨보는데, 얼마전 봄날은 간다를 보며 느낀게 유지태가 엄청 앳되게 나와서 놀랬습니다. ㅎㅎ
우리도 리즈 시절이 있었겠지요 ?? ㅎ

stella.K 2022-10-16 18:45   좋아요 2 | URL
아, 봄날은 간다 정말 좋죠. 이때까지만해도 유지태 좋아했는데 그후 악역을 해서일까 좀 싫더라구요. 그러다 작년에 유키즈에 나와서 노는 모습 보니까 나쁘지 않더라구요. 제가 무려 이럽니다. ㅎㅎ 근데 쿠키님은 그 악명 높은 악령도 완독하시고 영화제 수상작도 챙겨 보시고. 대단하세요.👍

희선 2022-10-17 00: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리틀 포레스트> 영화가 있다는 건 아는군요 임순례 감독 이름도 들어봤는데, 그 영화 만들었다니... 시간이 지나고 나서라도 저 영화를 보시고 예전과 다른 걸 느끼는 것도 괜찮겠지요 영화뿐 아니라 책도 그렇겠습니다 그때 함께 느끼면 좋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희선

stella.K 2022-10-17 10:25   좋아요 0 | URL
그럼요. 전에 보지못했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건 즐거운 일이죠. 리틀 포레스트 함 보세요. 희선님도 좋아하실 거예요.^^
 
문학은 어떻게 신앙을 더 깊게 만드는가 - 시와 소설과 그리스도인
이정일 지음 / 예책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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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서를 시작할 때 문학부터 읽기 시작했다. 흥미롭기도 하고, 독서 습관들이기에도 이만한 분야가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던 문학도 어느 순간 갑자기 흥미가 떨어진 때가 있었다.


거미(?)가 다리가 여러 개인 지네를 놀려줄 요량으로 어느 날 이렇게 물어봤다지. 너는 움직일 때 몇 번째 다리부터 움직이냐고. 그러자 순간 지네는 자신이 정말 어떤 다리부터 움직이는지 알지 못했다. 그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그것이 하나도 문제가 안 됐는데 말이다. 과연 이 다리, 저 다리 움직여 보지만 과연 자신이 어떤 다리부터 움직이는지 알지 못했고 결국 모든 다리가 꼬이고 말았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당연한 걸 질문받았을 때 또는 한 번도 의문을 가져 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해 질문을 받았을 때 우리도 당황하게 된다. 다리가 꼬인 지네처럼.


내가 그랬다. 좋아서 읽기 시작한 문학이 갑자기 왜 읽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는 거다. 좋으면 그냥 좋은 거지 거기에 무슨 이유가 있단 말인가. 그러고 나니 모든 게 꼬이기 시작했고 권태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결국 멀어졌다. 돌이켜 보면 아무리 자기 좋아하는 분야도 권태기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리고 그때 한 번도 안 해 본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느끼는 것도 한때고, 지금은 오히려 문학을 많이 못 읽어서 아쉽다.


하지만 역시 문학을 왜 읽는지에 대해 명확한 답은 달지 못했다. 역시 좋아하는 것에 무슨 이유가 있냐고 얼렁뚱땅 넘어갈 판이다. 학교 때 그렇게 책을 읽어라, 그것도 고전을 읽어라. 독서의 유익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많이 들었으면서 정작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적어도 내 기억엔 없다. 물론 몇 마디로 진부하게 대답은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얼핏 기독교 서적 같지만, 우리가 문학을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안 믿는 사람이더라도 기독교에 별 거부감이 없다면 한 번쯤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물론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이 있으면서 한 번쯤 문학을 왜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책을 읽어 봤다면 굳이 읽을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어찌 보면 논문 제목 같기도 하지만 분류를 하자면 독서 에세이다. 그것도 지극히 기독교적인. 그러면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 문학만을 대상으로 삼았나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여러 다방면의 책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고찰하고 했다. 이 책은 '기독인이여, 제발 문학을 읽어라.'라고 외치며, 왜 그런지를 끊임없이 설명하고 있다.


​솔직히 문학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기란 쉽지 않다. 문학은 문학이고, 신앙은 신앙이지 이 둘을 같이 생각한다는 게 가능할까 싶기도 하다. 동양 문학은 몰라도 서양 문학은 그 뿌리를 성경에 두고 있음에도 현대 문학은 꼭 그렇지만도 않으니. 그렇다고 신앙에 도움이 안 되니 무조건 읽지 말아야 할까? 그렇다면 문학의 반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무엇이 되었건 기독교 세계관으로 재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평생을 걸쳐 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문학을 대하는 수준이 놀라우리만치 일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문학을 대하는 수준은 오직 하나다. 잘 읽히는 작품이냐, 아니냐. 내가 좋아하는 문체냐 아니냐. 감동스럽거나 사유적 문장이 얼마나 많이 깔려 있느냐. 한마디로 지극히 원초적이다. 세계적인 명작이든 아니든 내가 읽을 수 있는 작품이면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내겐 인연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별로 연연해 하지 않았다. 세상에 읽어야 할 작품이 얼마나 많은데 그 작품이 안 읽힌다고 징징대는가.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이런 말을 한다. "문학을 모르면 자신을 돌보는 것이나 삶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뭔지 모른 채 나이 들고 말 것이"라고. 저주에 가까운 말이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고. 그 말처럼 무서운 말도 없는 같다. 그렇지 않아도 이 말은 이 책에 적잖이 반복되는 말이기도 하다. 어쩌면 문학은 그렇게 되어버릴 수 있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에 쐐기를 박는 가장 좋은 약인지도 모른다.


우린 때로 남의 삶, 남의 생각 속에 나를 비쳐보곤 한다. 그럴 때 문학은 남의 생각과 삶을 알기에 가장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한다. 또한 그것을 문학이란 도구로 보지 않으면, 남의 삶의 한 단면만 보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흉내 내거나 묻어가고 싶어 한다.


무엇보다 사람은 다양한 것을 경험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필요 없는 경험까지 하므로 시간과 정력까지 낭비할 필요는 없다. 할 수도 없고. 그런 건 문학이 한다. 사람들 중엔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특히 소설 같은 허구를 왜 좋아하냐며 혀를 끌끌 차는 사람도 있다. 물론 과학과 이성이 중요한 세상에 살고 있긴 하지만 사람이 과연 그것만 가지고 살 수 있는 존재던가. 하루키도 <언더그라운드>란 책에서 똑똑하고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사이비 종교에 빠지더라고 했다. 그것에 대해 저자는 단호히 말한다. 평소에 문학을 읽었다면 극단적인 상상력을 신비 혹은 초월로 포장한 조잡하고 단순한 사이비 교리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은유, 초월적인 것을 이해하는 비논리의 힘을 모르면 인간은 거짓을 분별할 수 없게 된다고.


또한 저자는, 무모할 정도의 확신도 필요하지만 유연하고 통찰력 있는 사고도 필요하다고 했다. 어디 그뿐인가. 세상은 세상대로 적극적 사고와 온갖 처세술을 강조하는 책으로 넘쳐난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그럴수록 유연한 생각과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하게 된다.


저자는 소설 읽기는 일종의 복기라고 했다. " ... 승패가 결정된 판을 다시 되짚는 것이다. 어떤 수에서 승패가 갈렸는지, 승자는 보았지만 패자는 보지 못한 경우의 수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되짚는 것이다. ...... 이 복기가 일상에서는 자기 검증이며, 바로 소설이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소설은 실패한 인생을 글로 복기한 것이다. ......


소설은 인생, 특히 실패한 인생에 대한 관찰 보고서와 같다. 보고서는 팩트에 근거하여 정보를 전달하지만 소설은 그 정보가 뼛속까지 느껴지도록 만든다. 실패한 인생을 다양한 시점으로 복기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뼛속까지 알게 하는 것이다."(154쪽)


역사는 승자의 보고서지만 문학은 패자의 보고서라고 했다. 그러니 소설을 단순히 상상력과 허구의 산물이라고만 취급하지 말아야겠다. 그러면서 저자는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회개는 잘 하지만 복기는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 반박할 여지는 없지만, 복기를 안 하기는 비기독교인도 마찬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똑같은 상황이 왔을 때 역시 똑같이 반응하고 허탈해 한다. 그래서 사람은 인생에 한 번은 자기 자랑으로 가득 찬 회고록이 아니라 온갖 실수와 어리석음으로 가득한 고백록을 써야 하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 쓰다 보니 나도 어느새 저자의 생각에 동화된듯하다. ​이 책은 어디를 펼쳐 읽어도 우리가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설득한다. 어찌 보면 교회 오빠에게서 받는 과외 수업 같기도 하다. 과외수업에서 중요한 건 맥을 잡아주는 일 아닌가. 문학뿐만 아니라 신앙의 맥도 잡아주니 일석이조(?)다. 믿음 있는 사람은 어디 이런 과외 선생 없나 할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말도 두 번 이상 들으면 잔소리가 된다. 사람은 잔소리 듣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 하지만 가끔 잔소리해 주는 사람이 그리워질 때도 있다. 저 사람은 얼마나 확신에 차있으면 저렇게 잔소리도 각잡고 하는 것일까 싶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난 이 말에 꽂혔다. "세상에는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이 선택은 본능적으로 나타나는데, 문학이 그 과정을 설명한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 힘에 대해, 우리는 사랑의 섬광을 견디는 법을 배우기 위해 잠시 지상에 머문다.'라고 표현했다. 시인은 이런 빛나는 통찰을 어떻게 붙잡았을까? 문학은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는 창문을 열어주는데, 그것이 상상의 힘이다."(254쪽) 과연 문학이란 이런 것이겠구나 싶다. 이런 문학을 향유하길 거부한다면 우린 인생에 많은 부분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난 저자의 사유의 깊이와 자유로움이 부러웠다. 다시 각 잡고 문학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아쉬운 건 설득은 좋은데 다소 동어반복적 부분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건 확실히 가독성을 떨어뜨린다. 너무 자세히 쓰다 보니 지루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런 것만 견딜 수 있다면 이 책은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굳어진 사고에 자극을 주는 책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뭐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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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9-13 13: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주에 가까운 말 ㅎㅎㅎ 소설이 일종의 복기라는 말, 패자의 역사란 말 참 좋습니다 ~

stella.K 2022-09-13 19:03   좋아요 2 | URL
그렇죠? 저도 소설이 패자의 역사여서 좋습니다.^^

페크pek0501 2022-09-13 14: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가 흥미를 보이는 분야를 알게 되었죠. 인간 심리에 관한 책을, 내용을, 강연을 흥미 있어 합니다. 어제인가 그제인가 김경일(지혜의 심리학, 의 저자) 님의 강연을 티브이로 보게 되었는데 참 흥미로웠어요. 어떤 상황에서 인간이 가장 많이 보이는 태도나 결정을 알아보는 실험의 결과를 소개했는데 신기하더군요. 인간에 대해 잘 알게 되면 상품 만드는 기업은 성공할 테고, 연애를 하는 사람은 연애에 성공할 테고, 인간 관계에서도 비교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듯해요.
인간의 심리를 잘 표현한 소설이나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stella.K 2022-09-13 19:10   좋아요 2 | URL
아, 저도 그랬습니다. 소설이 시들해지자 심리학이 좋아지더라구요.
그래도 지금은 다시 소설이 좋아요.
사실 알고보면 소설이 굉장히 어려운 분야라는 생각이 들어요.
한 시대를 알아야하고, 등장인물도 알아야하고, 문체도 좋아야하고
기타 등등.
근데 말만 이렇게 합니다. ㅋㅋ

레삭매냐 2022-09-13 1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과연 그러합니다.

독서는 자아 성찰의 순간이자
자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은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으며 새로운 문학도 끊임
없이 등장하니 쉬이 지루해질
틈이 없는 것 같습니다.

stella.K 2022-09-13 20:00   좋아요 2 | URL
캬~! 역시 매냐님이십니다.
소설은 매냐님처럼 읽어야 하는데...!^^

희선 2022-09-14 00: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소설에도 대단한 사람이 나오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이 더 많이 나오죠 그런 사람을 보면서 위로 받는 거겠지요 자기 삶을 살다간 사람 이야기, 그런 것도 괜찮네요 이런저런 상상도 하게 하는군요 거기 담긴 걸 다 알지 못할지 몰라도...


희선

stella.K 2022-09-14 10:27   좋아요 1 | URL
대리만족 같은거죠. 내가 실제로 그렇게 다 살 수는 없으니까. 매력적이긴한데 요즘엔 좀 힘들더군요. 묵직하고 괜찮은 소설읽으면 좋긴한데 살 빠지는 느낌도 들더군요. ㅋ

han22598 2022-09-18 18: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오히려 소설을 안 읽다가 요즘에 소설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어요....그래서 비소설을 거의 읽고 있지 못하지만요. 그런 차에 이 책을 읽었는데, 읽는 내내 ..끄덕거리며...계속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stella.K 2022-09-18 21:18   좋아요 1 | URL
아, 님도 이 책 읽으셨군요.
정말 읽는내내 소설과 시를 다시 붙들어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마구 들더군요.

저자가 비교적 젊은 사람인 것 같더군요.
노련미는 다소 아쉽긴한데 이런 깊이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감탄스럽기도 하더군요. 잘 생각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