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주된 의무가 보는 일이라면 그것과 비슷하면서도덜 분명한 명령도 내려지는데, 바로 보이지 않아야 할 의무이다. 보기와 보이지 않음이 결합된 레즈니코프의 등식은 포기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시인은 보기 위해 자신은 보이지 않아야 한다. 사라져야 한다. 익명성 속에서 자신을 지워야한다. - P129

희부연 겨울 아침 -나뭇가지들 사이에 박힌 초록 보석
그것이 신호등이라고 멸시하지 마라.

*
이 차가운 황혼에
다리를 건너는 당신
이 빛의 벌집들을,
맨해튼의 건물들을 즐겨라.

지하철 레일들,
너 땅속에 묻힌 광석이었을 때
행복이 뭔지 알았을까,
이제 전등 불빛이 너를 비춘다.

-레즈니코프의 시-
- P132

세상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시로 이어질 작업을(그 작업에서시가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계속해야 한다. 레즈니코프는 다른 대부분의 시인처럼 <공상에 잠긴 상태가 아니라, 눈을 똑바로 뜨고, 마음을 활짝 열고, 주위의 삶으로 들어가는 데 에너지를 집중한 채 도시를 걸어 다닌다. 주위의 삶으로 들어가는건 그가 거기서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의 역설이 시의 핵심에 자리하게 된다. 모든 문이 닫혀 있음을 알면서도 세계의 실재를 받아들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시인은고독한방랑자, 군중속의 인간, 얼굴 없는 필경사이다. 시는 고독의 예술이다.
- P134

다른 사람들이야
골짜기에 넘쳐흐르는 물이 되어
시체들, 뿌리 뽑힌 나무들, 모래밭
남기라지,
우리 유대인들은
풀잎마다 맺힌 이슬,
오늘 짓밟힌다 해도
내일 아침 다시 찾아오지.


레즈니코프는 이렇듯 유대인의 과거에 깊은 유대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유대인임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본질적 고독을극복할 수 있으리란 망상은 결코 품지 않는다. 그는 이중으로유배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으로서 유배되었고 유대교로부터도 유배되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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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2-15 2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이슬 노래도 생각나고 그러네요...잘 읽었습니다~

모나리자 2022-12-18 23:14   좋아요 1 | URL
네.. 그쵸 서곡님.^^
강추위속에 건강 잘 챙기시고 새 한 주도 따뜻한 시간 보내세요.^^
댓글이 늦었습니다.^^

서곡 2022-12-18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ㅎ 일욜밤 안녕히주무세요 ~

모나리자 2022-12-20 10:5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오늘도 따뜻한 시간 보내세요. 서곡님.^^
 

나는 당신에게 유대인의 어려움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그것은 글쓰기의 어려움과 같은 것입니다. 유대교와 글쓰기는똑같은 기다림, 똑같은 희망, 똑같은 소모이기 때문이지요.


에드몽 자베스는 1912년 부유한 이집트 유대인의 아들로태어나 프랑스어를 쓰는 카이로 동네에서 성장했다. 젊은 시절막스 자코브, 폴 엘뤼아르, 르네 샤르와 교류했고 1940년대와1950년대에 자그마한 시집을 여러권발간했는데, 거기 실린시들은 나중에 나는 나의 집을 짓는다Je bâtis ma demeure』에다시 수록되었다. 그 시점에 이르러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확고해졌지만 프랑스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널리 알려지지는않았다. - P109

 자베스가 볼 때, 먼저 글쓰기 자체를 문제 삼지 않고서는 대학살에 관해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언어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려면 작가는 자신을 의심의 유배지, 불확실성의 사막으로 추방해야 한다. 사실상 그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부재의 시학을 창조하는것이다. 죽은 사람들을 다시 살려 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말을 들을 수는 있고 그들의 목소리는 <책>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 P117

나는 나의 멋진 책상에 앉았어. 넌 그걸 모를 거야. 네가어떻게 알겠니? 사람을 교육한다는 멋진 목적을 가진 책상이지. 작가의 무릎이 들어가는 곳에 두 개의 무시무시한 나무 대못이 있어. 자, 잘 들어봐. 만약 조심하면서 조용히 앉아서 멋진 글을 쓴다면 아무 문제도 없어. 하지만 흥분을 하게 되면 - 가령 몸이 약간만이라도 흔들리면 어김없이 대못이 무릎을 찔러. 아, 정말 아프지. 퍼렇게 멍든 자국을 너에게 보여 줄 수 있다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해. <흥분시키는 것은 쓰지 마라. 글을 쓰는 동안 몸을 떨지마라> - P121

우리를 상처 주고 찌르는 책들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우리가 읽는 책이 정수리를 내려치는 타격으로 우리를깨우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걸 읽어야 하겠어? (…………)우리는 이런 책을 필요로 해. 재앙처럼 영향을 미치는 책, 우리를 깊이 슬프게 만드는 책,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같은 책, 모든 사람에게서 떨어져 혼자 숲속으로 - P121

추방된 느낌을 주는 책, 자살 같은 책.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바다를 깨트리는 도끼 같은 책. 이게 나의 믿음이야. - P122

이 짧은 쪽지들은 카프카가 쓴 모든 글 중에서 가장 슬픈내용을 담고 있다. 카프카는 꽃으로 둘러싸인 병상에 누워서두 친구의 시중을 받는다. 단편소설 「단식 예술가의 교정을보면서 죽음이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저 물을 한 사발 크게 마실 수 있다면. (.……) 작약은 너무 약하기 때문에 직접 보살펴 주고 싶어. (....……) 라일락을양지로 옮겨 놔 줘. (.…………) 어쩌면 앞으로 일주일은 더 버틸수 있을 거야. (...……) 뉘앙스란 묘한 거야. (………) 내가 당신들 얼굴에 기침을 할지 모르니 조심해. (……) 내가 당신들 - P123

을 너무 힘들게 하는 것 같아. 이건 미친 짓이야. (・・・・・・) 공포,
공포, 공포, (.……) 주된 이야깃거리가 없다면 대화의 주제는없는 거야. (……) 문제는 말이야, 내가 물을 단 한 컵도 마시지 못한다는 거야. 물론 물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좋은 일이지만. (………) 저거 멋지지 않아? 저 라일락 죽어 가면서도 물을 마시고 계속 들이켜네. (・・・・・…) 잠시 당신들 손을내 이마에 얹어 나를 격려해줘.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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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15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15 1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은 나를 삶으로부터 추방했습니다.
그러면 나를 이제 죽음으로부터 추방하시겠습니까?
어쩌면 인간은 그런 희망을 가질 자격조차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회한의 샘 또한 말라붙었습니까? - P104

만약 죄악이 더는 정화를 불러오지 못한다면죄악이 무슨 소용입니까?
육체는 한때 자신이 아주 강력했다는 것을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영혼 또한 지치고 황폐해졌습니다.
하느님, 우리의 허약함을 살펴보소서.
우리는 확신을 원합니다. - P105

보통의 시인 같았더라면 개인적 슬픔과 공포를 늘어놓은 시가 되었을 경계를 웅가레티는 명상의 힘과 통찰을 통하여 홀쩍 뛰어넘는다. 웅가레티 시는 자아를 뛰어넘는 사물로서 우뚝 선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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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초Veglia
치마 콰트로, 1915년 12월 23일

하룻밤 내내
학살당한 동료 병사
옆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위협적인 입은
보름달 쪽으로 돌아가 있었고 - P99

퉁퉁 부어오른 손은
내 침묵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사랑이 가득한
편지를 썼다.
그처럼 삶에 꼭 매달린
적이 없었다"

주세페 웅가레티의 시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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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정체성을 정면에서 파악하려고 애쓴다. 부정, 신성 모독, 아이러니가 경건한 신앙의 태도를 대신한다. 그는 정의의 형태들을 모방한다. 성경 구절들은 왜곡되고 전도되어 구절들끼리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첼란은 절망의 근원, 모든 사물에 깃든 부재에 다가간다. 첼란의 <부정의 신학>에 대해 많은 말이 있어 왔다. 그것은 시편Psalm」의 첫 연에 잘 표현되어 있다.

아무도 다시는 흙과 진흙으로 우리를 빚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의 먼지를 논하지 않는다.
아무도,

우리는 그대를 찬미한다. 아무도 아닌 자여그대를 위해 우리는활짝 피어나려 한다.
그대를향하여. - P95

아무것도 아닌 것,
우리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활짝 피어나며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도 아닌 자의 장미. - P96

 결국 첼란의 절망은 너무커져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그리하여 세상은 첼란에게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므로 더는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당신은 나의 죽음,
모든 것이 나로부터 떨어져 나갈 때
나는 당신을 붙들 수 있으리라.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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