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차원적인 인간들의 세상입니다. 그림은 먹을 수 없다. 고로 그림은 무가치하다. 돈으로는 먹을 것을 살 수 있다. 고로돈은 가치 있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먹고사는일 하나에 연연해서 몇 푼 안 되는 돈에다 모가지를 걸어놓고평생을 남의 사업만 거들다가 자기 일은 하나도 못 해놓고 죽은 사람들을 보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 P107

벽들을 조사해 보니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틈이 많이 벌어져 있었다. 새끼손가락 하나가 무난히 드나들 정도로 벌어진틈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떨려왔다. 이 상태로 나간다면 올해를 넘기지 못하리라.
나는 죽는다……….
라고 생각하니까 잔인한 슬픔 같은 것이 복받쳐 올랐다. 평생 무엇을 하며 살아왔는가. 사랑하는 사람 하나도 없이 세상의 그늘진 담벼락 아래 앉아 나는 기아(兒)처럼 살아왔다. - P117


나는 사실 대학에 대해서만은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문학반에서 활동하고 있는 급우들의 글을 대할때마다 항상 어떤 유치함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받아왔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문학은 나의 전부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열심히 쓰고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섣불리 어디원고를 던져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적어도 문학에 대해서만은 좀더 신중하고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나는 믿어왔었다. 문학이란 무엇보다도 위대한 것이기 때문에. - P119

소설이란 도대체 어떻게 써야 하는가. 나는 전혀 모르겠다.
옛날에 써놓았던 것들은 모두 태워버렸다. 모두 남의 흉내가아니면 내 겉멋 들린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야기만으로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언어와의 치열한 투쟁끝에 얻어낸 자기만의 실로써 자기만의 무늬를 놓아 비단을짜고 그것을 정교하게 바느질해서 인간에게 입혀놓았을 때, 반드시 그 인간이 어떤 의미로든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 P120

"들개를 그려놓고 보면 영락없이 집개가 되어버린단 말씀입니다. 그 사실은 나 자신이 들개라는 대상과 일체감을 느끼지못하기 때문이지요. 당연합니다. 나는 몇 년 동안 직장에서 돈과 기계와 제도 속에서 잘 훈련되어 본래의 나 자신을 잃어버리고 집개가 되어 있었으니까요. 한번 잃어버리고 나니까 되찾기가 너무나 힘이 듭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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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잘 되어질는지. 사람들은 고통 ‘끝‘에 나오는 글들이진짜라고들 말하지만 고통 ‘중‘에 나오는 글들이 진짜라고는말하지 않는다. 나는 고통 ‘중‘에 있는 것이지 고통 ‘끝‘에 있는것은 아니다. 고독이든 고통이든 극에 달하면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버린다. 내가 이런 상태로 무엇을 끄적거릴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나의 장래성이란 도저히 어떤 확신을 가질 수가없다. - P88

이제 걸어서 시내까지 당도하면 나는 몹시 피곤할 것이고그러면 오늘밤은 잠이 좀 깊어질는지도 모른다. 낮이 되면 밤이 걱정스럽고 밤이 되면 낮이 걱정스럽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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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철썩! 그러나 모기는 어느새 도망쳐버렸다. 인간이 만물의영장이라는 말은 아마도 인간의 자만심에 불과할 것이다. 모기를 보라. 얼마나 만물의 영장을 조롱하고 있는가. 만물의 영장이 제 손으로 제 따귀를 갈기는 모습을 보며 귓전에서 깔깔깔 웃는 소리. - P63

갑자기 빗소리가 쏴아 하고 기세를 높이고 있었다. 불현듯비애감이 서려왔다. 나는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또 어떻게 이 기나긴 밤과 싸워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라디오 한 대조차도 없다는 사실이 더욱 나를 참담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돈이 될 만한 것이면 닥치는 대로 팔아치워버렸었다. 라디오 한 대가 라면 열 개로 바뀌어진 지는 이미 오래전이었다. 하여튼 요즘의 내 생활이란 한마디로 곡예처럼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 P63

"여기서 너하고 하룻밤 술을 마시고 나면 나는 최소한 한달을 춥고 배고파야 한다. 사흘이라도 굶어본 적이 있어? 사흘을 굶으면 우리 동네에서 제일 먼저 밥을 짓는 집의 밥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 밥냄새는 사람을 미치고 환장하게 만들.
지. 또 골목에 나가 보면 전봇대가 모두 떡볶이로 보인다. 정말이야"
그는 웃으면서 말했지만 나는 가슴이 아팠었다. 그래서 그말을 들은 날 딱 하룻밤만 그 남자와 여관방으로 가주었었다.
배고픔이라는 것이 전봇대를 떡볶이로 보이게 할 정도로 눈물겨운 것임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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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취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글을 쓰고 싶었다. 취직을 한 상태에서는 글이 제대로 나와줄 것 같지가 않았다. 내가마지막 구원으로 알고 있던 문학, 그것으로부터 소외되어 버리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나도 옛날에는 문학에 취미가 있었지, 책도 많이 읽었고 글도 열심히 쓰기는 했었어. 녹슨 추억의 문고리를 잡고 주부 백일장에나 나가고 생활수기 공모에나 원고를 던지는 나의 모습을 나는 상상하기조차도 두려웠다. 그것은 비참하고도 처참한 일이었다. - P53

오늘은 또 무엇을 팔아야 하나…………나는 내 은거지로 돌아갈 수 있는 방향의 시내버스를 기다리며 팔아먹을 수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점검해 보고 있었다.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한없이 풍성하게 부풀어 올라 햇빛•속에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새로 따낸 목화송이를 잘 손질해서 하늘에 가득가득 쌓아놓은 것 같았다. 나는 그 푹신한 곳깊숙이 뛰어들어 끝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싶었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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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은 끝내준다.
오리를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닭발을, 닭을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오리발을 잘도 내민다. 약간 머리를 회전시켜 오리와 닭을 다 잃어버렸다고 말하면 꿩발을 내민다. 졌다.
그래도 나는 물들지 말아야 한다. 억울하다고는 생각지 말아야 한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
지금까지 교과서에 배워온 것들을 모두 버리기로 한다. 모조리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음 그 자체이다.
나는 자연스럽고 싶다.
또는 자유스럽고 싶다.
세뇌받은 진리는 결코 진리가 아니다.
교육받은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고 싶다.
그러나 학문 그 자체는 좋은 것이다. 비록 항문이라고 발음되기는 하지만 결코 똥을 누기 위한 도구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똥 같은 소리나 하면서 살아야 하는 학자들은 얼마나 가련한가. - P6

무인도(無人島):무인도(武人島)가 변해서 된 말. 서로 싸우다 모두 죽고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함.
음치(): 음계에 일부러 구속되려고 해도 저절로 자유로워지는 사람. 비 즉흥시인손: 사람이 사람의 따귀를 후려칠 때 사용하는 손목 끝부분의 부착품으로써 납작한 모양에 다섯 개의 기다란 가락이붙어 있음.
생지옥(生地獄): 인간이 있는 모든 장소.
숨바꼭질: 어른이 하면 술래가 몰래 눈을 뜨고 곁눈질을 하며 셈을 세는 놀이의 일종.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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