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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개 - 개정판
이외수 지음 / 해냄 / 2014년 4월
평점 :
이외수의 소설은 90년대에 나온 작품 『벽오금학도』를 읽은 지 실로 오랜만에 읽게 되었다. 이 작품은 초판이 1981년이고 내가 읽은 것은 2014년 출간본이다. 오래된 작품인 만큼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내용이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우리의 숙제 같은 물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수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지금까지 교과서에서 배워온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모조리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음 그 자체’라고 했다. 2년 넘게 ‘마음공부’에 관심을 두고 유튜브나 책을 접한 나로서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놀라웠다. 이미 사십 년 전에 이런 생각을 했다니 말이다. 역시 작가에게 있어 삶의 지표나 통찰력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던지게 한다.
그래서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들개 그림에 목숨을 건 남자와 문학을 자신의 전부이자 마지막으로 여겼던 여자의 이야기다. 그 남자는 말끝마다 ‘무의미’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반복해야 했던 일과 삶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일까. 여자(화자)는 글이 써지지 않아 고통스러워한다. 마치 완벽한 때를 기다리는 듯했다. 나중에는 그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조금씩 채워지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삶의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런데 왜 하필 들개였을까. 획일화된 조직사회에 익숙해져 야망과 야성을 잃고 피폐해져 가는 현대인의 삶을 담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여자는 학창시절 자신이 다녔던 폐허가 된 학원에 들어가서 혼자 살고 있었다. 유일한 가족이었던 숙부가 이민을 떠나는 바람에 혼자 남겨졌고 가난했기 때문에 그곳을 선택한 거였다. 빈틈이 보일 정도로 벽이 갈라져 곧 붕괴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면서도 거기를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흔히 사람들은 꽃이 기후가 좋은 상태에서만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생각들을 가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반드시 꽃도 고통을 견디지 않으면 아름답게 피어날 수가 없습니다. 겨울의 모진 추위, 여름의 혹독한 더위, 그런 것들에게 시달린 뒤에야 꽃은 피어납니다. 그래서 봄과 가을에 꽃이 많이 피는 것입니다.(중략) 예술가는 작품이라는 진주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라도 자기 자신의 생활에 상처를 내는 사람들입니다.”(P124)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갈 곳이 없으니 여기에서 그림을 그리겠다고 여자에게 졸라서 들어왔다. 밖에 한 발자국 나가지도 않고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다면서 여자의 출입을 금지한다. 그가 허락할 때만 들어갈 수 있다. 나중에는 대소변까지 작업실에서 해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자신도 들개가 되어간다.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자 실물 개를 사들여 먹이도 주지 않고 야성의 개로 길들여간다. 물론 여자가 일을 한 돈으로 사다 준 것이다. 여자는 글을 쓰지 않고 남자의 그림이 완성되기만을 마음을 졸이며 학수고대한다. 혹독한 환경에 자신을 가두고 굶주림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드디어 아흔아홉 마리의 들개 그림을 완성한다. 개와 교감을 나누며 그것을 그림에 담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은 신들린 경지를 느끼게 했다.
‘나는 보았다. 거기 경건하게 완성되어 있는 한 남자의 영혼을. 나는 오래도록 시선을 다른 데로 옮길 수가 없었다.
그 그림은 일찍이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가장 아름다운 또 하나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그의 유서이자 영혼의 목소리였다.’(P336)
지금도 이렇게 열악한 환경과 가난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을까. 가혹한 환경을 스스로 선택하고 오로지 들개 아흔아홉 마리를 그리기 위해 온 열정과 영혼을 바쳤다. 읽는 내내 여성 작가가 쓴 글인가 싶을 정도로 섬세한 문장에 놀랐다. 이 작품은 발표되고 70만 부가 판매되며 문단과 대중을 놀라게 했고 이외수 작가의 예민한 감수성을 엿볼 수 있는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그 남자에게 들개는 어떤 의미였을까. 아마도 편안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타성에 젖어 꿈과 목표를 잃은 자신을 깨우고 싶었던 것일까.
이외수 작가는 글을 맺은 후에, 한 줄의 시나 한 악장의 심포니, 또는 그림 따위들은 설명되거나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다만 ‘느끼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을 쓸 때마다 그것을 염두에 두며 자신의 소설 또한 설명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했다. 소설이 감상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세상에는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끝까지 영혼을 바쳐서 할 수 있을 만큼 좋아하는 일이 있는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도전하지 못하고 그저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그렇기에 더욱더 귀한 메시지로 다가왔다. 비교와 경쟁에 휘둘리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기를 멈추지 말라고, 거기에서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고 일깨워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