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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
야기사와 사토시 지음, 서혜영 옮김 / 블루엘리펀트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도쿄 여행 때 두 차례 진보초 고서점가를 다녀온 후, 언젠가 그 책방 거리를 누비면서 나날의 기억을 블로그에 연재하고 싶다는 버킷 리스트가 생겼다. 번역 수업 시간에 야기사와 사토시의 ≪모리사키 서점의 나날들≫을 알게 되고 꼭 한번 읽어봐야지 했던 책이다. 두 편의 연작소설로 구성되어 있다.
과거 시점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대략의 줄거리는 이렇다. 히데아키와 1년 동안이나 사귀고 있던 다카코는 어느 날 그가 결혼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그런 마음을 내색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던 다카코는 돌연 회사를 그만두고 실의에 빠진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10년 동안 만난 적 없던 외삼촌의 연락을 받고 그가 운영하는 모리사키 서점에서 지내면서 서서히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나아가는 이야기다.
허리 아픈 외삼촌이 병원에 다녀올 동안 서점을 봐달라는 부탁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얼씨구나 좋다며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지도 않고 아직 실연의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다카코가 곰팡내 나는 중고책 서점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몰입하며 읽었다. 아니나 다를까, ‘수면 괴물’이라고 할 정도로 잠에 빠져사는 다카코를 보며 외삼촌은 걱정한다. 어느 날 아침 다녀올 곳이 있으니 같이 가자는 외삼촌의 말에 다카코는 시큰둥한다. 앞으로 몇 시간을 자든 일절 간섭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자 할 수 없이 따라나선다. 50년도 넘었다는 외삼촌의 단골 가게라는 카페 스보루는 다카코의 기분 좋게 하였고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스보루에 다녀오고 나서 다카코는 달라지기 시작한다. 반전처럼 그동안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후회가 될 만큼 그곳을 좋아하게 된다. 데면데면하기 그지없던 외삼촌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숙맥’이라고 여겼던 외삼촌이 다르게 보였다.
돌연 집을 나가 5년 동안이나 소식이 없던 외숙모 모모코, 잔소리꾼 같았던 단골손님 사부 씨, 카페 스보루 사람들과 친해지면서 점점 마음의 여유를 찾는다. 다카코의 인생 대반전을 기대했는데 약간 밋밋한 결말은 살짝 아쉬웠다.
그래도 참 따뜻한 소설이다. 다카코를 ‘천사’라고 여기며 응원해 주는 외삼촌을 보며 겉모습만 보고 판단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뉘우친다. 자신을 그렇게 사랑해 주는 외삼촌의 마음을 이제야 알다니. 갑자기 떠났던 외숙모는 왜 돌아왔을까. 외삼촌은 모모코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다카코에게 부탁을 하지만 모모코는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다. 갑자기 여행을 가자는 모모코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 채 따라나선 다카코는 지난날의 외숙모의 아픔을 알게 된다. 다카코가 쓰라린 실연을 겪은 후 모리사키 서점에서 지낸 날들은 다카코에게 큰 자양분이 되었다. 어쩌면 모리사키 서점은 사람들을 이어주고 품어주는 장소가 아니었을까. 외삼촌은 다카코에게 오랫동안 방황했던 경험을 들려주면서 모리사키 서점이야말로 신성한 곳이고 가장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라고 했다.
“어디에 있든, 누구와 있든 자신의 마음에 거리끼는 게 없다면, 그곳이 바로 자신이 있을 장소야. 그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내 인생의 전반부가 지나갔어. 그리고 나는 이제 가장 마음에 드는 항구로 돌아와 거기에 닻을 내리기로 결정한 거야. 나에게 이곳은 신성한 곳이고 가장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장소야.”(79P)
다카코는 어느새 히데아키를 원망했던 마음을 내려놓으며 늘 ‘적당히’ 수동적으로 살았던 태도를 반성한다. 헌책들의 곰팡내가 떠도는 모리사키 서점 2층 작은 방이 그렇게 소중한 공간이 될 줄이야. 책을 좋아하고 진보초 책방 거리를 사랑하는 등장인물들이 엮어내는 따뜻한 이야기다.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곳, 자신이 좋아하는 소중한 공간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 아닐까. 모모코가 다카코에게 여행을 권유한 것도 그토록 사랑했던 이 공간으로 돌아오고 싶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