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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ㅣ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평점 :
학창시절 미술책에서 만난 뭉크의 <절규>는 아름다운 그림도 아닌 오싹한 해골이 느겨지는 섬뜩함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그림이 탄생했을까 하는 것은 생각해 볼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예전의 미술 시간은 화가들의 유파와 작품을 달달 외우며 재미없는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전부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러 고흐를 만나고 미술에 관심이 생겼다. 간간히 미술 관련 책들을 만나면서 좀 더 알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일전에 읽었던 『미술관으로 간 심리학』에서 뭉크를 만났다. 거기서 미처 몰랐던 뭉크에 대한 삶의 배경을 알게 되었고 더 많은 뭉크의 그림과 삶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닿아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P13)
뭉크가 남긴 수많은 글 중 그의 예술관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말이다.
작품 <절규>를 이해하기 위한 최적의 문장이 아닐까 싶다.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이 풍경이나 사물을 그린 반면, 뭉크는 ‘자신이 본 것, 자신의 기억’을 그리려고 했는데, 기억이란 감정과 생각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는 화가의 뜻대로 ‘해석’되고 ‘편집’된다는 것이다. 이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친숙한 예술 작품이 된 <절규>는 많은 매체를 통해 패러디될 정도로 자주 접할 수 있다. 뭉크의 <절규>는 소더비 미술품 경매 시장에서 1억 1,992만 달러라는 당시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기도 했다.
뭉크의 자취가 어린 여러 장소, 그림과 그에 얽힌 배경 이야기는 마치 저자와 그 여정을 함께 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1,2,3장에서는 뭉크가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던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 곳곳을 소개한다. 4,5장에서는 뭉크가 사랑했던 여인들과 그들과의 추억이 있는 오스고쉬트란드를 소개한다. 6,7장은 각각 베를린과 파리의 행적을 더듬는다. 베를린은 뭉크에게 큰 행운을 가져다준 곳으로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세계 화단의 중심지이자 뭉크가 유학했던 파리는 그가 진보적인 세계 미술의 흐름을 습득하고 예술적 자극을 받은 곳이다. 8,9,10장에서는 뭉크가 노르웨이의 국내외를 떠돌며 보낸 세월을 따라 그 시기에 제작한 그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11장은 노르웨이로 돌아온 뭉크가 마지막 30년을 보낸 오슬로 외곽의 에켈리를 돌아보고, 12장에서는 뭉크의 죽음 이후 이야기를 뭉크 미술관을 중심으로 풀어보는 이야기다.
불안의 아이콘이라는 대명사가 된 뭉크의 성장배경은 어떠했을까.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열세 살 때는 엄마 대신이자 놀이동무였던 누이 소피에가 목숨을 잃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또 파리 유학중에 뇌졸중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듣고 멀어졌던 관계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 힘든 현실을 종교에 매달리며 뭉크에게 엄격하게 대했던 아버지, 병약했던 자신은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 학습을 받으면서 더욱 말수가 적어지고 내성적인 아이가 되어간다. 다행히 우울했던 청소년기를 보내고 20대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지식을 접하며 새로운 환경과 자극에 몰입하며 화가로서 원대한 꿈을 꾸게 된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삶이다. 난관과 이별을 겪으며 흔들리고 비관하며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로 거리를 방황하다가 졸도를 하기도 한다. 스물여덟 살의 뭉크가 그린 <칼 요한 거리의 저녁>은 그 당시 뭉크의 심리와 태도를 잘 드러낸 그림이다.
<칼 요한 거리의 저녁>
뭉크는 같은 주제의 그림을 여러 버전으로 그리기로 유명했는데, 캔버스에 유채, 크레용 외에 판화로도 많은 그림을 남겼다.
왼쪽 작품이 <절망> 오른쪽 작품은 <절규>
1893년 뭉크의 대표작 <절규>가 나오기 전 그 토대가 된 작품이다. 그림에서 여러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점이 새롭고 재미있었다.
그림에 세 사람은 동일 인물이며 이들을 시간 순서대로 나열해놓은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단다. ‘뭉크의 노트’에 묘사한 것처럼, 길을 가다가 피오르를 바라보고, 죽을 듯 피곤하여 난간에 기대고, 그다음 비명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 ‘비명’은 ‘자연을 관통하여 들려오는 거대하고 끝없는 비명’에서 그림의 영감을 받았다는데 그 해석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림을 보니 신비스런 느낌과 함께 노르웨이의 대자연의 역동성이 느껴졌다. 제목이 ‘절규’보다는 ‘비명’이 이 그림을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된다는 해석이 흥미롭다.
불행한 가족사의 환경, 자신의 병약함으로 인한 불안 등으로 점철된 삶에서 어떻게 세계적인 화가로 우뚝 서게 되었을까 정말 궁금하다. 청년 뭉크의 멘토였던 한스 예게르와의 만남이 뭉크의 인생의 지표와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자유연애를 추구하고 기독교와 부르주아계급의 인습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하던 예게르와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이라는 모임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예술가들과 젊은 학생들이 모여 패기 넘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예게르의 주장은 혁신적이고 그만큼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뭉크는 이 그룹에서 활발한 편은 아니었지만 훗날 화단에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혁신적 예술을 선보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장소라든가 뮤즈가 되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신비스럽다. 뭉크는 평생을 홀로 살았지만 사랑했던 여인들이 있었다. 짧고 강렬한 사랑을 했던 밀리, 약혼자였던 툴라 등과 결국은 헤어지고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는 실로 대단했다.
<이별>
밀리와의 이별에 대한 상처가 얼마나 컸으면.
가슴에서 흘린 피가 떨어진 자리에 붉은 나무가 솟아난다. 등을 돌리며 유유히 떠나가는 여인의 모습.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림에 대한 느낌. 자세한 배경 이야기가 쉽게 그림을 읽어낼 수 있게 한다.
사랑의 아픔, 이별 등으로 인한 외로운 마음의 상처가 <키스>, <두사람, 외로운 이들>에 잘 드러나고 있다. 밀리나 툴라는 이후로도 영감을 주는 뮤즈로 작용한다. 반면 뭉크에게 예술적 영감을 준 장소는 오스고쉬트란드였다고 한다.
“오스고쉬트란드를 걷는 것은 내 그림들 사이로 걷는 것과 같다. 오스고쉬트란드에 있을 때 나는 그렇게 그림이 그리고 싶다”(P146)
라고 말했을 만큼 이곳의 풍경을 사랑했단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불안한 삶을 차분히 들여다보고 약간의 희망을 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림들 사이로 걷는 것’과 같고 ‘그림이 그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을 보아도 뭉크에게 있어 편안함을 주는 장소였음이 틀림없다.
<달빛>
1890년대 초반, 뭉크는 신비로운 느낌의 여름밤 바다 풍경을 집중적으로 그렸는데 미술사가 애귬은 이것을 ‘오스고쉬트란드 라인’이라고 불렀다.
<달빛>은 오스고쉬트란드 라인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풍경화다.
주로 불안, 사랑의 상처, 죽음 등을 주제로 그렸던 뭉크는 1902년 봄,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서 <생의 프리즈>를 연작의 모습으로 첫 선을 보인다. ‘사랑의 씨앗’, ‘꽃피고 사라지는 사랑’, ‘삶의 불안’, ‘죽음’,이라는 4개의 그룹으로 생명의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인간의 일생을 보여준 것이다. 여기서 뭉크는 “나는 예술로 삶과 그것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노력한다. 그래서 내 그림들이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좀 더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P220)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림뿐만 아니라 전시 기획과 디자인에서도 앞서갔던 예술가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생의 고통스러운 에피소드에 집중했던 뭉크의 인생 2막은 오슬로 대학 강당 벽화 작업을 하면서 인류와 민족, 지식과 역사 그리고 희망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 아울라 벽화는 공모 결과 당선자가 없었지만 오슬로 시는 작품대금의 반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뭉크가 오슬로 대학에 작품을 기증하는 형식으로 뭉크의 작품을 강당에 걸기로 결정한다. 강당의 정면에 <태양>이 있고, 오른쪽에 <알마 마테르>, 왼쪽에 <역사>가 있다. 이 3개의 큰 그림과 작은 그림 6개로 구성되어 있다. 오슬로 시민들에게 뭉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절규>나 <마돈나>도 많은 수를 차지하지만, 오슬로 대학 강당의 벽화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고 한다. 아울라 벽화의 완성은 오랜 해외 생활로 국내에 입지가 약했던 뭉크에게 노르웨이의 국민 화가로 만들어 주었다.
<오슬로 대학 강당의 벽화>
성공의 가도를 달리면서도 뭉크는 여전히 불안의 지옥을 살아간다.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해외와 노르웨이의 작은 해변 마을들을 떠돌다가 1916년 쉰두 살의 나이에 크리스티아니아로 돌아와 정착하게 되는데, 에켈리를 구입하고 1944년 사망할 때까지 기나긴 은둔과 고독은 여전하다. <잠들지 못하는 밤, 심적 혼란의 자화상>(아래 그림 왼쪽), <밤의 방랑자>(아래 그림 오른쪽)에는 노년이 된 뭉크의 죽음을 앞둔 불안과 외로움이 잘 드러나 있다.
불행했던 가족사, 화단으로부터 거센 비난과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 화가로 낙인이 찍히는 등 난관에도 굽히지 않고 자신만의 작품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던 뭉크의 삶과 그림에 대한 열정에 경외심이 느껴졌다. 뭉크의 많은 작품을 볼 수 있어서 충만한 시간이었고 삶의 굴곡을 잘 극복한 한 사람의 생애는 드라마틱했다. 언젠가 뭉크의 그림을 실제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감동적일까. 미술의 세계에 조금은 눈을 뜬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다.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편리한 21세기를 살고 있지만 제각각 다양한 이유로 여전히 불안하고 아프다고 한다. 뭉크의 말처럼 ‘자신의 삶을 좀 더 명확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거대한 세상의 한 가운데를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위안이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