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노래

창문 가까이 댓잎을 희롱하는 바람 소리에
너무나도 짧았던 선잠의 꿈이었네

쇼쿠시 공주 - P87

드넓은 하늘 가리킨 그 사람의 손가락 끝엔
달도 눈도 꽃들도 가을 단풍도 있네

카라쯔마루 미쯔히로 - P91

사랑 노래

너무 그리워 님 계신 쪽 하늘을 바라다보니
안개를 헤치고서 봄비만 내리누나

후지와라노 토시나리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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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수록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쥐게 된답보다 늘어난 질문이 많다. 세상 많은 고통은 사실무수한 질문에서 비롯된다는 걸, 그 당연한 사실을글 쓰는 주제에 이제야 깨달아간다. 나는 요즘 당연한 것들에 잘 놀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려 한다. - P124

그러니 만일 제가 그때로 돌아간다면 어린 제게이런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지금 네가 있는 공간을,
그리고 네 앞에 있는 사람을 잘 봐두라고. 조금 더오래 보고, 조금 더 자세히 봐두라고. 그 풍경은 앞으로 다시 못 볼 풍경이고, 곧 사라질 모습이니 눈과마음에 잘 담아두라 얘기해주고 싶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사람을 만난대도 복원할 수 없는 당대의 공기와 감촉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 P133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책을 읽을 땐 시간이든다. 하지만 그 시간은 흘러가거나 사라질 뿐 아니라 불어나기도 한다. 위에 김숙년 할머니가 말씀하신 것처럼 독서 중에는 시간끼리 접붙어 현재의 크기가 늘어나는 일이 적지 않다. 김연수 선배는 그렇게 생긴 공간의 너비를 나무 안듯 팔로 재어 그 ‘폭‘
을 우리에게 넘긴다. 문장 가까이서 볼 부비고 껴안는 대신 몸으로 잰 ‘품‘을 건넨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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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잎이여, 어지러이 흩날려 눈 가려주렴
늙음이 찾아오는 저 길이 헷갈리게

아리와라노 나리히라 - P23

매화꽃 피어 향기 나는 봄에는 어두운 산을
어둠 속에 넘어도 또렷이 알 수 있네

키노 쓰라유키 - P35

남김없이 싹, 지는 거라 좋구나 벚꽃이란 건
살아봐야 이 세상 결국은 걱정이니

작자 불명 - P43

달 보노라니 오만가지 것들이 다 서글퍼라
나 혼자만 찾아온 가을은 아니지만

오에노 치사토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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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등단 소식이 소중했던 건 그게 단순히 좋은소식이어서가 아니라 나쁜 소식과 더 나쁜 소식과훨씬 나쁜 소식 뒤 도착한 좋은 소식이어서였다. 아마 어머니에게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렇다 해도 한가계의 형편은 쉽게 펴지지 않아 어머니는 그 후로도 마음을 달래려 몇 번 더 노래방에 갔다.  - P47

부사가 있으면 문장의 격이 떨어지는 것 같고말의 진실함과 긴장이 약해지는 것 같다. 실제로 홀륭한 문장가들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부사의 위험성을 경고해왔다. 나는 부사가 늘 걸린다. - P86

부사는 동사처럼 활기차지도 명사처럼 명료하지도 않다. 그것은 실천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만날 큰소리만 치고 툭하면 집을 나가는 막내 삼촌과 닮았다. 부사는 과장한다. 부사는 무능하다. 부사는 명사나 동사처럼 제 이름에 받침이 없다.
그래서 가볍게 날아오르고, 허공에 큰 선을 그린 뒤
‘그게 뭔지 알 수 없지만 바로 그거‘라고 시치미를펜다. 부사 안에는 뭐든 쉽게 설명해버리는 안이함.
과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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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나당‘은 내 어머니가 20년 넘게 손칼국수를 판가게다. 우리 가족은 그 국숫집에서 8년 넘게 살았다. 머문 기간에 비해 ‘맛나당‘이 내게 큰 의미를 갖는 것은 그곳에서 내 정서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P10

피아노까지 놔주셨다. 나는 우리 삶에 생존만 있는 게 아니라 사치와 허영과 아름다움이 깃드는 게 좋았다. 때론 그렇게 반짝이는 것들을밟고 건너야만 하는 시절도 있는 법이니까. 어머니는 밥장사를 하면서도 인간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는 걸 알았고, 그래서 기꺼이 아무 의심 없이 딸들에게 책을 사줬다. 동시에 자기 옷도 사고 분도 발랐다. - P12

‘맛나당‘은 내 어머니가 경제 주체이자 삶의 주인으로 자의식을 갖고 꾸린 적극적인 공간이었다. 어머•니는 가방끈이 짧았지만 상대에게 의무와 예의를다하다 누군가 자기 삶을 함부로 오려 가려 할 때 단호히 거절할 줄 알았고, 내가 가진 여성성에 대한 긍정적 상이랄까 태도를 유산으로 남겨주셨다.  - P14

세계는 만날 줄 몰랐고 만날 리 없는 것들이 만나도록 프로그래밍돼 있다 했던가. 2006년에 쓰고,
2007년에 묶은 소설을, 2012년 봄 누군가가 녹음한파일로 듣고 있자니 어쩐지 오래전 멀리 부치고 잊어버린 편지를 돌려받은 기분이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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