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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5월
평점 :
공선옥 작가의 산문집『자운영 꽃밭에서 나는 울었네』를 읽은 지 12년 만에 이 소설을 읽었다. 내가 힘든 시절에 읽었던 책이고 작가의 개인적인 체험이나 가족사를 진솔하게 털어놓는 이야기라 뭉클하고 감동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당시에 메모한 노트를 들춰 보았다. 작가의 글에서는 ‘어둡고, 쓸쓸하고, 배고프고, 그립고, 외롭고, 억울하고…’ 등등 이런 느낌이 들었다고 적혀 있었다. 또 농촌에 살면서 느끼는 소박함이나 자연 속에서 얻는 충만한 행복감도 들어있다는 나름의 감상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나를 감동케 했던 말은 ‘작가는 깨끗하고 환한 방에서는 탄생하지 않는다, 습하고 어둡고 쓸쓸한 그런 방이 작가의 영혼으로 태어나기에 안성맞춤’이라고 했던 말이다. 이 말은 나에게 엄청난 용기를 주었다. 나도 언젠가는 작가가 될 것이라고 희망을 품었고... 작가가 되었다. 정말 신기하다. 사설이 길었다. 공선옥 작가의 소설을 이제야 접한 것을 반성한다.
이 작품은 80년 광주, 청춘들의 아픈 이야기이며 우리 시대의 슬픈 역사를 소재로 한 이야기다. 수선화 멤버 진만이, 승규, 만영이, 태용이, 승희, 정신이, 화자 해금이, 경애, 수경이, 이렇게 아홉 명이 펼치는 아픈 스무 살 시절 이야기다. 한창 젊음을 발산하고 꿈과 열정으로 모든 걸 태워버릴 수 있는 나이에 그들 앞에 닥친 상황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곧 두려움으로 바뀐다.
“세상 사람들은 왜 아무렇지 않지? 아무렇지 않은 것이 나는 너무 이상해.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혹시 말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먹는 물에 뭐든지 빨리 잊어먹게 하는 약이 섞여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누군가 공기 중에 누가 죽었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약품을 살포한 것은 아닐까? 나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밥먹고 웃고 결혼하고 사랑하고 애 낳고 그러는 게 이상해. 우리 식군 내가 이상하다지만 말야.”(P76)
수경이가 하는 말이다. 이 글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해금이는 매사에 좀 무디고 집에서도 존재감이 미미했다. 경애를 따라 성당에 갔다가 의도하지 않게 수선화 멤버가 되고, 지금이 계엄령 상황에 있다는 것도 늦게야 알아차린다. 유일한 친구 경애를 잃은 뒤 수경이는 크게 상심하고 몸져누웠다.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너만 난리냐고. 아픈 수경이 문병을 온 친구들에게 수경이 엄마는 냉대하고 쫓아내다시피 한다. 결국, 경애의 뒤를 이어 수경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승희 어머니의 급작스러운 죽음, 아빠 없는 아이를 낳고, 가슴 떨리는 사랑의 감정을 경험하는 등 여러 사건이 그들을 에워싼다. 해금이와 친구들은 절망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우정을 나누고 민중을 압박하는 시국에 대항한다. 해금이도 이 분위기에 동요되고 자각하고 행동을 취한다.
“빛은 어둠 속에서 나온다는 거, 아름다움은 슬픔에서 나온다는 거, 모든 행복은 고통 뒤에 온다는 거. 진짜 빛이 있고 진짜 아름다움이 있고 진짜 행복이 있다면 말야.”(p199)
‘모든 오만한 자들이, 모든 무뢰배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때까지, 견디고 견뎌서, 그 견디는 힘으로 우리가 아름다워지자고, 왜냐하면 모든 추함은 모든 아름다움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동물에서 출발한 인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인간이기에, 동물적 본능의 시간에서 조금이라도 인간의 시간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기 때문이라고, 동물의 시간에서 인간의 시간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난한 몸부림의 과정이야말로 진보의 역사라고, (중략) 오늘, 저 무뢰배의 오만이 횡행할 수 있는 이 야만의 구조, 이 동물적 상황을 나는 견뎌야 한다. 저항하기 위해 견딜 것, 아름다워지기 위해 지금은 견딜 것.(P241)
‘그러나, 모든 좋은 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행복이, 우리의 청춘이, 우리의 인생이, 우리 인생의 모든 환한 것들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이 세상에 슬픔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지속될 수 없으므로, 슬픔은 생겨나는 것이다. (p248~249)
중학생 시절 어느 날, 둥근 철모를 쓴 군인들 무리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간 적 있다. 그 후 몇 년이 흘러 직장인이 되고 나서 그 현장에서 명령을 수행한 적 있다는 남자 직원의 말을 듣고 섬뜩한 적 있다. 그 날 군인들은... 그래서 그랬구나. 권력을 앞세워 방송과 언론을 차단하고 무고한 시민들에게 만행을 저질렀다. 권력 앞에서는 희생이 따라야만 하는 걸까. 무거운 마음 지울 길 없었다. 작가는 진솔한 체험을 바탕으로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표현하며 작품 활동을 해 왔다. 이 책의 제목은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제목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나는 너무나 안절부절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중에서
그 시의 일부다. 이 책 주인공들이 살아내야 했던 ‘가장 예뻤을 때’ 잔혹했던 스무 살의 삶과 절묘하게 닮았다. 이 아픈 역사를 젊은 시절에는 쓸 엄두를 내지 못하고 30년 만에 썼다고 한다. 거의 실화를 바탕으로 쓴 이야기이고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빌어다 쓴 것인데 이 역사를 모르는 어린 작가는 “작가님 상상력이 대단하시네요.” 라고 해서 놀랐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공선옥 작가는 2000년대 용산이 80년 광주라고 했단다. 시대는 흘렀고 세상은 좋아졌지만, 아직도 어딘가에 폭력은 존재하고 있지 않을까. 또 이런 말도 했다. ‘나는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작가이고 싶다’라고. 불편한 책을 멀리하려는 독자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 같아 뜨끔했다. 다양한 층의 독자가 읽고 우리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행복한 작가와 행복한 독자만 있는 세상은 오히려 비극에 가깝다. 독자를 행복하게만 만드는 글은 설탕처럼 해롭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불화가 있어야 한다. 내 글을 읽고 불편한 사람이 있는 편이 작가로서 행복하다.”
(출처: 채널예스-80년 광주, 아픈 청춘들의 이야기를 사반세기 만에 그리다 - 소설가 공선옥
반세기를 가슴에만 품어둔 이야기가 소설이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