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딜 가나 AI라는 말을 듣게 되는 세상이다. 심지어 대통령 비서관 가운데도 AI수석이라는 직책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책의 저자는 AI를 단순히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을 넘어 외계 지성(Alien Mind)이라고 부른다(Alien Intelligence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외계인이 가지고 온 무엇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무엇이라는 뜻이다.
저자는 이 외계의 지성을 제대로, 잘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른바 적절한 학습, 이 책에서 말하는 ‘정렬’ 과정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가 잘못 정렬되면 그건 단순한 불편을 넘어 우리에게 실제적인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책 속에는 AI 전문가들이 2100년까지 AI가 전 세계 인구의 최소 10퍼센트를 “죽일” 확률이 12퍼센트라고 추정하고 있다는, 조금은 무시무시한 문장도 보인다.
한편 또 저자는 이 AI를 “공동지능”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적극 권장한다. 우리 뇌의 확장으로서 AI를 이용하자는 뜻이다. 팔의 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굴삭기를 쓰고, 시력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망원경을 사용하듯이. 그리고 여기에 도움이 될 네 가지 원칙(또는 요령)을 제시한다. 작업에 항상 AI를 초대함으로써 그 들쭉날쭉한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첫 번째 요령이 특히 눈에 들어온다.
책의 2부에서는 AI가 사용될 수 있는 다양한 영역들을 보여준다. AI는 대화 상대(사람)로 기능하기도 하고, 창작가나 동료, 교사, 코치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다만 저자는 AI가 반드시 인간의 역할을 대체하기만 할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 듯하다. 여전히 남아 있는 환각의 문제라든지, 저작권과 같은 법적인 문제도 있고.
그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지적은, AI가 정규교육 이후에 진행되는 숨겨진 견습 시스템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부분이다. 예를 들면 대학병원의 레지던트 같은 과정에서는 전문가인 교수가 수술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때로 일부를 지도 아래 맡아 해 보면서) 점차 숙련되는 과정을 갖는다. 그러나 이제 수술용 로봇이 널리 쓰이면서 굳이 보조를 받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고, 수련의는 그저 그 모습을 지켜보거나 모의수술로만 훈련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결과적으로 충분한 경험이 없이 혼자 유튜브 영상으로 수술용 로봇을 조작하는 법을 익힌 의사들이 쏟아지게 되었다. 우리의 건강과 생명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수술을 이런 의사에게 마음 놓고 맡길 수 있을까? 또는 그런 수술을 우리는 AI에게 완전히 맡기게 될까?
이와 관련된 논의를 할 때면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AI가 발달하면 수많은 직업들이 사라지게 될 것인데, 그 중에는 소위 전문직이라고 불리는 직업들이 상당수 포함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예컨대 최근 우리나라에서 가장 욕을 많이 먹고 있는 정치검찰이나 정치판사들과 관련된 사건이 나오면, 차라리 AI로 대체하라는 말이 쏟아진다.
그런데 저자는 오히려 AI가 발달할수록 전문가들이 더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AI의 결과물을 평가하려면 해당 분야의 전문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사실 AI라는 도구도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훨씬 더 생산적으로 사용할 수 있기도 하다. 실제로 기술의 발전으로 가장 먼저 대체되고 있는 것은 이른바 단순 노동 분야이기도 하다.
AI의 발달에 관한 우려와 기대를 아울러 담으면서도, 저자는 기대 쪽에 좀 더 무게감을 두는 것 같다. 과연 그렇게 될 지는 결국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 같지만, 이미 전쟁에 AI를 사용하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오는 것으로 봐도 과연 인류에게 그런 기대를 품을 수 있을 지는 불확실해 보인다.
예수가 행함과 말씀으로 하셨던 것처럼,
당신도 행함과 말로 다른 왕이 있다고,
로마 황제와 헤롯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조직하는 방법이 있다고,
검과 왕관의 나라가 아니라 또 다른 나라가 있다고
선포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당신은 실제적으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치유하는 일과 자유하게 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 톰 라이트, 『톰 라이트의 그리스도의 길』 중에서
일단 그 우람한 볼륨이 눈을 끈다. 이 크고 묵직한 책을 손에 들어 보면 이 책은 어디 밖에 나가서 읽기는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이 책은 다 읽을 때까지 내 방 책상 독서대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간만에 읽는 벽돌책.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내용은 동서양의 종교와 철학 속에서 발견되는 “황금률”에 관한 정리이다(1부와 2부). 고대 근동 지역부터 그리스, 유대교, 중국과 인도, 중동(이슬람)까지 두루 살펴본 후, 칸트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의 말과 글 속에서도 저자는 황금률(혹은 그와 유사한 경구들)을 찾아낸다. 다분히 철학을 공부한 저자의 전공적 관심과 맞닿는 듯하다.
3부에는 1~2부와 비슷한 방향성과 결로 교회 역사 안에서 황금률이 어떤 식으로 이해되었는지를 살핀 뒤, 드디어 4부에서 저자가 이 주제와 관련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낸다. 핵심은 (일반적인 황금률과 달리) 성경 속 예수님이 가르치신 황금률은 단순히 모든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법적 무엇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명령이며,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모든 말씀의 종합이요 결론”(516)이라는 것이다.
사실 분량으로 보면 결론부의 내용은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는다. 역시 이 책의 주된 의의라고 한다면 방대한 자료를 성실하게 정리해 냈다는 데 있어 보인다. 황금률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훨씬 오래되고, 다양한 지역에서 비슷한 통찰이 보였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 자연법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한 가지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특히 중국이나 인도 같은, 고대에는 고립적으로 존재했던 문명들에서도 비슷한 교훈이 발견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황금률에 관한 저자의 해석은 충분히 그럼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단 이 구절만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다른 가르침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식의 “특별함”을 읽어내려고 애쓰고 있기도 하다. 다만 “예수님의 황금률”에서 특별함을 이끌어 내는 작업과 비슷한 절차를 다른 종교나 문화권 내의 황금률에 적용해 본다면 또 어떤 결론이 나올지는 조금 궁금하다.
4부에서 저자는 황금률 문장의 어구 하나씩을 분해해 (그 자체만이 아니라) 성경의 다른 본문들에서 가져온 교리적 진술과 블렌딩해서 자신의 신학적 주장을 쌓아 올려 가는데, 사실 앞서의 “다른 황금률”들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의 작업만으로 기독교 안에서의 공감을 충분히 이끌어 낼 수 있었을 것 같지만, 이왕 꺼내 놓은 유교와 힌두교와 이슬람교 안의 황금률에 대해서는 같은 작업을 충분히 하지 않고 있으니 공정한 대우를 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온다.
나아가 황금률이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의 종합이자 결론이라는 주장도 수사적인 면에서는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어도, 과연 정말로 그러한가,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신약의 율법”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개인적으로는 책에도 언급되었던 루이스의 주장에 좀 더 공감이 간다.(다만 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이 책에서 인용된 부분은 아니다) 다양한 문명권에서 나타나는 황금률은 자연법의 존재에 대한 방증이다. 진리의 조각은 어느 한 민족이나 집단에만 집중될 수는 없다. 물론 그 진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훼손되거나 깎여져 있었고, 그 진리가 살아있는 한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을 때 비로소 온전한 회복이 될 수 있었다. 어쩌면 황금률도 그런 종류의 “회복된 진리”일 것이다.(여기에서는 저자의 결론과 일부 같은 궤를 갖는다)
일주일이 훨씬 넘는 제법 오랜 기간 동안 온 세상에 퍼져 있는 황금률을 따라가는 책 속 여행을 한 기분이다. 동서양의 고전을 두루 살피는 이런 책은 쉽게 만날 수 없으니까. 철학과 역사에 흥미가 있다면 1, 2부부터 차례대로 읽으면 될 것이고, 그런 쪽에 좀 약하다 싶은 기독교인들이라면 3부부터, 나는 이 두꺼운 책을 사긴 했는데 핵심이 뭔지부터 알고 싶다면 4부부터 읽으면 되겠다.
전체주의 통치자들은 완전한 통제를 갈망하기 때문에
큰 기능장애를 일으키는 관료제를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아렌트는 지적했다.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미치광이와 바보들”로 대체된다.
지능과 창의성의 부족이 오히려 이들의 충성심을
가장 잘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성과나 능률이 아닌 충성심이 가장 중요하기에
“급격하고 놀라운 정책 변화”가 자주 일어난다.
- 미치코 가쿠타니, 『서평가의 독서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