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

 

     일제의 패망이 점점 기정사실화 되어가던 시기, 영화 귀향정민위안부로 끌려가던 시기, 일본의 한 경찰서에는 스물여덟 살의 청년 윤동주(강하늘)가 그의 사촌이자 절친인 송몽규(박정민)와 함께 갇혀 있었다.

 

     영화는 고등학생이었던 윤동주가 서울과 일본을 거치며 겪었던 약 10여 년의 시간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2. 감상평 。。。。。。。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윤동주보다 송몽규가 더 주인공 같다고 말한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적당히 하는 것 같은데 또 매번 뛰어난 결과를 낸다. 그렇다고 아주 오만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닌 그의 캐릭터는 딱 사람을 주변에 불러 모으기에 최적화 되어 있다. 실제로도 영화 속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함께 한다.

 

     반면 영화 속 윤동주는 모든 면에서 그런 송몽규와 다르다. 그는 혁명을 기다리는 몽규와 다르게 시를 쓰는 사람이고 싶어 했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기 보다는 그냥 조용히 혼자 책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기껏 써 놓은 시조차 부끄러움에 발표하지도 못하니 말 다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뭔가를 하기 보다는 몽규가 가는 길을 그저 따라가는 모습처럼 보이고, 그마저 결과는 몽규만큼 나오지도 않으니.. 이건 딱 서브 캐릭터.

 

     보기에 따라서 윤동주라는 캐릭터는 송몽규와 대립되는 것 같기도 하고(라이벌 관계), 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후자 쪽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둘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고, 몽규는 몽규대로, 동주는 동주대로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 청년으로서 의식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썼을 뿐이다.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엮어서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려는 건, 어쩌면 후세 사람들의 교만일지도 모른다.

 

 

 

 

     감독과 프로듀서는 윤동주의 시를 적절하게 재배열해 그의 삶의 순간들과 연결 지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아름다운 구성이다. ‘작품이란 건 이런 예술적인 노력에 붙여 주어야 하는 이름일 듯하다. 알라딘 서재의 어떤 이웃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발표된 시의 연대와 영화 속 시간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몇 군데 있음을 알아차릴 능력이 되지 않는 나로서는, 딱히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윤동주는 너무나 불안한 시대를 살다 갔다. 그가 써 놓은 시어 하나하나를 분석해 가며 반제국주의적 의식을 찾아내 고발하려 했던 일본고등경찰의 태도는 그 시대의 단상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것과 너무나 비슷한 악취가 오늘날 이 나라의 권력자들과 그 졸개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비상시국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통치자가 존재한다면, 그게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다를 바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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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즐기기 위해서 세상을 이용하지만,

악인들은 반대로 세상을 즐기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려 한다.

 

-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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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본 책과 영화.

 

책은 일곱 권이지만,

전부터 계속 봐왔던 것들을 끝낸 게 세 권, 가벼운 소설 두 권이니

그다지 많이 봤다고 할 수는 없다.

 

가지고 있는 영화할인권, 무료관람권 소비를 위해

막판에 영화를 몇 편 몰아봤다.

 

그나저나 다이어리를 보니

월요일에 뭘 많이 봤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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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전세가 불리해지면서 일본군은 광란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거창의 한 시골 마을에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끌려갔던 열네 살의 정민(강하나)은 다른 소녀들과 함께 중국의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 지옥 같은 삶을 경험한다.

 

    ‘위안부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역사의 증언.

 

 

 

 

2. 감상평 。。。。。。。

 

     볼까말까 고민을 많이 했다. 아무래도 불편할 것 같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불편한 증언들, 불편한 질문들, 불편한 사건들을 피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어떻게든 세상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고, 더더욱 그 불편함을 저항하지 않는 사람들은 더욱 큰 불편함을 겪게 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지 않던가.

 

     영화를 제대로 본다면 당연히 할 말이 많아진다. 하지만 이미 여러 사람들이 해 놓은 말에 또 비슷한 말을 길게 덧붙이지 않는 게 좋겠다 싶다. (쓰다 보면 한없이 길어질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감상평은 그냥 몇 개의 요약적인 문장으로 대신한다.

 

1.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 피해에 대한 제대로 된 배상과 사과를 하지 않았으므로, 일본은 (적어도 우리나라에 있어서만큼은) 여전히 전범국이다.

2. 이런 역사는 잊히지 않도록 계속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기억되도록 하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다.

3. 이 영화의 제작과 상영, 개봉관을 둘러싼 이슈 등을 보면, 이 나라에서도 점점 시민들이 자신들의 힘을 자각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 같다.

4. 박근혜 정부는 이 영화를 단체관람하고 일본군 위안부피해자 관련 재협상에 나서야 할 것이다. 미국이 강요해서 협상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면, 그 미국을 지렛대로 이용해서 일본으로부터 제대로 받아냈어야 하지 않은가?

 

 

 

 

     서울 광진구의 한 일본인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70대의 노() 목회자는 일본에서 청년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그들을 데리고 과거 일제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끼친 피해를 떠올릴 수 있는 장소를 방문해 그 후손으로서 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그 한 명의 노력이 무슨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경제논리로 피해자들에게 일방적인 용서를 강요하는 우리나라의 얼빠진 몇몇 인사들보다는 미래를 위해 더 나은 행동을 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양국의 이런 양심적인 인물들이 함께 힘을 모을 수 있다면, 좀 더 빨리 제대로 된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덧. 굳이 더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영화의 주제는 분명하지만, 구성이 그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짜였는가 하는 부분은 아쉬움도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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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밤 믿음의 글들 322
C. S. 루이스 지음, 홍종락 옮김 / 홍성사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요약 。。。。。。。

 

     루이스가 생의 후반기(여기에 실린 글은 모두 1955년에서 1959년 사이에 쓰였다)에 썼던 일곱 편의 글들을 엮었다. 책 제목인 세상의 마지막 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의심에 관한 대답을 담은 마지막 글의 제목에서 따왔는데, 사실 나머지 글들에서도 이런 종류의 의심에 대한 설명과 대답이 한 축을 이룬다.

 

     이 책의 다른 한 축은 당시 사회상에 관한 비평이다. 루이스는 당시 소위 교양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패거리문화의 천박함, 교육과 직업(), 개발 이면에 감춰진 착취의 역사 등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고발한다.

 

 

2. 감상평 。。。。。。。

 

     확실히 만년에 쓴 글들이기 때문일까. 각각의 글이 실제 쓰인 연도를 알기 전에도, 이전에 읽었던 글들과는 좀 다른 느낌을 받았다. 논리의 틀은 좀 더 분명하게 보이고, 무성한 나무처럼 뻗어나가던 설명들은 좀 더 정돈되었다. 덕분에 짧지만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문제의 본질까지 깊숙이 들어가면서도 두루뭉술하지 않은 결론까지 이끌어 내는, 탁월한 글을 볼 수 있다.

 

 

     루이스는 기도의 본질을 신적 인격에 대한 요청으로 정의한다. 그렇다면 기도응답의 비밀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상대가 인격체일진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내는 요령을 생각한다는 것이 과연 적절한 일일까. 소위 기복신앙은 이 관점에서 보면 인격적인 하나님을 부정하는 불신앙과 다름없어 보인다.

 

     기도의 본질은 내가 요청하고 있는 상대에 대한 신뢰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일견 증거와 상관없이 믿는 행위를 지속하는 모습이 결코 비논리적이지 않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루이스는 이 책의 두 번째 글에서 이 부분에 관해 의견을 더한다.

 

 

     중간에 배치되어 있는 세 편의 글은, 사회의 여러 분야에 대한 루이스의 폭넓은 식견이 돋보이는 부분. 루이스의 글은 이렇게 단지 기독교회만의 성장이 아니라, 좀 더 좋은 사회를 이루기 위한 고민이 빠지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글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런 제안들이 딱딱하게 이어지는 게 아니라 생기발랄하다. 적지 않은 나이에 쓴 글임에도 비유는 살아 있고, 덕분에 재미가 있다.

 

     예컨대 5장인 종교와 우주개발은 외계인의 존재가 기독교 신앙에 발생시킬 수 있는 문제들을 다룬다. 루이스는 이 안에서 인류가 외계의 순수한 생명체를 오염시킬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과거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정책을 폈을 때 보였던 범죄들을 상기시킨다. 신학적 논의가 실제 세계에서 벗어난 현학적인 말잔치로 치닫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드는 균형 감각이란 이런 게 아닐까.

 

 

     완숙한 루이스의 신앙적 사고를 만날 수 있는 작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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