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적당히 타협하고, 때로는 거래도 마다하지 않는 강력계 형사가, 정보를 제공해주는 대가로 자신의 살인을 무마해 달라는 요구에 넘어가면서 곤경에 빠진다는 이야기다. 영화 포스터에 쓰여 있는 'Who is the beast?'라는 문구는 잔혹한 살인을 저지른 범인과 그를 잡기 위해 살인을 눈앞에서 보고도 묻고 넘어가려는 형사 사이에 도덕적으로 큰 차이가 없지 않느냐는 물음을 담고 있다.

 

     ​괴물을 잡기 위해 괴물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이런 종류의 수사물에서 익히 사용되는 관용구 같은 것이라, 중심소재만으로 특별함을 보이기엔 처음부터 어려웠다. 그렇다면 확실한 연기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구성력 같은 부분에서 차별화를 보였어야 할텐데... 감독이 처음에 어떤 걸 떠올리면서 영화를 만들었는지 감이 안 잡힌다

 

     ​영화는 거의 상영시간 내내 어두운 분위기의 영상으로 진행되는데, 나름 옛 범죄영화들을 떠올리게도 하지만, 구성이 워낙에 산만해서 좀처럼 몰입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영화 정보에 주연이라고 소개되는 최다니엘이 맡은 종찬 역은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처럼 보이다가 갑작스레 죽어버리고, 이상민이 맡은 주연 정한수라는 캐릭터는 영화 속 동료인물들에게만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도 불친절한지라, 그의 수사방식도 잘 와 닿지 않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있다. 고대 함무라비 법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지만, 거기에는 신분에 따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해서 가해자가 피해자보다 신분이 높은 경우 정확히 동일한 수준의 처벌(혹은 보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 정확한 문장은 구약성경 레위기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정의에 대한 원초적인 감각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이 표현이 오늘날까지도 널리 사용되는 건, 그 안에 담긴 간명하고 분명한 정의의 개념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우리 안에 있는 분노와 결합되면서 쉽게 변질된다. 그 결과 보복의 강도는 훨씬 더 커지고, 처벌에 이르는 과정에서도 부적절한 상황들이 벌어지곤 한다. 악에 대한 분노가 지나쳐 또 다른 악을 도구삼아 그 악을 처벌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이제 우리는 누가 괴물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악인을 잡는다는 건 사회 전체에서 악의 절대량을 줄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인데, 그 자신이 또 다른 악인이 되어버린다면 애초부터 총량에는 변화가 없어져 버리는 셈이다.

 

     ​때문에 예수는 이 규정을 인용하면서 새로운 원칙을 세운다. 차라리 악한 이를 대적하지 말고, 네가 가진 것을 내어주어라.(5:38-42) 성경은 비폭력 평화주의의 근원이다. 사실 이건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본성에 배치되는 명령이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기 재세례파에 속한 이들은 그 절대적 평화주의가 어떤 모습인지를, 엄청난 피해를 감수하면서 직접 보여주기도 했다. 덕분에 그들은 유럽에서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

 

 

 

 

     흔히 비폭력 평화주의를 나약한 사람들의 변명 정도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이상을 위해 일주일만 살아보더라도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우선은 우리 안에 있는 충동과의 지난한 싸움이고, 악에 대항해 스스로 악이 되지 않으려고 하는 진지하고 강한 노력이다. 평화주의는 순간적인 낭만이나 이상주의가 아니라 매우 굳은 결의와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영화 속 한수는 사실 어정쩡한 자세로 춘배의 계획에 말려들어간 면이 있다.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을 갑자기 접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적인 결정에서 그는 범인을 잡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살인 사건에 눈을 감아버린다. 하지만 이건 사람이 악을 수용하고 이에 동화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주는 예이다. 대단한 의지가 아니면, 우리는 악으로 악을 갚으려 하게 된다.

 

     ​괴물이 되지 않고 살아가기가 갈수록 힘들어지는 듯하다. 여기엔 다분히 자극적인 뉴스거리만 찾아다니는 언론사들도 한 몫을 하고 있겠지만, 우리 안에 있는 악함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고찰이 사라져버린 상황이 보다 중요한 것 같다. 물론 이건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고....

 

     우리가 언제라도 괴물이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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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을 때

사진 보정 앱을 이용하는 것이 거의 필수가 됐다.

사진을 찍고 보정하고를 반복하다 보면 사진첩 속에는

내가 나라고 기억하고 싶은 모습들만 남게 된다.

내가 나라고 믿고 싶은 것만 남기는 마음,

저마다의 기억도 이처럼 보정되고 삭제되는 것이 아닐까?

- 정문정,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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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의 영성
라일 도싯 지음, 오현미 옮김 / 진흥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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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C. S. 루이스라는 인물을 다루고 있지만, 전기(傳記, biography)는 아니다. 보통 그의 출생부터 죽음까지의 생애를 시간 순서대로 다루면서 루이스를 소개하는 책들이 많은데, 이 책은 루이스의 삶 가운데 한 부분(영적인 부분)을 골라내서 주제별로 모아 보여주고, 어떻게 루이스가 그런 영적 성숙에 이를 수 있었는지를 탐색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루이스는 회심한 이후 평생 기도에 힘썼다. 그에게는 기도를 요청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의 기도목록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기도해주어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서 힘이 든다는 고백은 그가 기도하겠다는 말을 단순히 인사치레로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기도에 관한 루이스의 다양한 생각들을 엿볼 수 있는데, 특히 기도문의 사용에 관한 내용이 인상적이다.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는 것 또한, 루이스에게는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성경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기고,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도 권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성경을 읽었고, 특히 다양한 역본을 비교해 가며 읽으면서(이 중에는 그리스어 역본도 있었다) 번역의 정확성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성경의 영감, 그 중에서도 특정한 책들이 지니는 문학으로서의 성격에 대한 루이스의 생각이 흥미롭다.

 

     루이스의 다양한 저작들을 통해 발견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주제는 교회’, 특히 제도로서의 교회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인식이다. 루이스는 정기적으로 예배에 출석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신앙생활에서 중요하게 여겼다. 갈수록 교회 안에 있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약화되고 있는 오늘날, 특히 소위 가나안 교인들을 루이스가 본다면 뭐라고 조언해 줄까.

 

 

     ​저자는 루이스의 영적인 성숙에 도움을 준 친구들과 특히 멘토의 역할을 했던 영적 스승이 있었다고 말한다. 신앙은 혼자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출생을 하는 것처럼, 어떤 이들에 의해 낳아지고, 양육되어가는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좋은 친구와 지도자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생각하게 된다.

 

     ​한편 루이스는 또 다른 이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 역할을 기꺼이 감당했다. 강연과 강론, 저작활동과 무엇보다 편지교환을 통해, 그는 일생동안 이 사명을 수행했다. 그 자신이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신앙에 이르렀기에, 다른 이들이 믿음을 갖고 굳게 설 수 있도록 돕는 일은 당연한 사명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사실 루이스의 삶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이 공동체에 관한 의식이다. 그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고, 그 자신은 여러 그리스도인들의 도움을 받아 영적인 성숙을 해낼 수 있다고 믿었고, 또한 다른 이들의 성숙을 위해 기꺼이 지칠 때까지 도움을 주려고 애썼다. 하지만 개인주의화 된 신앙생활에서는 그저 내가 하나님을 만나 복을 받으면 끝일뿐이다. 관계맺음은 귀찮은 것이 되어버리고, 내 것은 아무 것도 내어놓지 않거나, 심지어 나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려지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루이스를 비롯한 많은 신앙의 영웅들이 고백하듯, 공동체는 신앙을 자라게 하는 모판이다. 신앙을 단순히 지적 동의 정도로만 여기는 거라면 몰라도, 몸과 마음의 전적인 방향 전환과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공동체에 굳게 뿌리박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비슷한 책들을 몇 권 본 적이 있지만, 이 책은 루이스가 한 말이나 그의 교훈 이전에 C. S. 루이스라는 사람에 좀 더 집중하면서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의 루이스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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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율법(말씀)이 달다는 것은

어쩌면 그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을 때의 느낌 아닐까 싶다.

선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해방되면,

우리는 선한 일을 할 자유를 누리게 된다.

- 제라드 윌슨,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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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고양이 델마 나의 아름다운 고양이 델마
김은상 지음 / 멘토프레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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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고양이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화자가 있다. 음울한 분위기 가운데, 좁은 방바닥에 누워서 아무 의욕도 없는 듯한 인물의 모습이 강하게 떠오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설은 화자의 과거 이야기를 풀어내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에게는 네 명의 여자들이 있었고 공교롭게도 그 여자들은 (한 명만 빼고) 모두 고양이와 함께 있었다. 한 남자를 둘러싼 네 명의 여자와 네 마리의 고양이이라는 구도인데, 다분히 인위적인 느낌을 주는지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듯싶다.

 

 

     사실 그런 구도보다 더 이야기를 답답하게 만드는 건, 주인공의 성격이다. 관계에 있어서 좀처럼 주도성을 보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끌려 다니기만 하는 모습, 어린 시절 만났던 경화와의 인연이야 나이가 어려서 미숙했다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뻔히 어장관리를 하는 게 보이는 여자 친구에게도(기껏 보자고 해서 일을 취소하고 부산까지 내려갔는데, 집에 있는 고양이가 걱정된다며 바로 올라가자는 여자가 정상인가) 질질 끌려 다니다 파경을 맞고,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는지 거래처 직원의 전 여자친구에게 무작정 운명 운운하며 들이댄다.(그래도 이 말미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으니 좀 다를까)

 

     이 모든 이야기의 배경에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있었다. 일찌감치 이혼을 하고 (그 덕분에 화자는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보내야 했다) 홀로 아들을 키우는 슈퍼맘이었지만, 유부남과의 부적절한 관계로 인해 모든 것이 망가지게 된 어머니, 그런 어머니는 관계에서 생긴 트라우마가 나머지 여자들과의 관계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었다는 설정이었던 걸까.

 

 

     여자 친구와의 연애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자기를 종이접기처럼 접고 또 접다가 결국에는 점이 되어버렸다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사실 화자는 여자친구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게 스스로를 점으로 만들어버리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유일하게 자신감을 갖고 대할 수 있었던 것은 고양이였고, 사고로 고양이가 죽으면서 스스로 고양이가 되고 있다는 망상에 빠져버린 것일지도.

 

     ​그런데 관계에 미숙하다는 건 무슨 큰 벌을 받아야 하는 잘못이 아니지 않은가? 이리저리 부딪히고 부서지면서 화자의 생각은 한 없이 깊어져 간다. 용케 깨지지 않았구나 싶을 정도로 섬세한, 혹은 민감한 영혼을 가진 건 비난받을 이유는 아니다. ‘의 차이에 그토록 민감하고 깊게 반응할 수 있는 이라면, 차라리 시인이 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사(애정)으로 인생을 설명할 수 있다는 식의 환원주의가 불편하다.(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생은 그런 식으로 단순화하기에는 훨씬 더 복잡하고, 많은 변수가 있으니까. 뭐 나이를 먹어서 그런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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