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은 저항이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규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 요약 。。。。。。。

 

     저자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안식일 규정이 단순히 하루를 쉬며 기력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안식일은 끊임없는 노동과 그 근본 동기로서의 탐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착취, 그 결과로서의 불안이라는 파괴적인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자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책의 결론은 당연히 안식일의 회복이다. 물론 이건 모 유사기독교단에서 주장하는 것 같은 식의 율법주의적 안식일 준수와는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 성경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안식의 참된 의미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분야에 확산시킴으로써, 앞서 언급했던 무한경쟁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저항해 나가야 한다는 것.

 

 

 

2. 감상평 。。。。。。。

     언젠가부터 아무 일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죄가 되어버렸다. 학교를 가지 않는 청소년은 문제아가 되고, 직장에 들어가지 못한 젊은이는 잉여로 전락했다. 회사에서 일찍 퇴직하게 된 중년들은 조롱과 자조의 대상이 되었고, 은퇴한 노인들은 부담으로 여겨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국가경제를 측정하는 통계수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입에 국민소득 몇 만 달러,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 하는 수치들이 자주 언급되더니, 그 수치들이 가리키는 실제 사람들의 삶보다 이런 숫자들이 더 중요해져버린 것 같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3, 4만 달러가 되어도, 물가가 함께 올라가고, 불공평한 분배와 특권층에 대한 특혜가 일상화되면 대다수의 삶의 질은 낮을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간단한 생각은 이단으로 몰린지 오래다.

     여기엔 낙수효과라는 거짓 교리와 일중독에 대한 찬양이 더해지면 완벽한 하나의 종교가 된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에서 이는 분명한 우상숭배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강력한 적은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물신숭배다

 

 

     잘 알려진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은 이 책에서, 이런 현대의 우상숭배를 깨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안식일 준수라는 오래된 전통을 꺼내든다. 더 많은 일을 통해서만이 자아를 확인받을 수 있다는 거짓 주장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하나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날인 안식일에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한 폭력과 착취가 들어설 자리가 이 날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안식일에 담긴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의미를 매우 상세하게 분석해내고 있다. 우리는 일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쉼을 통해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존재인 것 같다. 책은 꽤나 흥미로운 내용으로, 그리 많지 않은 지면에 아주 빽빽하게 저자의 통찰이 담겨 있다

 

 

     다만 이 책에서 분석해 내고 있는 사회, 경제적인 정황이 성경시대의 그것보다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은 남는다. 저자는 명백하게 두 개의 시공간(고대와 현대)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서술을 진행하고 있는데, 자칫 시대착오적인 설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현대주의적 성향이 강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자주 이런 오류에 빠지곤 한다) 이 점은 성경 시대의 삶의 정황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으로 보완될 수 있는데, 물론 저자가 저명한 구약학자라 이 부분에서 큰 오류가 있다고 보기엔 어렵지만, 확실히 아쉬운 감도 있다.

 

     또, 번역 부분에는 아쉬움이 좀 생긴다. 사실 이 가벼운(내용이 아니라 분량이) 책을 읽는 내내 뭔가 불편함을 느꼈는데, 문제는 문장이었다. 원래의 영어문장 자체가 어려웠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번역된 문장 역시 소위 번역투인 경우가 너무 많아 대충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머리에 안 들어오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물론 번역이란 게 쉬운 일이 아니란 점은 백번 이해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하철에서 보고 찍어 온 전단.

 

누가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기발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세이빙 다빈치 - 세속주의 문화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답변
낸시 피어시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약 。。。。。。。

 

     전작인 완전한 진리에서 사실과 가치를 서로 다른 인식의 층에 각각 가두어 놓으려 했던 현대의 세계관들을 날카롭게 분석해 냈던 저자는, 이번 저작에서는 이 분리가 단지 이론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어떻게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주목한다. 저자에 따르면 소위 세속주의는 이미 강단을 점령했고, 그곳에서 배운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그 영향력을 날마다 확장시키고 있다.(1~3)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미술과 음악 등 예술 분야에 나타나고 있는 이층적 세계관의 모습을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 덕분에 서양 예술사의 각 시대를 풍미했던 주의들이 왜 등장했으며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일종의 예술사책의 기능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건 역시 각각의 사조들이 가진 한계와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세계관을 분석해내는 장면이다.(4~9)

 

     현실을 제대로 반영해내지 못하는 이층적 세계관은 인식론적 분열증을 일으킨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서양 예술사의 여러 사조들이 끊임없이 앞서의 것들을 부정하며(대개 이들은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을 강조하곤 한다)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고 애써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문화와 예술을 읽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끌려다닐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세속주의에 넘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소극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실재를 제대로 반영하는 세계관에 근거한 예술 활동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도 이런 안목은 필수적이다.

 

 

 

2. 감상평 。。。。。。。

 

     낸시 피어시 여사가 다시 한 번 일을 냈다. 이 책은 미학을 다루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세계관을 분석함으로써 보통의 분석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까지 들어간다. 수많은 컬러 도판들(이 책의 가격이 겨우 3만원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은 본문의 적절한 예시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는 미술관의 기능까지 하고 있다. 철학과 예술 사이의 관계를 이토록 튼튼하게 엮어낸 작품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다. 소위 난해한현대미술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몇 달 전 한남동의 리움 미술관에 갔던 적이 있었다. 가장 위층부터 차례로 한 층씩 내려오면서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던 중, 2층과 3층 사이에서 아주 극단적인 분위기의 전환이 있다는 게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한 눈에 느껴졌다. 2층부터는 본격적으로 현대의 추상주의적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키를 훨씬 뛰어 넘는 거대한 화폭에 알 수 없는 무늬와 색채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옆에 적혀 있는 안내문을 봐도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왜 삼성에서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85억이나 주고 구입했다던 만화 같은 그림(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었다)이 왜 그렇게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는지도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사람은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아마 나 같은 사람들이 예술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갖고 있는 감정은 그 비슷한 무엇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두려움은 날려버릴 수 있게 된다. 쫄 것 없었다. 그들은 그림이나 선율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을 뿐이고, 말과 글로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볼 때처럼, 그들의 주장을 읽어낼 수 있으면, (그리고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반박도, 비판도 할 수 있다. 남들이 좋다고 해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데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맞장구를 칠 필요가 없는 거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미학을 공부하고 문학과 예술의 언어를 읽는 법을 배우는 이유는, 단지 딱지를 붙이고 빈정거리기 위해서는 아니다. 더 나은 것을, 더 실재를 잘 반영하고, 일상적인 것들의 가치를 더 잘 빛낼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런 부분에 주목해 보자면, 나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한참 부족한 상황이고.

 

     이 책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듯, 미술과 음악 속 메시지를 읽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물론 전세는 많이 기운 상황이지만, 아직 낙동강 전선이 유지되고 있다면, 반전의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선한 선택은

다음에 또다시 선한 선택을 하겠다는 내적인 결심을 강화시킨다.

반면 모든 악한 선택은

그보다 한층 더 악한 선택에 마음이 기울게 한다.

 

- 데이비드 다우닝, C. S. 루이스와 나니아 나라 이야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줄거리 。。。。。。。   

 

     부동산 사업으로 떼돈을 번 데미안(벤 킹슬리). 그러나 불치병에 걸려 이제 남은 생이 채 6개월도 남지 않았다. 어느 날 그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기억을 건강한 새 육체에 이식시켜 두 번째 인생을 살게 해 주겠다는 것. 살면서 거의 모든 것을 이룬 데미안으로서는, 이제 남은 욕심은 불멸에 대한 욕망 뿐 아니겠는가. 결국 그는 시술에 참여하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그렇게 또 다른 데미안(회춘한 데미안은 라이언 레니놀즈)으로 신나게 살고 있을 무렵, 두통과 함께 자꾸 이상한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갔던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고, 곧 숨겨졌던 거대한 규모의 음모가 전모를 드러낸다. 알고 보니 실험실에서 배양을 통해 만들었다던 새 육체는 멀쩡하게 살던 다른 사람의 육체였던 것이고, 문득문득 떠오르던 기억은 그의 새 몸의 원래 인격이 가지고 있는 것.

 

     진실을 감추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과, 일단 살인은 막고 보자는 주인공 사이의 추격전.

 

 

 

이 양반이 죽어가고 있는 주인공.

 

 

2. 감상평 。。。。。。。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걸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면 별 고민이 없겠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또 그런 게 아닌가보다. 중국의 수많은 황제들이 불로장생할 수 있는 약을 찾아다녔고, 서양에서도 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대중문화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이 영화로도 제작되어 왔다.

 

     이 영화 역시 그런 꿈을 담고 있는데, 앞서 나왔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과정이 마냥 행복하게 그려지지만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영원히 사는 게 인류 최후의 소망이라면, 막상 영원히 사는 모습이 이렇게 불행하게 묘사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아마도 이제까지 영화 속에서의 영생은 늘 상 다른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점점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인류지만, 아직 다행이도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번 영화는 그런 디스토피아를 아주 제대로 정면에 내세우고 있다. 돈 많은 부자의 영생을 위해 건강하고 젊은 (하지만 가난한!) 누군가의 몸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설정은 매우 충격적이지만, 슬프게도 꽤나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는 소재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부자들의 나라가 되어가는 건 이즈음 거의 전 세계적인 공통적인 현상이니까.

 

 

 

 

     영화 속 영생이 가능한 희대의 치료법을 발명한 교수는 이 작업에 매우 거창한 이유를 덧붙인다. 세계사 속에서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이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인류는 훨씬 더 발전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 과정에서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 예로 등장한다.

 

     이 말만 들으면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계획이란 게 언제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던가. 필연적으로 어느 순간 온갖 종류의 실천적 이유(그렇게 조성된 연구기금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식의)를 가져다 대면서 결국 돈 있는 사람들을 위한 혜택 쪽으로 넘어갈 가능성은 처음부터 높았다. 심지어 영화 속 주인공도 그저 부동산개발업자였을 뿐이 아니던가. (물론 부동산개발이라는 사업이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무슨 거창한 이유도 결국 삼켜버리고 자기 뜻대로 끌고 가는 걸 보면, 돈이라는 녀석의 힘이 엄청나긴 한가보다. 결국 무슨 기술이 발명되고, 발전하더라도 이 세상에 유토피아가 세워질 일은 절대로 없다는 거. 훨씬 근본적인 부분에서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으면 말이다.

 

 

 

 

 

     영화적인 면만 보면 겨우 나쁘지 않은 수준을 벗어난 정도. 이 설정을 가지고, 감독은 겨우 추격전을 만들어낼 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소해 나갈까가 궁금했는데, 그 궁금함이 허망해질 정도. 이건 뭐 예산 문제라기보다는 상상력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솔직히 왜 주인공이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박사를 죽이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지도 확실치 않다. 마지막 장면은 어느 정도 예상까지 됐고.. 생각할 거리는 던져주었지만, 딱 거기까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