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사람끼리만 모이는 것, 다르다는 이유로 균열되는 것은 인간이 타락한 결과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중심으로 연합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증거이다.

- 제라드 윌슨, 『세상이 흉내낼 수 없는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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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이슬람을 어떻게 볼 것 인가 - 종교개혁자들이 바라본 이슬람
유해석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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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가장 먼저는 마르틴 루터, 장 칼뱅(책에서는 칼빈으로 표기), 불링어(책에서는 불링거로 표기)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이슬람교에 대해 했던 발언들, 저작 속 내용들을 정리하는 부분이다. 종합하면 당시 유럽의 기독교계의 부패상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이슬람교도들의 종교적 열심에 대해서는 일부 호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교리상의 문제점을 강력한 어조로 비판했다.

 

     ​책의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사실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2부에서는 이슬람 국가 안에서 살았던 기독교인들(딤미)이 어떤 핍박을 받으며 살아왔었는지 잠시 설명한 뒤, 할랄 제도가 갖는 신학적 함의로 넘어간다. 하지만 딤미에 관한 논의는 주로 오래 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할랄은 현대적 의의에 집중해 구성상 매끄러운 연결은 아니다.

 

     ​3부는 최근 들어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보고로 시작한다. 나아가 선교사 경력을 갖고 있는 저자답게, 이슬람교 선교를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제시한다

 

  

2. 감상평 。。。。。。。

 

     ​어떤 책을 낼 때 일반적으로 상정하는 목표가 세 가지 있다. 1) 새로운 정보 전달, 2) 저자의 주장 설득, 3) 작가의 감동/감상 전이가 그것. (오로지 개인의 만족을 위한 출판이라면 논외다.) 이 책은 이 중에서 어떤 것을 목표로 했을까? 대략 1)에 집중을 하려 했던 것 같지만, 여기에 충실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저자 자신의 주장을 덧붙여 가며 2)의 영역을 더해버린다. 물론 이 둘이 좋은 구성 아래 적절히 조화가 된다면 나름 성과를 낼 수 있겠지만, 그런 게 쉽지는 않다

 

     ​이 책이 갖는 비교우위는 종교개혁자들의 이슬람교에 대한 관점을 잘 정리해 내고 있다는 부분이다. 이런 내용은 다른 책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점을 좀 더 부각시키려면 책의 제목과 부제가 서로 바뀌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 ‘종교개혁자들이 바라본 이슬람이 제목이 되고, ‘기독교는 이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부제로.

 

     ​책의 주요 논지 가운데 하나가 종교개혁자들이 이슬람을 이렇게 생각했기에, 기독교는 이슬람교를 그대로 생각해야 한다는 식인데, 이 논제는 반론의 여지가 많다. 우선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모든 주장이 옳다고 믿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의 주장을 잘 정리해서 소개하는 데에만 힘을 쏟았더라도 책의 평점은 1점 이상 올라갔을 것. 그 뒤에 저자 자신의 주장을 부록처럼 덧붙였더라도 괜찮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구성 면에서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이슬람교도들을 무작정 적대하기 보다는 친구로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기독교가 가진 독특성을 전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기억해 둘만하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의 제목이 어느 정도 어울리지만, 전체적인 분량이라든지 하는 부분으로 보면 앞서 내 제안처럼 가는 게 좀 더 나았을 듯. 물론 더 중요한 문제는 책의 방향성을 좀 더 분명히 하는 것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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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무슨 웹페이지에 들어가서 뭘 하나 눌렀다가..

랜섬웨어에 감염되었습니다. ㅠㅠ

익히 들은 대로,

파일 확장자가 이상하게 변하고

확장자를 원래대로 바꿔도 읽을 수도 없고..​

텍스트문서가 폴더마다 만들어져서

영어로 무슨 딥 웹(deep web)으로 들어오라는 경고장이 생기더군요.

다행이도 노트북에 꽂아뒀던 USB만 감염이 되었는지

하드디스크의 문서들은 제대로 돌아가더군요.

결국 눈물을 머금고 USB 포맷...

모르는 사이트엔 아예 들어가지 맙시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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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항상 행복해야 한다’라는 믿음은 정말 끔찍한 것이다.
미완성으로 끝나는 인생의 싹을 숨기고 있는 생각이다.
영원한 만족이라는 고정된 목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행복은 실망과 상실과 같은 감정도 알아야만
비로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 미하엘 빈터호프, 『미성숙한 사람들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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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전편에서 큰 사고로 폐쇄된 테마파크 쥬라기 월드’. 완전히 봉쇄된 섬에 화산 폭발이 시작되면서, 그곳에 갇힌 공룡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 충돌이 일어난다. 청문회 끝에 의회에서는 자연 그대로 두기로 결정을 하지만, 전편의 사건 후 공룡보호단체를 만든 클레어(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는 이를 격렬히 반대한다.

     그런 클레어에게 공룡들을 구출하는 일을 도와 줄 것을 요청하는 밀스(라프 스팰). 화산 폭발은 점점 격렬해지고 있고,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일에 뛰어든 클레어는, 전편에서 공룡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던 오웬(크리스 프랫)을 설득해 섬으로 달려간다. 하지만 왠지 일이 너무 쉽게 풀려나간다 싶었다. 실은 밀스는 섬에 있는 공룡들을 반출해 경매로 팔아넘길 궁리를 하고 있었고, 덕분에 클레어와 오웬 일행은 큰 곤경에 빠지게 된다.

     가까스로 섬에서 빠져나온 그들은 밀스의 계획을 막기 위해 나서지만, 그게 어디 쉬울까. 맨주먹으로 무장된 저택을 향해 무작정 뛰어간 그들 앞에는 엄청난 위기가...

 

 

 

 

2. 감상평 。。。。 。。。

     좀처럼 영화의 스토리 전개에 공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단지 공휴일을 맞아 극장을 가득 채운 어린아이들의 소란스러움 때문만은 아니었다.(실은 애 어른 가리지 않고 시끄럽긴 마찬가지... 그래도 다시 한 번 공휴일엔 영화관에 가면 안 된다는 교훈을 되새겼다) 영화의 초반부터 마지막까지 지속적으로 주인공, 혹은 감독의 선택에 동의할 수 없었다는 게 더 큰 이유였다.

     인간에 의해 복제되어 태어난 공룡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살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 하는 질문이 영화 시작부터 던져진다. 의회 청문회에 선 쥬라기 공원의 핵심 멤버 말콤 박사는 공룡들을 (화산이 터지고 있는) 섬에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영화의 주인공 클레어는 이런 결정에 분노한다. ‘공룡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런데 섬의 공룡들은 무슨 권리를 지니고 있는 걸까? 물론 영화 중반까지 그녀가 말하고 있는 공룡의 권리란 안전한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공룡의 생존권을 위해서 인간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을 당연하게 감수해야 하느냐는 지점에 이르면, 의견은 갈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 속 클레어는 수많은 사람들이 공룡에게 희생을 당하는 과정에서도 소리만 빽빽 지를 뿐, 어떤 윤리적 고민도 하지 않는 듯하다. 그냥 무조건 우리 애기들을 살려야 한다는 의지뿐인 건가.

     사실 그녀의 생각은 매우 낭만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실제로 공룡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 주도권이나 결정권이 애초부터 그녀에게는 없었다. 그저 공룡=죽어가는 불쌍한 동물들이라는 단순한 공식을 끊임 없이 반복할 뿐. 심지어 영화의 마지막 결정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더라도 공룡을 살리겠다는 이해할 수 없는 이기적 결정으로만 보인다. 이러니 영화가 시작된 직후부터 불편한 마음으로 앉아 있을 수밖에.

 

 

 

​     사실 이 영화가 좀 더 불편했던 것은, 영화가 다루고 있는 유전공학, 복제기술 같은 것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매우 가까운 기술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만간 복제된 동물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복제 인간과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당연히 여기에는 매우 복잡한 윤리적, 기술적, 그리고 생태적 문제가 대두될 텐데, 단순히 감상적인 태도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해 보이기만 한다.

     정치적 감상주의는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종종 매우 억지스러운 주장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동물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이 태아의 생존권에는 놀랄 만큼 무감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무분별한 감상주의는 사안의 크고 작음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거나, 선후를 혼동해서 문제를 일으킨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의 행태가 꼭 그런 모습이다.

 

     ​영화를 보러 온 애들이야, 그냥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공룡들을 보며 자지러지게 소리 지르다 나가면 그만일 것이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원초적 방식으로 죽어가는 이 영화에 왜 이렇게 애들을 많이 들여보내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하지만 인간의 목숨(단순히 편리나, 더 많은 풍요가 아니라)보다 공룡의 생존을 더 앞세우는 답 없는 감상주의가,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얼마간의(반대자들이라면 특히 더) 희생은 안중에도 없는 태도와 연결되는 이 영화에서 그 아이들은 뭘 읽게 될까. 이 영화는 휴머니즘도, 생태주의도, 뭣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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