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님 걸으신 그 길 - 톰 라이트와 떠나는 성지순례
톰 라이트 지음, 강선규 옮김 / 살림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복음주의권 개신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이들에게 순례란 살짝 껄끄러운 느낌을 준다. 가장 큰 이유는 중세 말 교회가 순례에 일종의 공로적 가치를 부여했고, 개혁자들이 이를 부정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의 후예인 우리가 어떻게 다시 순례의 공로를 탐하겠는가.

     물론 저자인 톰 라이트 역시 우리로 하여금 다시 중세적 순례를 하자고 재촉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는 순례에 새로운 의미창조 세계의 선함과 은혜가 전달되는 신비적인 매개체로서의 가치를 제안한다. 이 논지는 서문에 담겨 있는데, 사실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주장이다.

     은혜의 수단보다 은혜 자체에 집중하자는 복음주의 개신교의 가르침 자체는 옳다. 다만 인간은 현실 세계에 발을 딛고 있고, 그 현실의 물질이 인간의 삶에 깊은 영향을 준다는 점을 놓쳐버린다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렇게 물질보다 은혜에 깊이 천착한다는 이들이 예배당 건물에는 또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걸 보면(근대 이후 건축된 세계의 크고 아름답게 예배당은 대개 복음주의자들의 솜씨다) 말이다.

 

     1장부터 9장까지로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의 공생애의 주요 지점들을 선택해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묘사하고 거기에 담긴 신학적, 신앙적 함의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1장의 경우는 예외로 다메섹에 관한 묵상인데, 우리는 예수께서 그곳에 가셨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는 역사적, 성경적 해석은 물론 알레고리적 해석도 곁들여지는데, 단지 복음서에 등장하는 내용뿐 아니라 구약의 여러 관련 내용들까지 풍성하게 담겨 있다.


      팔레스타인의 공생애 로드를 따라가면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우리 또한 그분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요단에서의 세례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고, 광야에서 들리는 유혹의 목소리를 물리치는 법을 배워야 하며, 예루살렘의 왕좌에 새로운 왕이 앉으셨음을 믿고 선포해야 한다. 이 선포는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용서하며 불확실해 보이는 세상의 바다로 나아감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여정에 용기를 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잘 구성된 순서와 내용.

 

     이 내용 못지않게 후기에 해당하는 부분 또한 인상적이다. 서두에 언급한 이유와 함께, 우리가 성지 순례에 약간의 불편한 마음을 갖는 이유는 오늘날 그 지역이 갖는 독특한 정치적 상황 때문이다. 20세기 초중반 팔레스타인을 거점으로 건국된 현대 이스라엘은 그 이전 오랫동안 살았던 팔레스타인인들의 추방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월등한 군사력으로 그 지역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순례라는 이름으로 그 지역을 방문하는 것은 혹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 동의하는 건 아닐까 하는 그런. 하지만 또한 2천년에 걸친 강제적 이산과 고난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욕구 또한 가볍게 무시해버릴 수 없는 일이다.

 

     자는 둘 중 어느 편을 드는 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보는 듯하다. 우선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은 구약 선지자들의 이스라엘 회복 예언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유일무이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유대인(혹은 이스라엘인)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인이라는 점이다. 현대 이스라엘에 대한 무비판적인 지지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학대를 모른 척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정치적인 견해를 표시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그 땅을 방문하는 것이 아니다. (실은 우리에게 그럴 만한 힘도 없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써 우리는 그 탄식이 가득한 땅에 기도하러 가야 한다. 우리는 십자군이 아닌 순례자로서 가는 것이니까.

     팔레스타인의 여러 지역을 둘러보는 성지 순례를 위한 준비과정이 있다면, 이 책을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 (근데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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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05-19 1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목사님이닷!
유투브 방송도 하시는군요.
전에 친구와 재밌는 일을 모의중이라더니 이건가요?
그럼 옆에 계신 분이 친구분...?
암튼 반갑네요. 배경이 역시 구름책방이겠군요.^^

노란가방 2019-05-19 19:07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 쉽게 저의 정체를..ㅋ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오직 보상만 주는 종교,

즐길 거리를 주는 종교,

기다림도 비어 있음도 없는 종교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그러한 종교를 같이 만들어 줄,

금송아지 종교 같은 것을 만들어 줄, 아론 같은 사람을 찾습니다.

- 유진 피터슨, 물총새에 불이 붙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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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권력 - 혼돈의 시대를 헤쳐가기 위한 정치학 수업
나다 이나다 지음, 송태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1. 요약 。。。。。。。

 

     자신의 반이 좀처럼 단합되지 않는다는 고민을 가지고 정신과의사인 를 찾아온 학생 ‘A'와의 대화를 통해 권위란 무엇인지, 권력이란 어떤 것인지를 탐구해나가는 책. 마치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떠올리는 진행방식으로, ’는 직접 대답을 해 주는 대신 질문을 통해 ’A‘가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일본 저자가 쓴 심리학, 철학 비스무리한 책들에는 이런 구조가 자주 보인다.

 

     처음 A는 자신의 반 동료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은 권위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내 는 권위와 권력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로 논지를 이어간다. 대충 정리하자면 권위란 내적인 불안이 동인이 되어 어떤 인물이나 대상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하는 것이고, 권력은 외적인 불안이 좀 더 큰 이유가 된다. , 힘으로 상대방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

 

     이렇게 보면 권력은 좀 더 폭력적이고, 권위는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감화력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는 권위든, 권력이든 어린 아이 시기를 지난 성숙한 인간에게는 부정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해주면 성숙한 판단을 스스로도 내릴 수 있을 텐데, 그런 것들을 다 생각하지 않고 그저 권위에 의존해서 선택하려는 우를 범한다는 것. 그리고 많은 경우 권위에 의존하다보면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고 덧붙인다.

     그럼 결론은 무엇일까? 개개인이 서로 다른 생각과 취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일치단결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문제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단결이 아닌 조화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자발적인 판단과 결정에 의해 전체적으로앞으로 나아가는 상태. 물론 이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느리더라도 (어쩌면 불능하더라도) 이게 옳다면 그렇게 가야지.

 

 

2. 감상평 。。。。。。。

     이런 식의 대화식 구성의 특징은, 나도 모르게 책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는 점이다. 질문을 하는 쪽에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된달까. 그의 질문은 꼭 내가 궁금한 것을 묻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대화 자체도 저자에 의해 구성된 것인 만큼,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저자의 주장이 보이고, 이에 대한 비판적 사유도 가능해진다.

 

     책을 한 번 다 읽고 다시 읽으면서 퍼뜩 드는 생각은 저자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 기초한 권위관, 권력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일체의 권위나 권력의 존재의 타당성을 부정한다.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권위와 권력을 인정하는 것은 의존적인 모습이자(78), 불안에 굴복한 결과이(85), 이는 어린 아이에게나 어울리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과연 옳을까? 여기서 현재의 인류는 홀로 설 수 있는 성숙한 상태라는 자신감(혹은 교만한)이 엿보이는데, 과연 우리는 그렇게 성숙한상태일까? 그리고 그 성숙함은 무엇이, 혹은 누가 인정하는 것인가(어떤 권위에서 나오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 그대로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절대성을 부정하고 나면 당연히 남는 건 파편화된 개인들뿐이다. 저자는 이를 조화라는 주제로 다시 한 데 묶으려 하고, 그 방법으로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예컨대 교통질서를 지키는 이유는 그것이 전적으로 합리적인 규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79). 여기서 저자는 합리성이 권위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무엇이라고 여기는 듯하지만, 이 또한 입증되지 않은 주장일 뿐이다. 오히려 난 인간이란 아무에게도 비난이나 처벌을 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규칙을 깨고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소위 특권층들이 보이는 수준 이하의 언행을 보면,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 안에 떠오르는 악한 충동들을 보면.

 

 

     저자는 권위와 권위의식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생각을 이어나간다. 책에서 권위가 가지는 문제점으로 꼽는 것들은 대개 권위주의가 낳는 부작용들로 보인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좋은 것들도 그것이 하나의 주의(sim)'으로 절대화되는 순간 급격히 성격이 변해버린다. 대개의 경우 특정한 공간과 시간, 영역에서 제한적으로 긍정적 의의와 기능을 가지는 법인데, 그것을 범위를 벗어나 모든 영역에서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순간 삐걱거림이 시작되는 것이다.(예컨대 평등의 평등주의화가 그렇다)

 

     책이 쓰였던 6~70년대 일본의 정치상황에서는 권위주의 정부의 부작용과 그에 대항하는 강한 극좌투쟁들도 있었으니, 이 책에 실린 것과 같은 권위주의에 대한 강경한 경계심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이 부분은 여전히 권위주의적 잔재가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새겨 읽을 만한 부분이다.

 

     다만 인간은 좋게 설명해준다고 해서 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의나 선, 아름다운 같은 것들은 그저 합의나 조화, 합리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권위를 가진 존재가 존재한다면, 그 존재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하는 것이야 말로 합리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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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의 제목이자 성룡이 맡은 배역의 이름이기도 한 포송령은 사실 실존인물이다. “요재지이라는 기담집을 쓴 것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이 영화에서는 음양의 붓을 무기 삼아 요괴들을 퇴치하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는 설정. 이렇게 보면 영화의 주인공인 포송령이 신나게 요괴들을 쫓는 내용인가 싶은데(사실 그렇게 가도 괜찮았을 텐데...) 감독은 여기에 섭소천과 연적하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인 천녀유혼을 섞어 넣었다. (사실 천녀유혼이야기도 바로 그 요재지이에 들어있는 이야기 중 하나다.)

 

 

 

      불길한 예감은 이내 사실이 되었다. 주인공인줄 알았던 포송령은 천녀유혼 이야기와 뒤섞여 자리를 잃어버렸고, 포송령이라는 인물을 억지로 끼워 넣은 천녀유혼은 예전의 그 명작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간소화되고 망가져버렸다. 사실 초반의 바다요괴 사냥 장면이나 포송령 주변을 포켓몬처럼 따라다니는 귀염성 있는 작은 요괴들만 보면 어린이들을 겨냥해서 만든 판타지물인가 싶었지만, 천녀유혼의, ‘어른들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걸 보면 또 그런 장르도 아니고...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캐릭터들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는 부분이다. 포송령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하는 식의 뒷방 노인처럼 등장하고(그 와중에 분장은 어찌나 잘했는지.. 나이에 비해 훨씬 젊게 나온다), 초반부터 움직이기만 하면 사고를 치면서도 시종일관 긍정적인 태도로 포송령의 제자가 되겠다고 쫓아다니는 사람 좋은 민폐 캐릭터도 한숨 유발, 심지어 요괴들조차도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며 제 마음대로 이야기를 산으로 날려버리는 헛발신공을 보여줄 정도. 여기에 간소화되고 과장된 섭소천과 연적하의 이야기는 이제 그냥 사랑중독, 사랑 타령에 빠져 주변을 다 망가뜨리는 민폐커플로 보인다.

 

 

 

 

     과유불급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뒤죽박죽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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