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본격적으로 돈이라는 주제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책이다. 물론 이런 내용이 처음 담긴 책은 아니지만, 단행본 한 권 전체를 이 주제에 온전히 쏟아서, 성경의 언급만이 아니라 인문학과 사회학 차원에서 분석하는 책은 생각만큼 흔하지 않다(대개는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성경구절을 쭉 뽑아놓고 개인적 해석을 덧붙이는 정도다).
책의 첫 두 장은 공저자 두 명이 어떻게 자라왔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싱가포르의 가난한 가정 출신의 플라이브 림과 캐나다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폴 스티븐스는 전혀 다른 배경에서 자랐지만, 공통적으로 돈이 가진 위험한 성격을 인식하게 되었다. 돈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유한 사람에게도 모두 ‘문제’다.
3장은 돈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인데, 우리는 흔히 물물교환 단계의 경제가 서서히 발전해서 돈이 만들어졌고, 그 결과 효율적인 교환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는 식의 설명을 경제학 교과서에서 만난다. 이 설명에서 돈이란 ‘가치중립적인 교환의 매개체’로 전제된다.
하지만 저자들은 돈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신전이었다고 말한다. 돈은 고대 근동의 신전에서 기록하던 장부의 단위로 고안되었다는 것이다. 최초의 은행은 신전이었고, 신전의 서기들은 신전에 들어오고 나가는 다양한 물품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그 물품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표준 척도를 만들었고, 이것이 돈의 기원이라는 것이다.
돈의 유래에 대한 이 설명이 중요한 이유는, 이 설명이 옳다면 돈이란 처음부터 그 속성상 영적인 것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돈에는 영혼이 있다고, 고대 제사장들이 돈에 부여한 마술적 성질은 사라진 적이 없다고 단언한다. 돈은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주제이기도 하다.
4장에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해석이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것과 세속의 것을 구분하고 각각의 영역을 나누어 바치라는 식의 이원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가진 돈의 10%를 헌금하고, 30%를 세금으로 내고, 나머지는 내 뜻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초기 교회는 모든 시간과 모든 소유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믿었다.
5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간략한 비판이 실려 있다. 그것은 놀라운 생산력 향상을 이끌어냈지만, 사회 전체를 돈의 노예가 되게 만드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저자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런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열쇠라고 지적한다.
6장에서는 청지기 비유를 놓고 씨름한다. 주인에게서 쫓겨날 지경에 처했던 청지기가,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그 일부를 탕감해줌으로써 인심을 얻어 후사를 도모했다는 에피소드다. 저자들은 이 이야기에서, ‘이웃을 금전적으로 사랑하는 일의 중요성’을 이끌어 낸다. 그건 돈으로 친구를 사라는 뜻이 아니라, 이웃을 돌보는 데 돈을 사용하라는 명령이다.
이와 관련해서 7장에서는 우리가 돈을 사용하는 방식에, 우리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가 새겨져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8장에서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예가 제시된다.
9장에서는 이른바 ‘번영복음’을 다룬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자가 되길 원하신다”로 상징되는 이 사이비성 짙은 유사 기독교가 어디서 왔는지 그 사상적 기원을 밝히고, 이에 대한 반대논의에 대해서도 간단히 살핀다. 그리고 마지막 10장에서는 우리가 가진 것을 하늘에 쌓기 위해 할 수 있는 네 가지 실천을 제안한다.
돈은 중립적인 도구가 아니며, 그 자체로 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지적이 흥미롭다. 사람들이 돈에 얼마나 빠져있는지, 그것을 얻기 위해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돈에는 확실히 뭔가 강력한 힘이 있는 것 같다. 마치 마약이 단순한 화학물질이 아닌 것처럼.
기독교 일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돈은 단순한 복의 증거 정도로 인식될 수 없다. 애초에 그것이 하나의 숭배 대상으로 시작되었음을 인식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신앙적 위기를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이런 차원에서 소위 번영복음은 기독교를 해치는 독이라고 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생각해 볼만한 지점을 여럿 제시해 주긴 했으나, 공저자가 쓴 책들이 흔히 그렇듯 각 장마다 긴밀하게 흐름이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도 살짝 준다. 어쨌든 책이라는 건 두 사람이 동시에 문장을 써 내려갈 수는 없는 거니까, 각자 다른 장을 맡아 쓰거나 했을 텐데, 그게 한 사람이 전체적 맥락을 잡고 쓰는 것만큼의 통일성을 갖추기엔 어렵다.
또 돈의 본질에 관한 분석이 꽤 흥미진진했던 데 반해, 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어떻게 오늘날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서는 전통적인 교훈들(자선이나 선하고 신앙에 유익한 일에 사용하는 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새롭지 않다는 게 문제인 건 아니다. 그만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훌륭하다는 의미이기도 할 테니까.
분석과 적용이라는 두 영역을 놓고 볼 때, 이 책은 분석이라는 차원에서 읽을 만하다. 특히 책 후반의 번영복음에 관한 간략한 분석은 꽤 도움이 될 듯싶다.
많은 현대인들은 과학에 대한 신화에 빠져 있다. 과학과 신화가 어울리는 조합인가 물을 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그렇다. 과학에 대한 신화의 핵심 교리는 이렇다. 과학은 불편부당한 진리를 찾아가는 유일한 통로다. 과학은 팩트의 영역이고, 이건 그저 단순한 개인적인 신념일 뿐이었던 기존의 철학과 종교 등보다 진리를 찾아가는 도구로서 우월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과학적”이라는 말이 “진리에 가까운”이라는 말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신화가 잘못되었음을 다양한 차원에서 보여준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그 시작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가치적 판단의 영향을 받는다.
저자가 말하는 가치의 영향을 받는 과학의 영역은 모든 과정에 걸쳐 있다. 우선 어떤 주제를 연구할지부터 가치는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면 부유한 선진국의 연구자들은 소득이 낮은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구보다 부유한 나라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연구에 좀 더 많이 뛰어드는 경향이 있다.
사실 좀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연구할지에도 가치가 영향을 준다는 점이다.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시설이 인근의 주민들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쉽게 직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걸 소위 “과학적”으로 분석해 입증하는 건 쉽지 않다. 어떤 물질에 집중할지, 그 물질의 농도를 어떻게 계산할지, 그 물질이 인체에 미치는 평균적 영향을 어떤 식으로 계산할지 같은 문제에서 얼마든지 “아무 문제가 없는” 방식으로 연구를 설계할 수 있다.
그뿐 아니다. 연구자들은 어떤 목적으로 연구할지, 연구의 방향 설정에서도 가치의 영향을 받는다. 과학적 연구방식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파고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떤 결론에 이르는 식이 아니다. 그건 처음부터 어떤 방향을 설정하고, 그것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이는 요소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불분명한 요소들이 무척이나 많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그 불분명한 요소들을 어떤 식으로 해석할지 역시 가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학이 가치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문제일까? 그렇지는 않다. 애초에 문제는 가치를 불분명하고 종잡을 수 없는 “일개” 개인의 신념쯤으로 치부하려는 태도에 있었다. 가치가 과학연구의 설계와 진행에 영향을 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것이 좋은 가치인지, 그리고 그 연구 수행에서 만나는 팩트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하면 된다.
저자는 과학에서의 가치판단을 폐쇄적인 소수 전문가집단에게 독점시킬 것이 아니라 시민 집단들의 참여를 좀 더 보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 연구 수행 과정에서의 투명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결과적으로 그 연구가 우리 사회의 윤리적, 사회적 우선순위를 대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과학연구수행에 있어서 가치의 영향을 제대로 할 수 이는 장치를 만들자는 뜻이다.
이런 부분이 오늘 우리의 현실에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불과 몇 년 전 발생한 가습기 소독제 연쇄살인 사건에서도 법원은 “과학적인 근거”로 기업측에는 책임이 없다고 판결을 내리기도 했을 정도니까. 물론 그 과학에 대한 순수한(혹은 순진한?) 믿음이 판사가 그런 이상한 판결을 내린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을 거다. 그러나 비슷한 일은 얼마든지 예를 들 수 있다. 핵발전소의 “무해성”에 관한 과학적 근거들이 넘쳐나는 것처럼.
과학이 입고 있는 두꺼운 신화라는 옷을 벗겨내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다만 이것이 과학이 갖는 합리성을 애초부터 부정하자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과학은 여전히 우리 삶을 좀 더 낫게 만드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고, 온갖 비과학적 주장들이 끼치는 해악은 훨씬 더 클 테니까.
결국 이 부분에서도 민주주의가 중요해 보인다. 최근 읽고 있는 다양한 영역의 책들에서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 부분인 게 흥미롭다. 시간이 갈수록 테크노크라트라고 불리는 기술관료들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요소를 멋대로 결정하는 일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결코 역사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요소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무협지 원작.
우리 어렸을 때는 무협지가 꽤 유행했었다. 흔히 말하는 김용의 소설들도 있었고, 그런 유행을 타서 나도 몇 권 읽어보긴 했었다. 다만 김용의 근본책들을 본 건 아니었고, 소위 말하는 양산형 무협지들이어서 몇 권을 보다가 그 취향이 더 이어지지는 않았었다. 뭔가 비슷비슷한 내용들만 이어져서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었으니까.
어린 나이였지만 무협지들의 특징은 금세 정리가 되었다. 뭔가 특별한 데가 있었던 주인공이 기이한 인연으로 갑자기 엄청난 무공을 얻고, 모함을 당하거나 위험한 일에 얽혀 들어가서 고생을 하지만 결국 모든 걸 평정한다는,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미녀들이 주인공 곁에 붙는다는 그런 이야기다.
여기에 그 이름부터 뭔가 엄청난 것 같은 각종 무공과 그 파괴력에 관한 장황하고 맛깔나는 묘사와 서로 긴장과 협력을 지속하는 쟁쟁한 문파들에 관한 설정 같은 것들은 그 시절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자연히 김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도 수도 없이 제작되어 왔는데, 다시 한 번 그 시도들의 뒤를 잇는 영화가 나왔다.
견자단.
수많은 양산형 무협영화들 때문에 굳이 이런 영화를 골라 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 눈길을 둔 건 역시 견자단이라는 배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적어도 무술씬 만큼은 뭔가 보여줄 것 같은 기대를 갖게 해 주는 배우니까.
그리고 확실히 대충 간단한 합 정도 맞추고 우당탕탕 찍어내는 양산형 무협 드라마나 영화들과는 과는 달리 확실히 선이 멋있다. 물론 홀로 그 많은 적들을 상대하는 모습은 확실히 과장되는 면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뭐 원작이 그런 거니까. 무협도 확실히 세련되게 연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
그렇다고 오직 견자단 혼자 억지로 끌고 가는 이야기는 아니다. 확실히 오랫동안 인기를 끌었던 원작 때문이기도 했을 텐데, 영화 속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적절한 서사가 부여되어서 이야기가 나름 괜찮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관심을 끌었던 건 초반부터 끈질기게 주인공 교봉을 무고했던 강민이라는 캐릭터다.
그녀는 개방의 부방주이자 주인공 교봉에게는 형님뻘에 해당하는 자신의 남편을 교봉이 살해했다고 주장해 결국 그를 개방에서 쫓아내는 데 성공한다. 결국 일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왜 그랬는지를 묻자, 강민은 어린 자신을 납치해 결혼을 한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고 대답한다. 비록 그녀가 했던 다른 악행들이 모두 무마될 수는 없겠지만, 그녀의 심정은 공감이 되지 않는가.
축약.
원작이 워낙에 대작인지라 그걸 영화 한 편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영화도 원작 중 초반 일부만을 따와서 교봉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중원의 개방을 떠나 거란으로 가게 되었는지에 관한 내용만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교봉이 거란 진지를 향해 말을 타고 달려가는 모습으로 끝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스토리가 썩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작을 잘 아는 사람이야 그 빈틈을 상상으로 채워 넣을 수 있겠지만, 나처럼 원작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인공 교봉이 갑자기 아주라는 여자와 급격히 사랑에 빠진 것도, 우연히 만단 단예와 호형호제 할 정도로 가깝게 나오는 이유 같은 것들은 전혀 영화 속에서는 설명되지 않아 이해가 어려웠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영화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이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개방파의 고위간부들은 자신들의 방주를 추방하는데 겨우 부방주의 아내 한 사람의 증언에만 의지하고 있고, 금세 죽일 듯 교봉을 몰아간다. 여기에 자칭 온갖 문파들도 발작적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지 다짜고짜 교봉을 몰아가는 데 동참하고, 심지어 후반엔 교봉 역시 마찬가지의 행동을 보인다. 정의니 공정이니 운운해도 하는 짓은 결국 그냥 동네 양아치들, 혹은 조폭이랑 비슷하달까.
물론 이런 무협영화는 그냥 즐기면 그만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확실히 견자단 액션이 볼만 하긴 하니까.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 패배한 직후
민주정치를 버리고 과두정치로 이행한 것은
승자인 스파르타의 강요 때문이 아니었다.
30년 가까이 이어진 전투가 굴욕적인 패배로 끝나면서
아테네 시민 스스로 100년에 걸쳐 유지해 온
민주정치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이다.
- 시오노 나나미, 『그리스인 이야기 3』 중에서
독립운동가 영화.
영화는 일제 강점기 경성의 총독부에 잠입한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다룬다. 비밀스럽게 잠입해 총독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그를 부르는 이름이 바로 “유령”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은밀함과 치명적인 파괴력을 모두 보유하고 있는 요원에게 꽤나 어울리는 이름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다섯 개의 국경일 중 두 개가 일제 강점기와 관련이 되어있는 나라다. 삼일절과 광복절이 그것. 그만큼 이 나라의 현대사에 일제강점기가 남긴 상처는 깊고 굵다고 해야 할 것이다. 때마다 종종 그 암울했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가끔은 그보다 앞선 일본의 침입―예를 들면 임진왜란 같은―을 다루기도 하고)
해방된 지 벌써 곧 80년이 되어가는 상황에서 여전히 그 시절을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여전히 그 시절 일어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도 싶다. 대통령과 친구라는 어떤 양반이 싸질러 놓았다가 급히 삭제한 글처럼 결코 “식민 지배 받은 나라 중 사죄·배상 악쓰는 건 한국뿐”인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 때나 지금이나 더 가증스러운 건 스스로를 일본과 동일시하는 조선놈들이었다.
스타일리시한 연출.
영화 전체가 꽤나 긴박감이 있으면서도, 세련된 느낌이다. 스파이 “유령”으로 지목된 조선인 다섯 명이 한 호텔에 감금된 채 심문을 받고, 누군가 자수하지 않으면 모두를 고문하며 해치겠다는 위협을 받는 상황에 몰린다. 그런데 여기 모인 여섯 명이 꽤나 생생한 특징을 지닌 캐릭터들이다.
이 영화의 매력은 역시 이 흥미로운 캐릭터들인 것 같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라는 조금은 묵직한 배경 속에서, 이 독특한 캐릭터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만들어 내는 케미가 통통 튄다. 특히 정무총감의 비서이자 내연녀인 유리코(박소담) 캐릭터가 꽤나 눈에 들어온다. 누가 봐도 싼티가 철철 넘치며 온갖 난동을 부리며 시선을 빼앗으니까. 또, 자기 어머니까지 죽여가면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하고 거기서 성공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는 무라야마(설경구)도 영화 중후반까지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주고.
영화의 초반은 그 호텔에 갇힌 다섯 명 중 누가 스파이인가를 두고 감독과 관객이 벌이는 머리싸움이기도 하다. 각자가 모두 의심스러운 면이 보이고, 그들이 하는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를 고민해 가며 보는 맛이 있다. 확실히 상업영화를 만들 줄 아는 감독.
오늘의 한일관계.
이런 영화를 보면 자연히 오늘의 한일 양국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얼마 전 일본은 또 다시 독도가 자신들의 합법적인 영토라고 망나니짓을 하기 시작했고, 그 며칠 후 우리 대통령은 일제에 항거한 3.1운동을 기념하는 날에 “일본은 우리의 파트너”라는 발언을 했다. 그리고 대통령 눈에 드는데 인생을 바친 여당 쪽 인사들의 맞장구 소리에 며칠간 귀가 따가울 정도였고, 오늘 충북지사는 “나라를 위해 자신은 친일파가 되겠다”고 선언까지 했다.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새에 발생한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의미하는 건 뭘까? 물론 인접국인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필요한 일이고, 때로 악질 국가들과의 관계도 우호적으로 이어가는 것도 외교의 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굴종의 방식, 특히 여전히 제국주의적 망언을 쏟아내는 정권에 대한 무릎 꿇기 식이어서는 안 되는 거다.
영화 속 무라야마는 전형적인 스스로 무릎 꿇은 조선인이다. 그는 일본인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를 죽이고, 자신이 스파이로 의심받는 상황에서 진짜 스파이를 찾아 죽임으로써 조선인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했던 인물이다. 그는 벌써 합방된 지 10년이나 됐다며, 언제까지 독립 타령을 할 것이냐고, 이제는 내선일체를 이뤄 함께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일장 연설을 한다.
일제가 조선을 발전시켰고, 덕분에 근대화가 이루어졌으며, 오늘날에도 일본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 경제와 안보가 당장 망해버리고 말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곳곳에 암덩이처럼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은, 분명 온 목숨을 바쳐 독립을 이뤄내려 했던 독립운동가들을 모욕하는 일일 것이다. 영화 속 무라야마는 결국 유령에 의해 처형되었지만, 현실 속 무라야마들은 삼일절에 일장기까지 내걸며 더 발광 중이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뉴스로 돌아가면 입맛이 더 씁쓸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