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제목이자 성룡이 맡은 배역의 이름이기도 한 포송령은 사실 실존인물이다. “요재지이라는 기담집을 쓴 것으로 알려진 인물인데, 이 영화에서는 음양의 붓을 무기 삼아 요괴들을 퇴치하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는 설정. 이렇게 보면 영화의 주인공인 포송령이 신나게 요괴들을 쫓는 내용인가 싶은데(사실 그렇게 가도 괜찮았을 텐데...) 감독은 여기에 섭소천과 연적하의 애절한 사랑이야기인 천녀유혼을 섞어 넣었다. (사실 천녀유혼이야기도 바로 그 요재지이에 들어있는 이야기 중 하나다.)

 

 

 

      불길한 예감은 이내 사실이 되었다. 주인공인줄 알았던 포송령은 천녀유혼 이야기와 뒤섞여 자리를 잃어버렸고, 포송령이라는 인물을 억지로 끼워 넣은 천녀유혼은 예전의 그 명작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간소화되고 망가져버렸다. 사실 초반의 바다요괴 사냥 장면이나 포송령 주변을 포켓몬처럼 따라다니는 귀염성 있는 작은 요괴들만 보면 어린이들을 겨냥해서 만든 판타지물인가 싶었지만, 천녀유혼의, ‘어른들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걸 보면 또 그런 장르도 아니고...

 

     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캐릭터들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는 부분이다. 포송령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하는 식의 뒷방 노인처럼 등장하고(그 와중에 분장은 어찌나 잘했는지.. 나이에 비해 훨씬 젊게 나온다), 초반부터 움직이기만 하면 사고를 치면서도 시종일관 긍정적인 태도로 포송령의 제자가 되겠다고 쫓아다니는 사람 좋은 민폐 캐릭터도 한숨 유발, 심지어 요괴들조차도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며 제 마음대로 이야기를 산으로 날려버리는 헛발신공을 보여줄 정도. 여기에 간소화되고 과장된 섭소천과 연적하의 이야기는 이제 그냥 사랑중독, 사랑 타령에 빠져 주변을 다 망가뜨리는 민폐커플로 보인다.

 

 

 

 

     과유불급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뒤죽박죽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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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기리는 책과 영화가 제법 많이 나왔다. 아마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많지 않을까 싶을 정도. 내가 본 것만 해도 책으로는 유시민이 대표로 정리한 노무현 김정일의 246, 사후 자서전 격인 운명이다, 추모 에세이집인 그가 그립다, 노 전 대통령의 초기 활동을 다룬 노무현의 시작이 있고, 영화 쪽으로는 역시 가장 유명한 송강호 주연의 변호인, 술 한 잔 하면서 그에 관한 기억을 털어놓는 듯한 분위기의 무현, 두 도시 이야기, 그리고 노무현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기록한 노무현입니다까지 제법 여러 편이다.

     또 한 편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이 영화는 어떤 차별점을 가지고 있을까. 내용상으로는 국회의원으로서의 초기 유명한 일화들과 민주당 대선 경선 승리의 과정까지를 다뤘던 영화 노무현입니다와 비슷한 궤를 타고 진행되지만, 승리의 과정에서 바로 죽음으로 뛰어넘어갔던 노무현입니다와는 달리 이 작품은 대통령직에 오른 후부터 집요하게 이어져 온 조롱과 공격 부분을 피해가지 않는다.

 

 

 

     고졸 출신으로 사시에 합격해 변호사로, 국회의원으로, 대통령에까지 이른 노 전 대통령의 이력은 확실히 이례적이다. 그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중심으로 서로 밀고 끌어주는 학맥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의 행보는 소위 주류 정치인들과도 조금 달랐다. 이건 소수의 엘리트(여기서 이 말은 우월이라는 개념과는 상관이 없고, 그저 배타적인 특권층이라는 의미다)지배를 바라던 이들의 비위를 거스르게 했다. “자신은 노무현을 대통령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며 노골적인 무시와 폭언을 쏟아내던 김무성이나,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을 조롱하는 연극 환생경제을 공연했던 나경원, 이혜훈, 주성영, 심재철, 송영선, 정두언 등등,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는 순간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던 박근혜 같은 이들이 대표적.

     애초부터 권력층 편향이 짙었던 부족한 자질의 자칭보수언론들은 물론, 이상주의에 빠져, 혹은 이틈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뽐내려고 했던 진보언론들도 대통령을 물어뜯기 바빴다.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거의 모든 정책은 비난을 받았다. 그 정책의 내용이 정확히 뭔지 아는 사람은 물론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당시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는 교수님과 식사를 하던 중 종부세 이야기가 나오자 언론이 만들어 놓은 세금 폭탄프레임을 언급하며 반감을 보이셨던 기억이 있다. 잘 해야 연간 10만원 정도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게 전부였을 텐데도.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런 문제가 단지 언론과 반대파 정치인들에게만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를 열렬히 지지해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던 팬클럽 노사모에게도 있었다고 말한다. 인터뷰로 구성된 영화의 출연자 대부분이 노사모 회원들이었는데, 일부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고 실제로 탈퇴까지 했다고 한다. 결국 사방에서 공격받는 대통령의 편에 서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 인터뷰이들은 그 때 자신들의 선택을 떠올리며 하나같이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가 최고통치자로 선출되는냐가 전부가 아니라, 시민들 개개인의 정치의식과 참여 수준에 따라 결과가 나온다는 걸 그 땐 정확히 몰랐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단순히 한 사람을 추모하는 영화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교육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후회를 곱씹는 데 머물지 않고, 허황된 프레임이나, 노골적인 비난공세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주는 기능도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영화가 종교영화가 되려고 하는 느낌도 드는 게 살짝 우려스럽기도 하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이 주는 충격이 워낙에 컸기 때문인지, 그 이후 지지층에서 그에 관한 비판적 고찰은 상당히 부족하다. 거의 대속적 죽음이고, 우리의 죄가 그를 죽였다는 식의 느낌이랄까. 시종일관 찬양과 숭배로 나아가려는 충동이 느껴진다. 그에 관한 책들을 보면서, 현실주의자로서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인상이 강했는데, 그가 살아있었다면 과연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을까 싶다.

 

     ​그는 순교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딛고 사람들이 좀 더 나아가기를 바랐지만, 그를 순교자로 만드는 순간 우리는 그를 밟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는 목표가 아니라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표지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를 잘 지나서, 그가 가리켰던 방향이 정말로 옳은지를 분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이루어졌던 공격들이, 거의 그대로, 이제 문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 묘한 기시감을 준다. 여전히 김무성은 청와대에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야 한다고 선동질을 하며 대통령을 부정하고 있고(이 사람은 그러고 보면 자기 말고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자기성애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언론의 거짓 프레임 공세도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 온갖 목소리로 가득한 인터넷이나 거리에서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모르는 극단주의자들이 신나게 떠들고 있으니... 우리는 이전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확실히 앞으로 좀 더 나아가야 한다. 적어도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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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개발되면서 인류에게는 전지에 가까운 능력이 생겼는데,

가상현실의 발달로 이제는 인류가 편재의 능력까지 갖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훗날 인류에게 마지막으로 필요한 건

전능을 발휘할 기술이 될지도 모르겠다.

- 케일럼 체이스, 경제의 특이점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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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과 도덕 - C.S 루이스를 통해 본 일곱가지 치명적인
제럴드 리드 지음, 김병제 옮김 / 도서출판 누가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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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의 제목(“C. S. 루이스를 통해 본 일곱 가지 치명적인 죄악과 도덕”)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루이스의 저작들에 흩어져 있는 악덕(Vice)과 덕(Virtue)에 관한 언급들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Vice’를 꼭 죄악으로 번역해야 했을까... 뉘앙스가...) 중세 영문학자였던 C. S. 루이스는 중세적 사고에 대한 오해를 극복하고(이와 관련해서는 최근에 출판된 폐기된 이미지를 보면 좋을 것이다), 그 안에 담긴 깊은 통찰들을(특히 기독교적 통찰들을) 현대적 언어로 풀어내기를 즐겨했는데, 다양한 저자들에 흩어져 있던 내용들을 한 자리에 잘 모아 정리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작업일 것이다.

 

     책 제목에 들어가 있는 일곱 가지 악덕’, ‘일곱 가지 덕같은 건 중세식 구분이다. 일곱 가지 악덕이란 흔히 칠종죄라고 부르기도 하는 교만, 시기, 분노, 호색, 탐식, 게으름, 탐욕이고, 일곱 가지 덕이란 분별, 정의, 용기, 절제, 믿음, 소망, 사랑이다. 악덕을 물리치고 덕을 증진시켜야 한다는 가르침은 고대 이래로 역사상 유구히 전해져온 교훈이지만, 모더니즘시대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런 식의 간섭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렇게 압제적 권위로부터 탈출한 결과 거의 모든 부문에서 방황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현대인들의 이런 식의 저항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이전 세대가 말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미가 상당히 왜곡된 채 전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호색에 관한 경계는 성적인 것에 대한 부정으로 읽혀졌고, 시기를 멀리하라는 교훈은 평등의 요구로 극복되고 말았다.

 

     앞서 말했듯, 루이스는 그런 왜곡된 전승을 교정함으로써, 본래의 교훈이 가지고 있는 진짜 교훈을 드러내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루이스가 살던 당시의 시대적 한계나 그가 상정했던 독자(혹은 청중)의 제한 때문에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면이 있다. 저자는 바로 그걸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고자 이 책을 썼는데, 이 과정에서 루이스만이 아니라 아퀴나스 같은 중세 철학자들과 현대의 여러 저자들의 글을 함께 인용한다.(여기에 저자 자신의 주장도 적잖게 포함되어 있고

 

      이런 구성과 진행이 내용을 좀 더 다양하게 만드는 데는 확실히 도움이 됐을 것 같은데, 애초에 ‘C. S. 루이스를 통해 본이라는 어구에 매력을 느껴 책을 선택한 독자에게는 살짝 아쉬움을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루이스색이 좀 옅어졌다고나 할까. 물론 책 전반에 걸쳐 C. S. 루이스의 글이 가장 많아 보이기는 하지만, 다양한 저자들의 말을 함께 넣으려다 보니 책이 살짝 산만해진 감도 있고.(일곱 가지 덕과 관련된 부분은 그냥 바로 순전한 기독교” 3장 부분을 보는 게 루이스의 생각을 좀 더 잘 접할 수 있을 듯하다.)

 

 

      책의 제목이 ”C.S 루이스를 통해 본 일곱가지 치명적인 죄악과 도덕이라고 되어 있다. S 뒤에 온점(.)이 빠진 것도 당황스럽고 (이건 표지잖아!) ‘일곱 가지일곱가지라고 띄어쓰기를 잘못한 부분도 눈에 걸린다. 게다가 원제의 ‘VICE and VIRTUE’라는 부분을 ‘VICE & MORALITY'라고 바꿔서 표지 상단에 적어놓은 것도 아쉽다. 두 단어는 분명 뉘앙스에 차이가 있을 텐데 말이다. 여기에 책 본문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오타와 완성되지 않은 문장 번역 같은 교정교열의 문제가 독서하는 내내 거슬렸다.(오타만 하더라도 서너 개까지는 세다가 나중엔 그냥 포기해버렸다. 중간에 싹둑 잘라먹은 듯한 문장들도 보이고..)

 

     내용면에서나 편집에서나 좀 더 세심한 정리와 마감이 필요했던 책이다. 하지만 주제와 관련해서는 한 번씩 찾아보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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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 혐오에서 연대로
오세라비 지음 / 좁쌀한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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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이라는 일종의 사회운동이 시작된 지는 수십 년 이상이 되었다지만,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귀에 이 명칭이 익숙해지기 시작한 건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인 듯하다. 처음 간략히 그 이름과 개념을 들었을 때는 자연스럽게 동조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성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은 분명히 존재하는 듯했고, 단순히 성별을 이유로 차별을 하는 건 불공평한 일이라는 건 잠깐만 생각해봐도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언론에 등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사고와 행동들을 보면서 의아한 생각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단지 충분한 논리적 사고가 부족한 것을 넘어(예컨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이 여성해방의 대단한 증거인 양 생각하며 강요하는 것이나 소위 미러링이라는 행태의 옹호 같은), 상당수의 주장들이 증오와 혐오 같은 파괴적 감정에 매어있는 듯했기 때문이다.(단순히 허세나 허언증에 근거한 거짓말 같은 건 그냥 넘어가자)

     물론 어떤페미니스트들이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해서 모든 페미니스트가 욕을 먹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의 역사나 현실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페미니즘은 ~~’라는 식의 사고는 가능한 하지 않으려 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부분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페미니즘의 역사와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발전 양상, 다양한 페미니즘 내의 조류 가운데 최근 물의를 일으키는 이들은 어디쯤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발전적 극복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제안까지 실려 있다.

 

 

     저자가 꼽고 있는 현재의 극단주의적 페미니즘(분리주의 페미니즘,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그것이 (남성 일반에 대한) 혐오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소위 미러링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남성을 조롱하거나 괴롭히는 행위를 당당히 표현하고, 이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 ‘그렇게 해야 마땅한 것정도로 변호하는 일련의 행위는 분명 비논리적이다. 어떤 남성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이 때 부당한 대우는 꼭 자신이 받지 않은 것이라 해도 상관이 없다) 모든 남성을 공격한다는 논리는, 내가 새똥을 머리에 맞았으니 지구상의 모든 새들을 다 죽여야 한다는 황당한 생각과 비슷하다. 우선은 주장의 방향이 잘못되었고, 최소한의 비례성이나 대칭성조차 갖추지 못했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의 극단주의적 페미니즘에서는 모든 여성의 피해자와, 그리고 모든 남성의 (잠재적) 가해자화, 문화적 검열, 남녀의 분리 같은 다양한 문제들이 보인다. 저자는 그 이유를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이 1970년대 미국의 극단주의적(그리고 백인 여성 중심적) 페미니즘을 그대로 수입한 후 별다른 발전 없이 교조주의적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분명 서로 상황이 다르고,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50년 전 이해(대표적으로 이미 사실상 희미해진 가부장제 철폐 구호다)에 머물고 있다는 것

 

     단지 일부의 문제인 줄 알았던 것들이 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확실히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다. 애초에 건강하지 못한 세계관 위에 세워진 구호와 행동들은 태생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기 어렵다. 여성들만을 위한 세계나 여성우월주의, 여성이 하면 모든 게 만사형통이라는 관점은 엉터리 판타지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런 상황에까지 오게 된 걸까? 저자는 우리나라 페미니즘을 이끌고 있는 이들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그 해답을 찾아간다. 우선 다양한 여성할당제도를 통해 권력에 손쉽게 진출하려는 명망가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예컨대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대표가 되면 여야 정당의 비례대표를 통해 거의 당연하다시피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현재의 구조를 그다지 바꿀 이유가 없다. ,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글과 강연을 통해 수익을 얻는 직업 페미니스트도 있다. 이들 역시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갈등을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정작 지지와 도움이 필요한 대다수 여성들의 상황의 개선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남성을 적으로 돌리고 증오와 혐오를 통해 자기들끼리 킥킥대는 행동이 도움이 필요한 어린 미혼모의 지원이나 가난한 여성 노인문제, 여성 노동자들의 처우개선(특히 이 부분은 애초에 페미니즘 운동의 목적이기도 했다)에 어떤 도움을 제공해왔는가?

 

     저자는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중심으로 한 휴머니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은 적이 아니라 함께 인간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관계다. 하나의 성이 다른 성을 지배하는 식이 아니라, 함께 연대하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극히 당연하고 타당한 주장이 반가워지는 현실은 분명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문장들은 쉽게 읽힌다. 가능하면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쉽게, 문제가 되는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이 보인다. 다만 비슷한 내용이 몇 번씩 반복되는 경향이 있고, 문제가 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조금은 추상적이고 구호에 그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일단 책이 문제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할 부분이다.

 

페미니즘 사상에 깊이 물든 젊은 여성들 대다수가 대학 교육 혜택을 받으며 과거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급진 페미니즘이 성장할 자양분이 부족한 셈이다. 하지만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은 상대적 박탈감을 제어하지 못한다.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이들은 급진적 페미니즘에 쉽게 빠져들었다. - P6

우리 사회가 진일보하려면 메갈리아식 극혐은 지탄받아야 한다. 일베가 비난받듯 메갈리아도 비난받아야 한다. 메갈리아가 일베의 혐오에 미러링으로 되돌려줬다 해서 좌파 진영이 메갈리안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더 나아가 부추김은 전적으로 옳지 못하다. 혐오를 넘어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 - P21

상층부 엘리트 지식인들이 남성 혐오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한 데 대한 피해 계층은 이른바 수많은 이름 없는 흙수저 남성들이다. 또한, 급진적 페미니즘 전성시대의 피해 계층은 주로 흙수저 여성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적 약자층으로 남성 혐오가 심하면 심할수록 먼저 희생양이 된다. 급진적 페미니즘이 성 권력에 주목하면 할수록 보통 여성들의 삶과는 동떨어지게 된다. - P60

대다수 여성들의 삶을 위한 제도 개선과는 거리가 먼 여성단체 상층부 인사들의 의회 입성 관문으로 전락한 것이 여성 할당제다. 여성이 정치권의 소수이고 사회적 약자라는 명분을 내세워 여성 할당제를 악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것이 남성 역차별을 일으키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문제다. - P171

여자 대학생들은 페미니즘이라는 보호막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해주리라는 착각을 한다. 여성단체가 압력을 넣어 갖가지 여성 전용 제도를 만들어주면 여기에 환호한다. 페미니즘이란 이렇듯 여성들을 사회적 약자, 신체적 약자라는 틀 속에 가두어버린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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