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은 이야기다
마이클 고힌 & 크레이그 바르톨로뮤 지음, 윤종석 옮김 / IVP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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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가 지나면서 지식도 발전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소위 고전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식의 축적은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관해 베드로보다 더 많이 알고 있고, 어쩌면 요한보다 조금 더 많은 지식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선지자들이 보았던 것을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필요했듯이.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고전들이 있다. 가장 유명하게는 창조, 타락, 구속이 있고, 그리스도인의 비전이나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같은 책들도 필독서들이다. 쉐퍼 계열과 카이퍼 계열의 책들도 여럿 나와 있고, 이 책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레슬리 뉴비긴의 책들도 인상적이다. 그런데 이 책은 그 책들보다 후에 나왔다는 장점이 있다. 저자들은 충실히 앞선 연구들을 익혔고, 그 위에 자신들만의 통찰을 쌓았다. 물론 후에 나온 책이라고 해서 늘 앞선 연구들보다 나은 건 아니지만(대개 충분한 연구 없이 서둘러 자신의 입장을 내놓는 경우다), 이 책의 저자들은 탄탄한 길을 밟아가고 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이야기. 저자들은 기독교가 담고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성경 속 창조, 타락, 구속과 회복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어서 서구문명을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분석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해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다른 책들에서도 충분히 다뤄졌던 부분이고, 몇 권의 책들을 통해서 접했던 내용들이다. 이 책의 진정한 장점은 기독교 세계관이 갖는 한계와 문제점까지도 적절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자칫 주지주의에 빠질 수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내용이다. 저자들은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경계한다. 우리는 스스로 그 나라를 이 땅에 세울 수 없다.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세상 모든 부분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은 열광주의적 태도에 제동을 거는, 중요한 포인트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에서 기독교 세계관이 어느 지점에 서 있어야 하는지 중심을 잘 잡아주고 있는 면도 인상적이다. 책은 특히 모더니즘의 연원과 그 파급력에 대해 잘 분석해 주고 있고, 어떤 면을 경계하고 극복해야하는지를 친절하게 풀어준다. 포스트모더니즘 부분도 마찬가지.

 

 

     한 권의 책으로 세계관을 설명하면서 이 정도의 수준을 담아낸다면 바랄 나위가 없다. 기독교 세계관 개론서로는 추천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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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신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

지옥에서 나가는 단 하나의 문을

악마들 본인의 손으로 안에서 단단히 잠가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문이 밖에서도 잠겨 있는지 여부는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악마들이 논쟁을 벌이는 이유는

존재하는 유일한 문 이외의 다른 문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 C. S. 루이스, 실낙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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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건 중요한 거니까 잘 기억해 둬.

누군가에게 지금처럼 가까이, 따뜻하게 다가가면

생김새 같은 건 잘 안 보이게 돼.

지금 거울이 흐려진 것처럼.

 

- 정지원, 샤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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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대화가 없는 아이와

아빠가 없는 아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 토마스 호프마스터

론 헌터 주니어, 6』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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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은 격투기 선수 용후(박서준)에게 어느 날 갑자기 손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출혈이 발생한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해서 만나게 된 안 신부(안성기)는 바티판에서 파견되어 온 구마사제. 아버지를 살려 달라는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은 신에 대한 깊은 배신감과 불신을 갖고 있던 용후는 안 신부를 쉽게 믿지 못하지만, 점점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되면서 함께 악의 사제를 처단하기 위한 일에 나서게 된다는 이야기.

 

     ​격투기 선수와 구마사제라는, 쉽게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보여주는 뭔가가 있을 줄 알았으나,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전형적인 오버스러움을 벗지 못해 딱 뻔한 영화가 되어버렸다. 구마사제라는 소재마저 최근에 OCN에서 방송되었던 프리스트나 앞서 제작되었던 영화 검은 사제들보다 못했으니... 초반의 말끔한 클럽 사장의 모습에서 뭔가 엄청난 능력이나 목적이 있을 것 같았던 빌런도 그냥 흐지부지되고 말았고. 사실 영화에서 뭘 말하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내용도, 재미도, 그림마저도 잃은 영화.

 

 

 

 

 

      영화의 초반부터 중후반 상당 지점까지 주인공 용후를 괴롭게 만드는 건, 어린 시절 기도에 관해 겪었던 강한 실망이다. (아마도) 출산 과정에서 세상을 떠난 어머니부터, 사고로 순직한 아버지까지, 신에게 기도를 했음에도 왜 구해주지 않았느냐는 것. 단순해 보이긴 하지만,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묻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히친스나 도킨스 같은 신무신론자들이 대표적으로 비꼬는 부분이기도 하고.

 

     ​사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도 어려운 질문이다. C. S. 루이스는 개인기도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11:24)는 구절을 어린아이나 불신자에게 기독교를 가르치는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는 우리가 조금은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었을 때 적용될 수 있는 구절이라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물론 우리는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청원 기도를 할 수 있다. 그분은 훨씬 열등한 기도도 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한편 루이스는 세상의 마지막 밤에 실린 기도의 효력이라는 글에서 기도의 정의를 좀 다르게 내린다. 그는 기도를 요청이라고 말한다. 요청은 강제와 달리 거절당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무한히 지혜로운 존재가 유한하고 어리석은 피조물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인다면, 당연히 그는 요청을 들어주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할 것이다. 다만 우리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선한 속성과 의지를 믿고 구할 뿐이다. 그렇게 요청(기도)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분에 대해 더욱 깊이 알아가며 성숙해지게 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영화 속 어린 용후에게는 너무 어려운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의 보호자였던 어른들(아버지와 신부)은 제대로 된 설명 없이, 그리고 자신들도 충분히 이해되지 않는 내용을 문자적으로만 가르친 실책이 없지 않고.(물론 이 부분을 쉽게 가르치는 곳은 많지 않다)

 

 

 

 

     ​엑소시즘이라는 소재가 끊임없이 대중문화 가운데 다뤄지고 있는 건, 영적인 영역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부분이 지나치게 흥미 본위로만 그려지고 있다는 것이 아쉬운 부분. 신비주의나 영적 탐험은 제대로 된 지도가 없다면 길을 잃기 쉽다는 C. S. 루이스의 경계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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