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 국가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한성례 옮김 / 북스코리아(북리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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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말 오랜만에 책을 읽다 말고 내던졌다.(물론 정말로 책을 던졌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빌린 책은 소중하게 보고 반납해야 한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해진 작가의 이름을 전면에 내걸고, 그녀의 국가관에 관한 이야기를 편하게 듣는 식으로 편집된 책인데, 실은 이 책을 위해 새로 쓴 글도 아니고, 일본의 어느 잡지에 기고한 에세이 형식의 칼럼들을 로마인 이야기의 일부 내용과 우리나라의 어느 잡지(신동아)와 했던 인터뷰 내용, 그리고 로마인 이야기속의 인용구들과 더해서 엮어낸 책. 이쯤 되면 사실상 창조된 수준이고, 저자인 시오노 나나미는 그냥 앉아서 돈을 버는 셈이다.

 

 

     뭐 로마인 이야기에 관해 여러 말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나라에 로마사 열풍을 일으킨 주인공이기도 하니, 또 나 역시 그 책들로 로마사에 대한 윤곽을 잡았으니 그 공은 인정해야 할 듯. 물론 종교 쪽(특히 기독교)만 넘어가면 갑자기 균형감을 잃고 욕을 퍼붓는 수준의 부족한 이해를 드러낸다는 점과, 태생이 일본인인지라 군국주의에 묘한 친화감을 드러내는 식의 불편함 등이 보이긴 했는데, 뭐 일단 당장은 우리와 직접 관련이 없었던 먼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를 다루는지라 그럭저럭 넘어갔다.

 

      하지만 이제 딱 그런 국가관 부분만을 떼어서, 그것도 현대의 현실정치와 연결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그 체감이 훨씬 강해져버린다. 그래도 일본인답게, 일본의 정치현실에 대해서는 나름 옳은 인식을 보여줄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엘리트들은 예측 가능한 일에는 잘 대처하지만, 돌발 사태에 임기응변을 하는 데에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진단 같은 것들(83) 말이다

 

     그러나 물론 일본중심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감안하더라도, “아베는 너무 성실해서 문제라는 어이없는 안목이라든지(21), 정국 안정을 위해 아베 정권이 연임을 계속하는 것이 옳다는 태도라든지(25), 지도자는 인격에 문제가 있어도 일만 잘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나이브한 입장은 전형적인 수구파의 인식과 궤를 같이 하는 모습이다.(평화헌법개정과 군대보유 찬동은 덤이다)

 

     일견 마키아벨리즘에 입각한 현실주의적 정치관, 국가관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냥 지식 좀 쌓은 고집쟁이의 생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우구스투스의 예를 들며, ‘도덕과 인품보다 사람들을 속이더라도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는 것이 정치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인 것처럼 운운하지만, 사람들의 과연 도덕적 파산에 이른 지도자가 유능하다는 이유로 지지할 수 있을까? , 물론 아베의 장기집권이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을 보면 그게 가능한 듯 싶기도 하지만, 그건 특별히 정치적 후진성을 벗지 못한 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지난 세기 일제가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했고, 그대로 유지되었다면 그건 침략이라고 불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까지 넘어가면(131), 이 사람이 익힌 역사는 철저하게 힘의 원리만을 숭배하는 우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2천 년 전의 상황과 오늘의 상황을 그대로 빗대 연결 짓는 것은 시대착오적 관점에 다름 아니다.

 

 

     그냥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라. 거기도 부족한 이해가 적지 않지만, 적어도 다른 괜찮은 이야기들이랑 섞여 좀 희석되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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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24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인 이야기 이후로 우경화되는
모습에 그의 책을 끊게 되었습니다.

노란가방 2019-12-24 22:1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이제 끊어야 할듯합니다 ㅎ
 
나니아 연대기의 모든 것 - 나니아 연대기를 통해 만나는 C.S. 루이스의 세계
캐스린 린즈쿡 지음, 김의경 옮김 / 크림슨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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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C. S. 루이스가 쓴 책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나니아 연대기. “순전한 기독교쪽도 아주 잘 알려지긴 했지만, “나니아쪽은 어린 아이들까지 즐겨 읽었으니 독자의 연령 폭이 훨씬 넓다.

 

     인기가 있는 책은, 자연히 그 책을 분석하는 책도 나오기 마련. 내 경우만 하더라도 벌써 네 권의 나니아 연대기 분석서를 읽었지만, 이 책을 제외하고도 아직 읽지 못한 책이 몇 권이 더 책장에 꽂혀 있다. 이 정도로 읽다보면 어느 정도 책들 사이에 비교가 가능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책의 주요 홍보 포인트이기도 했던, C. S. 루이스가 직접 이 책을 칭찬했다는 부분일 것이다. 루이스는 이 책의 저자에게, 그가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며, 이 책이 자신의 책(나니아 연대기)의 중요한 함의들을 잘 밝혀냈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 정도라면 루이스 애호가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찬사다.

 

     루이스의 말처럼 이 책의 저자는 그 두꺼운 일곱 권의 책들을 성실하게 분석해 낸다. 1부에서는 전체 주제 중심으로, 2부에서는 각 권의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고, 단지 설명만이 아니라 책을 가지고 다양한 질문들을 만들거나 일종의 놀이를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여기에 각 권에서 저자가 뽑은 명구나, 이 책의 내용에서 파생된 노래나 음악, 연구/동호회 모임 등의 다양한 부가적 정보까지 담아낸다.

 

     물론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당시인 20세기 중반이라면, 루이스의 인정을 받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좀 더 흘렀고, 그 사이 루이스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의 작품을 훨씬 더 깊게 읽었던 여러 저자들이 또 다른 분석서들을 냈다. 뒤에 나온 책의 저자가 가진 유리함은, 역시 앞서 나온 책들을 충분히 읽고 소화시킨 다음, 그 위에 자신의 생각을 더 높이 쌓을 수 있다는 점이다. 쉽게 말하면, 이 책에 실린 내용 못지않게, 그리고 어쩌면 그보다 더 충실하게 분석하는 책들이 더 있다는 것이다.

 

     사실 위에서 말했던 나니아 연대기에 관한 다양한 부가적인 정보들은 또 한 편으로 생각하면 책을 산만하게 만드는 요소일 수도 있다.(물론 순수한 애호가의 입장에선 이런 정보들이 너무 달콤하지만) 그리고 루이스의 찬사와는 달리, 저자는 나니아 연대기를 너무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학과 매칭시키려 하고 있기도 하다. (루이스는 다른 곳에서 나니아 연대기가 단지 기독교의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분명 좋은 책이다. 루이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그런. 다만 비슷한 수준의 분석과 주제를 담고 있는 책이 많이 나와 있는 현 상황에서, 대체재가 충분히 있다는 점은 살짝 평점을 깎는 부분.

 

     책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터넷상에 올라와 있는 정보에는 나니아 연대기의 모든 것이라는 상당히 자신만만한 제목이 붙어있지만, 내 손에 들려 있는 책의 표지에는 나니아 연대기의 거의 모든 것이라는 살짝 위트 있는 제목이다. 저자와 역자, 출판사까지 동일하니 같은 책인 건 분명한데, 금세 제목을 바꾸었나보다. 두 글자를 빼고. 문제는 원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목이라는 것. "Journey into Narnia"이면 그냥 나니아로의 여행정도일 텐데, 바꾼 제목이 지나치게 기대감을 높여 놓지 않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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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주의 문화에는 내재 가치를 지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대신 제품이나 사람, 종교의 가치는 효용성에 따라 결정된다.

자동차나 배우자, 신이 당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미련 없이 새 모델로 바꿔 치우라.

하다못해 개조라도 하라.

이런 소비주의적인 윤리가 통용되는 것은

우리 문화에서는 자신과 자신의 바람이 우주의 절대적인 중심이기 때문이다.

 

- 스카이 제서니, 종교에 죽고 예수와 살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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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부터 바둑에 재능이 있었던 주인공 귀수(권상우), 자신을 무료로 가르쳐주겠다는 제안을 하며 누나를 성폭행한 당대 최고수 황도경(정인겸)에게 복수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 그 중심에는 바둑, 그 중에서도 내기 바둑이 놓여 있었다.

 

    ​ 우연히 만난 허일도(김성균)와의 수련으로 엄청난 고수가 된 후, 전국의 내기 바둑 고수들을 도장깨기하는 장면이 극의 중반을 이룬다. 1100의 대결을 펼쳐 자신이 한 번이라도 이기지 못하면 패하는 것으로 하겠다고 황도경에게 도전하는 내용이 결말부.

 

 

 

 

 

      우선 참 보고 있는 게 힘들었던 영화다. 바둑을 중심 소재로 삼긴 했는데, 바둑 자체보다는 웬 잡기들이 난무하면서 영화를 산으로 끌고 올라간다. 차라리 여러 캐릭터들이 특성을 가지고 협력한다는 1편의 설정이 훨씬 나아 보였는데, 그 모든 것을 한 사람에게 집약시키자 이건 그냥 만화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또 이 사이에 여기저기에서 본 듯한 클리셰들이 잔뜩 끼어들어 영화를 산만하게 만드는 건 덤.

 

     1편의 주인공인 정우성이 권상우로 교체된 부분도(물론 이야기 자체가 다르긴 하지만) 살짝 우려스러웠는데, 앉아서 바둑을 두는 것보다 피지컬 트레이닝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 듯한 모습을 보며 (물론 영화를 보면 그 정도 트레이닝을 안 하면 감당이 안 될 정도의 사건들이 일어나긴 한다) 실소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나름 이름깨나 있는 배우들이 B급 정서의 영화에 출연하는 일 자체는 뭐 이상하지 않지만, 그냥 B급 영화가 되어버렸다면 누군가는 책임을 느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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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
레이첼 헬드 에반스 지음, 임혜진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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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들은 자주 성경적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성경적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불분명하고 쉽게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성경과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놓여 있는 거대한 틈(시간적,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인 의미에서)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성경적일까. 우선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된 내용을 성경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가 성경적으로 살아야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 중 상당수는 안에 살지 않고, 농사를 짓지도 않으며, 양을 치지도 않는다. 이와 관련된 많은 규정들은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고, 문자적 준수도 불가능하다.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느 지역을 기준으로 한 시간을 따라야 할까. 전통적인 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진 후부터 토요일 해가 지기까지다. 그런데 지구는 둥글고, 이 명령이 처음 적용되었던 지역은 이미 안식일이 되었지만, 다른 지역은 여전히 금요일인 경우도 있다. 우주적 차원에서 누구는 안식일 안에 있고, 누구는 밖에 있는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이다. 안식일의 첫 준수자들은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도, 아니 예상치 못했겠지만 말이다.

 

     결국 우리는 성경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어쩔 수 없이 취사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선택의 과정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이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신학은 잠재적인 결론이며,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다. 당연히 이에 근거한 성경적규정들의 의미, 혹은 준수의 범위 등도 달라질 수 있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말만 옳다고 우기는 어린 아이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성경적 여성상이 얼마나 임의적이고, 불완전한 조각들로 이루어져있는지, 자신이 직접 최대한 문자적으로 그 규정들을 준수함으로써 반어적 증명을 시도한다. 한 해 동안 매달 특정한 덕목을 주제로 삼고, 그에 따른 실천사항들을 성경에서 최대한 찾아 문자적 준수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예컨대 실험을 시작한 10월은 온유라는 덕목이 주제였고, 이를 위해 온유하고 정숙한 심성을 기르기 위해 그렇지 않은 일을 할 때마다 동전을 저금하는 통(맹세 항아리)을 만든다거나, 관상기도를 훈련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를 할 경우 지붕 위에 올라가 속죄하기로 했다. 순종이 키워드인 12월에는 남편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고(벧전 3:1-6), 일부다처주의자들을 인터뷰하며(30, 21:10), 여성 혐오로 희생된 성경 속 여성들을 기리는 행사를 열었다.(11:37-40)

 

     실험 기간 내내 저자를 쩔쩔매게 했던 것은 요리나 손수 옷을 지어 입는 일 같은 것들이었다. 특히 잠언 31장에 현숙한 여인이 해야 할 일의 긴 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기가 질리게 만들었고.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도전이, 또 때로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면을 조명하는 내용 등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이 다양한 도전기를 읽는 것 자체도 재미있지만, 소위 성경적 여성으로 살라며 (선별을 거친) 성경구절을 제시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 일이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책의 결론부에서 저자는 성경적 여성관이란 없다고 선언한다. 특히 성경은 여성’(혹은 남성)에게 이러이러 해야 한다는 식의 임무 리스트를 제공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과 상호작용하시는, 복잡하고 계속 전개되어 가는 이야기’(398)라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성경을 들고 읽느냐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할 일의 목록을 찾으려고 한다면 (성경이 실제 그런 책인가와는 상관없이) 그런 것들만 찾아내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노예를 부리는 일의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아내지 않았던가.

 

     그동안의 성경적 여성관논의에서, 사람들은 따라야 할 규정을 찾아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그 책을 폈다. 만약 우리가 그 안에서 사랑과 인정을 발견하려고 했다면 지금과는 또 많이 다른 그림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이 말이 사실 성경은 우리가 원하는 내용을 뽑아낼 수 있는 일종의 제비뽑기 책이라는 말이 아니다. 사실 후자 쪽이 예수께서 성경을 읽으시는 기본적인 관점에 좀 더 가까웠으니, 어쩌면 이쪽이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바라보는 좀 더 바람직한 관점일지도 모른다.

 

     여성에 관한 논의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성경 자체를 읽는 좀 더 넓은 관점을 열어주는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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