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적 희망의 근본적인 왜곡은

현재의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 둠으로써

악이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정적주의에 있다.

 

- 톰 라이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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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불과 얼마 전까지 사귀던 애인의 결혼식에 찾아가 술에 취해 진상을 부리고 있는 정훈(윤계상). 그런 정훈의 앞에 갑자기 나타나서 함께 하룻밤을 보내게 된 시후(한예리)는 그 결혼식의 신랑과 바로 얼마 전까지 만나던 여자였다.

 

     둘 다 취한 상태로 어쩌다 보니 함께 보낸 밤이었지만, 상대에게 관심이 생기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게 몇 번 더 만나 잠자리를 갖는, 소위 몸친이 되기로 한 두 사람. 자연스럽게 연인관계가 되나 싶었지만, 기껏해야 시간제 교사인 정훈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만날 사람은 만나는 법. 비정규직이라고,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까지 접어야 한다면 세상은 너무 각박하지 않은가. 우리의 두 젊은이는 아직 젊었다.

 

 

 

 

2. 감상평 。。。。。。。 

 

     우리 시대는 젊은이들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정치, 경제 거의 모든 분야의 권력을 잡고 있는 기득권자들은 젊은이들에게 별 관심이 없다. 어떻게든 더 착취해서 자기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부와 쾌락을 더 오래 지속시킬 수 있을까 골몰하고 있을 뿐. 당연히 젊은이들의 삶은 불안하다. 어느 것 하나 안정된 것이 없다. 이것이 단지 젊기 때문인 것이라면 참고 견딜 수도 있지만,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는 이 10년이 더 지나도 딱히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예측을 하게 만든다.

 

     미래가 불안하면 긴장할 수밖에 없다. 허리띠만 졸라매는 게 아니라, 생각까지 경직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쉽게 희생되는 것은 당장의 생존을 위한 것을 넘어서는 다음 단계, 예컨대 결혼이나 연애 같은 일일 것이다. 이미 결혼을 한 사람들은 출산이나 육아 등일 테고. 이 영화는 이런 젊은이들이 가진 불안감을 전개의 축 가운데 하나로 잡는다. 썩 괜찮은 접근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게 아닌 이상, 상업영화로서 좀 더 자극적인 내용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도 떠올랐나보다. 그래서 등장한 게 몸친’, 즉 섹스를 위해서 만나는 남녀라는 설정이다. 사실 비중만 따진다면 오히려 이쪽이 훨씬 더 주가 되는 것 같고, 현실에 대한 불안감은 그냥 위기를 일으키기 위한 양념 정도로 보인다.

 

     덕분에 고민은 그다지 진지하게 느껴지지 않고, “몸 가는 대로 마음도 움직여 보는 게 어떠냐는 영화 속 의사의 충고가 가장 크게 들릴 뿐이다. 그리고 이 점은 현대의 대중문화계에서 지긋지긋하게 반복적으로 말하던 내용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배우들 나와서 투덕거리다가 우리 사랑하게 됐어요 하고 끝나는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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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리미 2016-01-30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재는 잘 잡은 것 같은데 결국 로맨틱 공식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지루해지더군요. 한예리 배우는 정말 기대되는 배우인데... 영화가 조금만 더 엣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노란가방 2016-01-31 21:17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이도저도 아닌 결과를....ㅋ
 

 

 

 

알라딘의 새 미끼 책커버...

뭐 어쩔 수 있나요..

이번에도 걸려들었습니다.

냅다 5만원을 주고 샀더니.. 

책 몇 권을 끼어주더군요. (감사..)

 

 

 

 

펼치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상품정보에 실려 있는 대로..

본드 냄새가 좀 나긴 했지만..

뭐 이건 날아갈 거니까..

이 때까진 좋았습니다..

 

 

 

 

새로 산 책을 넣어봐야지!! 하고 넣는 순간...

 

 

 

 

 

이렇게 사이즈 오버 되어버립니다..

 

그나마 밴드에 끼우는 형식인 앞표지쪽은

억지로 끼워넣는다고 해도

커버 자체 공간에 넣어야 하는 뒷표지는

아예 들어갈 수 없는..

 

이 책만 그런가 싶지만..

당장 제 책상 위에 있는 책 다섯 권 모두가

들어갈 생각을 안 합니다.

 

 

제가 작은 걸 주문했나 싶었지만

아니더군요. (심지어 더 작은 건 따로 있던..)

밴드에 끼워야 하는 겉표지의 경우

이렇게 오버사이즈가 되면

자연스럽게 밴드의 장력 때문에 구부러집니다.

양장본이 아닌 이상..

문제는 양장본 표지는

뒷표지 넣는 공간에 안 들어간다는 거..

 

 

이거... 계륵이라고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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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30 1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란가방 2016-01-30 14:35   좋아요 0 | URL
차라리 책이 작으면 사용은 가능했을 텐데요.. ㅜㅜ
전 북커버 큰 걸로 샀는데도 이러네요..;;

살리미 2016-01-30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도 북커버 사은품이 있었는데(요번까보단 좀 후지지만) 그것도 맞는 책 찾기가 너무 어려워서 그냥 굴러만 다니고 있어요. 요번 북커버는 디자인이 더 예뻐서 저도 얼른 주문을 넣었는데 역시나 불편하긴 마찬가지. 다행히 저는 사이즈 맞는 책을 고르긴 했지만 상당히 부피도 커지고 사실 불편은 합니다 ㅎㅎ

노란가방 2016-01-30 15:26   좋아요 0 | URL
아... 커버에 맞는 책을 따로 사야 하는 거군요..
이거 왠지.. 더 많은 책을 팔려는 계략의 향기가...

만병통치약 2016-01-30 15:23   좋아요 0 | URL
북커버에 맞는 책을 찾아야 하다니요 ㅋㅋㅋㅋ
 

 

 

 

1. 줄거리 。。。。。。。 

 

     실종된 딸을 찾아 몇 년째 전국을 떠도는 해관(이성민). 서해의 한 섬에서 우연히 추락한 미국의 인공지능 첩보위성을 만난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녀석은, 자신 때문에 무고한 어린 소녀가 미군의 폭격으로 죽었다는 자책까지 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스스로 소녀를 찾기 위해 임무를 중단한 채 떨어진 것.

 

     약간은 허황된 듯 보이지만, 여튼 그렇게 만난 둘은 함께 해관의 실종된 딸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그 위성이 보통 위성인가. 미국과 한국의 첩보기관에서 수색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해관은 졸지에 쫓기는 몸이 되고 만다.

 

     점점 실종된 딸의 흔적에 가까워지게 된 해관. 그러나 동시에 그는, 딸의 생각은 들으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완고했던 모습들을 함께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만난 딸의 모습은 해관이 기대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2. 감상평 。。。。。。。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인공지능 로봇인 소리와의 관계에 빠져 들어가는 주인공 해관(그리고 역시 같은 모습이었던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일이었다. 우리는 과연 로봇과도 우정이나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걸까. 물론 사람은 다양한 대상들과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심지어 대상이 무생물이더라도 이는 가능하다.(특정한 돌이나 우표, 구슬 따위를 목숨 걸고 모으는 사람들을 보라) 이렇게 보면 적어도 어떤 면에 있어서 사람보다 더 옳은 판단을 내리기도 하는 인공지능 로봇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 딱히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미 세계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사람의 동반자로서 기능할 수 있는 로봇 개발이 한창이다. 어린 아이를 위한 놀이/학습 로봇, 노인들을 위한 애완(?) 로봇은 이미 상용화 단계이고, 사람과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어플리케이션도 비슷한 종류다. 조만간 영화 속 소리처럼 거의 인간과 비슷한 정도의 감정과 판단을 하는 인공지능 로봇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여러 해관들을 도와줄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한쪽 가슴에는 좀 서글픈 느낌이 아주 살짝 든다. 왜 우리는 로봇에게 관계를 요청하는 상황에까지 이른 걸까. 전 세계의 수십 억, 아니 당장 우리 주변만 해도 수많은 관계 맺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말이다. 그들은 정교한 기계장치나 태양전지, 배터리도 필요 없고, 그냥 작은 관심과 먼저 걸어주는 말 몇 마디면 충분한데도.

 

     같은 맥락에서 한편으로는, 이런 영화가 나오게 된 것은 더 이상 사람들이 사람의 이야기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사람이 아닌 로봇이 위협을 당하고, 파괴되고, 고생을 하는 모습이 더 깊은 정서적 동요를 일으키게 된 것 같다는 의미다. 이건.. 좋은 흐름일까.

 

 

     주연이자 화면 전체를 거의 혼자 채웠던 이성민의 무난한 연기, 이를 적당하게 받쳐준 이희준, 이하늬, 그리고 제작하는 데 억 대의 비용이 들어갔다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었던 로봇 소리의 나쁘지 않은 움직임이 일단 기본 재료로 들어갔다. 여기에 명절을 얼마 안 남겨 놓고 나온 가족 이야기라는 소재에, 지나치게 신파적이지 않은 줄거리까지 더해지니, 이대로만 가면 명절에 가족끼리 함께 보러 가기 딱 알맞은 영화가 아닐까 싶다.(물론 그 때까지 상영관에서 버틸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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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하나님 - 교회는 왜 사회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는가
케네스 리치 지음, 신현기 옮김, 김홍일 감수 / 청림출판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1. 요약 。。。。。。。

     1부에서 저자는 기독교의 여러 흐름들의 사회참여 역사를 간단하게 개관한다. 오랫동안 개인영혼의 구원에만 집중해왔던 복음주의도 로잔언약 이후 기독교의 대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분위기이고, 가톨릭 역시 한 때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로 반동적 파시즘에 동조하긴 했으나 변하고 있다. 저자는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성육신 신앙이야 말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근본적인 통합의 가능성과 당위성을 보여주며, 따라서 기독교의 사회성은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2부의 세 장은, 악한 세상의 구조와 원리에 대항하는 기독교인들에게 힘을 공급해줄 수 있는 가치로서의 관상과 수도원주의를 살펴보는 데 할애되어 있다. 투쟁을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대상으로부터 일정부분 분리가 필요한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도구로서 수도원전통을 제시하고 있는 것.(물론 그 위험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경계하고 있다)

     3부는 약간 이질적인 세 개의 글이 실려 있다. 일반적인 주장과 다르게, 현대인들의 종교성은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다(7). 다만 새로운 형태의 영성추구로 나타나고 있을 뿐인데, 저자는 그런 교회 밖 기독교인들의 영성추구를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영적 지도의 전통과 연결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8). 9장은 구마의식을 다루는데, 저자는 세상의 악한 권세자들, 권력과 구조들이야말로 쫓아내야 할 마귀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지막 4부는 기독교의 우경화에 대한 우려를 담고 있다. 파시즘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특히 근본주의적 경향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이에 쉽게 동조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그런 신앙적 선택이 왜 거짓된 영성인지를 지적하면서 글을 마친다.

 

 

2. 감상평 。。。。。。。

     영국 성공회 고교회파 소속의 성직자가 쓴, 기독교 사회참여 역사에 대한 반성과 희망을 담고 있는 책. 일반적으로 기독교 사회참여를 긍정적으로 보는 책들의 경우, 성경에 실려 있는 이웃사랑과 관련된 구절들을 정리해 요약하는 식으로 그 당위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 책의 경우는 삼위일체와 성육신의 속성으로부터 이런 논리를 이끌어 낸다는 점이 독특하다. 조직신학, 혹은 교의신학자의 느낌이 강하다. 이는 오랫동안 합의된 교리를 붙잡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그 실천적 의미에 대해서는 깊이 들어가지 못했던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 신선한 도전이 되지 않을까 싶은 부분.

     단순히 기도하는 한 가지 방식으로서만이 아니라, 주변 환경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케 하는 방식으로서의 관상의 유효성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물론 관상기도라는 것이 양날을 가지고 있어서, 자칫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영지주의의 또 한 가지 문제스스로의 힘으로 깊은 영적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빠지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것과 같은 (위의 두 번째) 의미에서의 관상이라면, 기독교가 지나치게 세상과 한 몸이 되어가는 우려가 있는 오늘날, 자발적 분리와 경제라는 측면에서 다뤄져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진짜 관상이란, 어디 조용한 자리를 찾아가 하는 마음수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캡사이신이 섞인 물대포가 쏟아지고, 진압봉이 휘둘러지는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며 용기를 잃지 않고 서 있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여야 할지도 모른다.(그 자리에 서 있는 이유가 공평과 정의라는 성경의 핵심적인 가치를 실현시키는 자리일 때 말이다. 우리는 어느 쪽에서라도 종교의 영역을 침해하고 지배하려는 정치인들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물론 그럴 바에야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지적도 나올지도 모르지만.. 뭐 그 또한 가능한 대안 중 하나이지 않을까.

 

 

      3부의 내용은 나머지 장들과 비교해 좀 이질적이다. 사실 저자가 말하는 영적 지도와 현대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뉴에이지적 영성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부터가 불분명하고, 여기에는 앞서 그토록 강조했던, 정통적 교리로부터 물흐르듯 파생되는 사회 참여적인 기독교의 흔적이 잘 드러나지도 않는다. 또 구마의식에 관한 지극히 정치적인 해석을 담고 있는 9장 역시, 나머지 장들과 비교해 볼 때 균형감을 약간 잃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근본주의적 신앙과 파시즘을 연결 짓는 4부 역시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저자는 많은 장을 파시즘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갖는 정치적, 경제적, 지역적 특성을 할애하는 데 쓰고 있는데(개인적으로는 이런 부분들이 더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갑자기 근본주의자들은 태생적으로 그런 쪽에 쉽게 기울어진다는 논리로 전개되는 과정에 좀 비약이 있는 것 같다. 저자가 앞서 지적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근본주의적 신앙을 받아들였고, 그들이 파시즘적 사조에 쉽게 동조할 수 있다는, 그러니까 근본주의보다 앞서의 사회, 정치, 경제적 조건들이 여전히 더 큰 요인으로 제시될 수도 있다고 본다.

     예컨대 우리나라의 경우, 전라도의 보수주의적 교회들은 박근혜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에 서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내 경험을 볼 때, 정치적 견해는 종교의 유무나 종류와 상관없이 형성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안타까운 부분이지만, 교회가 교인들의 정치적 견해에 영향을 끼치는 것보다 교인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정치관을 갖는 교회를 만들어가는 게 더 많지 않은가? 특히 우리나라와는 달리 소위 메가처치들이 적은 영국 등 서구세계에서는 말이다.

 

 

      처음 출판된 지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곱씹어 볼만한 지적들을 담고 있는 책. 특히 1, 2부의 경우는 진지하게 두고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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