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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예년에 비해 영화보다 책에 집중..

아.. 책방 주인이니까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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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없다 - 문제는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이다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9년 4월
평점 :
품절


1. 요약 。。。。。。。

     언젠가부터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처럼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그 평등의 당위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이 책의 저자인 해리 G. 프랭크퍼트는 경제적 평등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저자도 지적하듯, 평등을 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실적 조건과 부합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필요를 가장 적절하게 실현해줄 수 있는 것보다는 타인들이 가진 것에 기초해 자신의 요구를 계산하는 데 더 애를 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에게 실제로 무엇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은 무엇을 갖고 있는가에 집중하는 동안(우리의 시선이 온전히 다른 사람에게만 맞춰져 있는 동안), 정작 자신의 진정한 꿈이나 목표가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92-93). 결국 이런 차원에서 경제적 평등의 도덕적 중요성을 과장하는 것은 (자기) 소외를 초래한다(22).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완전한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소수의 상류층이 국가 전체의 부에서 자신이 잘사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몫을 가져간다는 점에서, 매우 부유한 사람들은 일종의 경제적 과식이라는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한다(15). 물론 경제적 불평등은 가능한 극복되어야 할 문제다. 하지만 그 이유는 경제적 평등이 (일종의 정언명령처럼)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여러 종류의 불의한 불평등을(예컨대 미국의 선거제도는 돈이 많은 이들에게 유리한 체제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저자는 입법, 사업, 행정적 감시를 통해 이런 상황을 적절하게 통제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8).

 

      다만 문제의 본질은 경제적 불평등이 아니라 어떤 이들이 겪고 있는 불충분함에 있다. 우리는 왜 극빈층의 삶을 보며 마음이 괴로워질까? 그들이 생존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자원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상대적 양의 차이가 아니라 절대적 질의 결여다. 가난한 사람들이 나보다 경제적 자원을 적게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너무 적게 갖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48-49).

 

      기계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종종 역효과를 가져온다. 예건대 생존하는 데 5단위의 자원이 필요한 사람이 열 명이 있는데 자원의 총합은 40이라면, 모두가 평등하게 4단위씩을 분배받아 다 함께 죽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까?(물론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누가 희생해야 하는가 하는 건 또 다른 질문이다)

 

      이사야 벌린은 평등에는 아무런 이유도 필요 없고 불평등에만 이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자는 평등에도 이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각 사람의 사정이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차등적 분배는 존중(그 한 사람에게 맞는대우이기 때문에)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평등주의에 도덕적 당위를 부여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적, 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생존에) 충분한경제적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인데 말이다.

 

 

2. 감상평 。。。。。。。

     흔히 자유와 함께 핵심적인 가치로서 평등을 꼽곤 한다. 우리는 평등이라는 가치에 일종의 도덕적 당위를 부여하려고도 한다. 물론 정서적으로는 그렇게 볼만한 여지가 있다. 깨끗한 식수가 없어 더러운 웅덩이의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아프리카의 병약한 어린이의 모습을 보면 누구나 비슷한 마음이 들지 않던가.

 

      하지만 이 책은 그 정서의 영역을 좀 더 세심하게 분석한다. 우리가 그런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은 그들이 평등하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충분한 수준의 경제적 자원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적은 경제적 자원을 갖는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수준의 분노나 죄책감을 갖게 되지는 않는다. 관건은 충분성이라는 부분이다.

 

     물론 평등의 추구가 일부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평등 자체를 절대적으로 달성해야 할 무엇으로 여기고 집착할 경우 부작용이 적지 않다.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사실 평등주의는 달성하기가 불가능한 목표이기도 하다. 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하는데 어떤 기준을 사용할 것인지, 이를 위해 필요한 행정적 소요는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나아가 이와 관련된 정치적 다툼까지...

 

 

     평등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일종의 도구적 가치라고 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산을 허물어 구덩이를 메운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애초에 만족도와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다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똑같이만들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이런 평등주의에 대한 몰입이 경제적인 영역을 넘어 다양한 사회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이론이 경제와 각종 문화, 역사의 영역에까지 절대적인 원리인 양 통용되는 것처럼(이건 마치 암석을 연구한 결과를 가지고 고양이의 습성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수준의 교육을 하는 건 타당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은 생각이다(단일작물재배는 하나의 병충해에 의해 전멸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또 기여한 공로와 관계없는 평등한 보상은 감정적으로도 적절치 못하다(친일파와 독립운동가에게는 다른 보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자원을 임의로 분배할 수 있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지도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누리고 남을 만큼 충분한 자원이 존재해서 똑같이 나누더라도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기계적 평등의 강요는 오히려 더 시급한 문제를 가릴 수 있다는 데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과도한 이상주의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주제를 존중과 연결시키는 지점도 흥미롭다. 경제적 정의는 개개인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추구되어야 하는 가치여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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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9-05-1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평등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다‘라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한 번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노란가방 2019-05-13 13:14   좋아요 0 | URL
네. 생각하면서 읽어볼 만한 책인 듯 합니다.
 

 

1. 감상평 。。。。。。。

     타노스의 인피니트 스톤 사용으로 인류의 절반이 사라는 사건이 발생한 지 수년 후, 남은 이들은 극심한 죄책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서 갑자기 등장한(돌아온) 앤트맨. 과거 단독영화(앤트맨과 와스프) 말미에 살짝 등장했던 양자 얽힘 현상으로 인한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들고 나와 문제를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던진다. (사실 여기까지는 이미 이런저런 경로로 예측되었던 내용이다)

     그 작은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 남은 히어로들. 타노스보다 먼저 스톤을 모아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싸움에 나선다

 

 

 

2. 감상평 。。。。 。。。

 

     ​영화의 시작부분은 처참하다. 야구장은 버려졌고,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멈춘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었던 것은 영화가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사실 인구의 절반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당장 경제적으로 엄청난 후퇴가 일어남에도) 그들은 오랫동안 공을 들여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새기고 보존하려고 애쓴다.(여기에 또 얼마나 많은 행정력이 들어갔을까)

     어쩌면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명일지도 모르겠다. 9.11 테러 이후 그라운드 제로가 만들어지고, 건국 후 이스라엘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과 그들을 도운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야드바쉠이 세워졌던 것처럼, 영화 속 생존자들은 공원을 만들고 수백 개의 기념석을 세운다.

 

     ​잊어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큰 사고나 고통, 상처를 치료하면서 상처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상태를 목표로 달려가려고 한다. 이건 신체적인 상처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에도 마찬가지여서, 생존자들에게 끊임없이 잊으라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한 구석의 추모를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하는 것마저 조롱받는 게 현실이다. 과연 그렇게 상처를 덮고, 잊는 것이 공동체를 위한 일일까?

     영화는 기억이라는 주제를 제법 중요하게 다룬다. 타노스는 인류의 절반을 날려버렸지만, 여전히 남은 절반은 사라진 이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기억을 하고 있는 한, 타노스가 원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망각이 아닌 기억이 죽음으로부터(‘타노스라는 이름과 그가 행한 일은 그리스어로 죽음을 뜻하는 타나토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을 지탱시켜준다. 남은 이들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싸울 수 있었고, 그 기억은 포기의 순간을 넘길 수 있는 힘이 된다.

 

 

 

     모든 것을 지우려는 이와 기억하려는 이들 사이의 싸움은 결국 기억하는 이들의 승리로 끝난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희생도 있었지만(이 역시 매우 중요한 전통적 주제다), 그들 역시 남은 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해야 한다는 식의.)

 

     ​사실 뭔가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일은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지지 않는 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일이 일어나려면, 타노스의 한탄처럼, 정말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야 할 것이고. 망각을 강요하는 이들은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 지워버려야 하는 딜레마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억지로 지우려 하기 보다는, 잘 기억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아닐까.

     영화 자체는 살짝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전편에서 벌여놓은 판이 썩 자연스럽게 수습되지 못한 느낌이다), 시리즈 자체로도 한 세대의 은퇴를 기억하는 괜찮은 의미가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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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당신이 음악가여서 수십억짜리 고가의 악기를 다룬다면

눈에 띄는 손상이 없더라도 매일 착실히 관리할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망가질 때까지 사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악기를 망가뜨리면 정작 할 일을 못하게 되니까요.

당신의 몸과 마음은 그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 시오마치 코나, "죽을 만큼 힘들면 회사 그만두지그래"가 안 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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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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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서울과 맞닿아 있는 가상의 도시 화양시에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이 퍼지기 시작한다. 눈이 빨갛게 된 후 며칠 만에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갔고, 마침내 도시 전체가 봉쇄되기에 이른다.

     유기동물을 돌보며 홀로 조용히 살아가던 재형과 그에 관한 반쪽짜리 기사로 재형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윤주, 소방대원인 기준과 간호사 수진, 사이코패스 동해 등의 인물들이 고립된 도시 안에서 겪는 극도의 혼란상을 그린 소설.

 

  

2. 감상평 。。。。。。。

     책장을 한참 정신없이 넘기다가 (1/4?) 문득 작가의 이름을 확인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나도 의심스럽지만, 오래 전 읽어봐야 할 책 목록에 넣어두었던 제목만 보였고, 정말 작가의 이름은 생각조차 못했다) 정유정 작가의 소설이었다. 책 초반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와 호감이 가지 않는 주요 인물들의 성격, 그리고 책 전체에 깔려 있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실은 이 작가의 책을 앞서 두 권 읽었었다(7년의 밤, 종의 기원). 긴박감이 묻어있는 문장 덕에 금세 읽히긴 했지만(이건 작가로서 좋은 자질이다), 워낙에 독한 이야기들이었기에 읽고 난 후 그리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서 읽은 두 작품의 주인공이 공통적으로 사이코패스이자 피해망상에 빠져 주변 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인간들이었으니까.

 

      “종의 기원보다 앞서 나왔던 이 작품도 다른 두 이야기의 인물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갖고 있다. ‘동해라는 인물은 “7년의 밤영제종의 기원유진과 비슷한 뇌구조를 가지고 있어 초반 어그로를 강하게 끌고 있다면, ‘재형이라는 인물은 현수’(7년의 밤)처럼 답답하고 좀처럼 실수를 고치지 못해 이야기를 엉클어뜨린다. 덕분에 책을 다 읽고 나면, 책장에 무슨 끈적끈적한 게 묻어있는 듯한 찝찝함이 오래 간다.

 

      앞서 읽었던 두 작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의미. 이해하기 어려운 잔혹 복수극이나 피해망상에 빠져 광란의 살육을 벌이던 이야기들과는 달리, 이 작품에는 인간애와 용서, 인간과 동물의 교감, 생태주의, 사회비판의식 같은 것들이 보인다.(그리고 어쩌면 레드콤플렉스에 관한 내용도) 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이건 뭘 말하려는 걸까하는 생각을 자주하게 된다. 다만 그걸 드러내는 수단으로써 악을 사용하고 있다는 건 마찬가지...

 

      작가는 악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중요한 소재로 삼고 있는데,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갑자기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하면 자연히 돌아보게 되는 것처럼, 이런 종류의 강렬한 악을 전면에 배치하면 확실히 눈길을 끌기는 한다. 하지만 어떤 작품이 단지 묘사가 뛰어나거나 흡입력이 있다고 해서 좋은 작품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그런 식이라면 아침 막장드라마가 늘 작품상을 받아야한다). 개인적으로는 그 이 단지 눈길을 끌게 만드는 것 이상이 아니라면 오히려 감점요인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아무리 소변기를 예술작품이라고 떠받드는 시대라지만, 똥을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걸 보고 싶지는 않다.

 

    문제는 한 기자(윤주)의 반쯤은 공명심에 취한 특종욕심에 기초해서 낸, 하지만 팩트체크는 제대로 되지 않은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덕분에 기사의 고발 대상이었던 재형은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는데 실패하고 말았고, 그가 돌보던 유기동물들은 학살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 사이코패스인 동해의 음모가 깔려 있었다는 건데, 선의(나름 진실을 드러내겠다는 윤주의 나머지 절반의 마음)가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니라는 사실.

 

      그렇게 초반부터 비호감이었던 윤주는 얼마 후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고 어쩔 줄 모른 채 분명한 목적 없이 그저 바쁘게 뛰어다니기만 한다. 한편 자기만의 생각에 갇힌 재형은 행동해야 할 때 주저하고, 멈춰야 할 때 뛰어들기를 반복하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후회만 반복하는 발전 없는 캐릭터인지라 주인공임에도 그닥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상황. 사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부분 우왕좌왕하고 있긴 하지만.

 

      그런데 그렇게 단순히 반쪽 사실을 담은 언론의 문제를 지적하는 내용인가 싶을 때, 갑자기 등장한 빨간 눈의 전염병은 이야기의 성격을 급격히 바꾸는 동시에 판을 엄청 키운다. 이야기를 읽으며 이 빨간 눈이 뭘 말하는걸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80년 광주가 떠올랐다. 소설 속 가상의 도시는 화양시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불볕이라는 뜻이다. 광주의 빛고을과도 묘하게 매칭되는 데다가, 화양시에 고립되어 군대에 의해 진압되는 시민들의 이미지는 광주에서 일었던 그 일과 묘하게 닮아 있다. 결정적으로 아직도 그들을 빨갱이라고 몰고 가는 이들도 있고.

 

 

     소설은 심각한 재난상황이 벌어지면 사람들이 극도로 무질서해지고 난폭해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상상에 기초해 내용을 전개한다. 일단 언론에서 대체로 그런 식으로 그려지고 있으니 일반인으로서는 그런 선입관을 갖게 되겠지만, 레베카 솔닛이 쓴 이 폐허를 응시하라같은 책들을 보면, 많은 재난의 현장에서 오히려 시민들은 자발적인 질서를 수립해 혼란을 막아내곤 했음을 보여준다. 어쩌면 사실적인 묘사처럼 보이던 이야기는 그야말로 딱 픽션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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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4-23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반에는 전개와 서사 구조가 마음에
들었었는데,

왠지 후반으로 갈수록 힘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조금 작위적인 결말도 아쉬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노란가방 2019-04-23 14:07   좋아요 0 | URL
장황한 악의 이야기에서 뭘 말하려는 걸까 혼란스러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