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브로커라는 직업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자본주의의 뒤편에 숨어있는 문제점들을 드러내는 주제의식은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봤던 기억이 있다. 그 수위의 노골적임은 역시나 미국 쪽이 훨씬 더 강렬했고, 이 영화 은 딱 그냥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터치와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 오락영화 쪽이다.(디카프리오 주연의 그 영화는 시종일관 퇴폐적인 분위기와 우울함이 짙게 배어있었다)

 


 

     상장된 회사의 코드를 모두 암기할 정도로 좋은 기억력을 가진 주인공 일현(류준열)이었지만, 첫 출근 후 수입은 바닥에 머물렀다. 개인 투자자를 상대로 하는 주식 브로커라는 직업이 어느 정도 인맥이 있어야 하는데, 신입사원에게 그런 게 있을리 만무했으니까. 그러던 중 회사 선배의 소개로 은밀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거물 작전세력의 설계자 번호표(유지태)’를 만나게 되고, 이른바 작전에 끼어들어 거액을 벌게 된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면 섭섭할 테고, 처음엔 돈을 좀 만지면서 여자친구도 동료도 내팽개치며 신나하던 그가 각성하게 된 것은 자신처럼 번호표의 하수인 역할을 하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제거되어 버린 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부터다. 언젠가 자신도 그런 꼴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지, 작전세력을 추적하던 금감원 팀장(?) 한지철(조우진)에게 협력하기 시작한다는 내용.

      영화가 좀 지루하게 느껴졌는데, 인물들이 그다지 생동감이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인공을 맡은 류준열은 요새 너무 나온다 싶을 정도로 많은 작품들에 출연하는데, 신스틸러의 면모를 드러냈던 초기와 달리, 천편일률적이라는 느낌이 살짝 들기도 하다. 어떤 상황에서나 평점심(?)을 보이는 듯하달까.(배우에게 이게 칭찬일지) 영화 속 최종 빌런이었던 유지태는 그다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고(이건 감독이 번호표의 폭력성을 좀 덜 잔인하게 표현했기 때문이고), 사실 애초부터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실감하기엔 오가는 단위가 너무 크기도 했고 말이다. 인물이나 전개나, 그냥 모든 게 적당 적당했던 영화랄까.

   

 

      영화는 우리 안 깊은 곳에 있는 욕망을 다룬다. , 재물에 관한 욕망이다. 평범한 증권회사 직원이 수억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되자, 그는 별 고민 없이 일에 뛰어든다. 돈이라는 게 누군가 벌면 누군가는 잃어야 하는 건데, (특히 그것이 뭔가를 만들어 제공해서 번 대가가 아니라, 일종의 도박적 성격을 띠고 있는 주식시장에서, 그것도 가치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단타 매매를 통해 얻은 것이라면 더더욱) 쉽게 말하면 누군가의 돈을 빼앗으면서도 고민을 하지 않을 정도로 무감각한 인물이었던 것.

     흥미로운 부분은 그런 그의 무감각함을 깨운 것이 어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원칙을 마주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생명의 위협을 느낄지 모른다는 생존본능의 덕분이었다는 점이다.(사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윤리적인 행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돈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것이 옳지 못하기 때문에 번호표와의 관계를 끊는 것이 아니라, 나도 그렇게 해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번호표를 쓰러뜨려야겠다는 생각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


 

     챙길 것은 다 챙기면서 위협이 되었던 인물마저 처리하고 돌아가는 조일현의 모습에 씁쓸한 뒷맛이 남는 건 이 때문이다. 영화 속 주요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윤리적인 판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던 한지철이 좀 더 부각되었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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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할 교회를 찾아서 다행이야. 그것도 그렇게 빨리.

네가 전에 교회와 얽힌 부정적 경험을 많이 한 걸 생각하면 더욱 다행이야.

수년간 네가 광야에서 방황한 것도 주로는 그 때문이었지.

하지만 네 말이 옳아.

외로운 방랑자는 될 수 있지만, 외로운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지.


- 유진 피터슨, 사랑하는 친구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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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치의 리더:

민중이 자신감을 가지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

 

우중정치의 리더:

민중이 마음 깊은 곳에 품고 있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을 선동하는 데 매우 뛰어난 사람

 

- 시오노 나나미, 그리스인 이야기 2』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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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밤
한느 오스타빅 지음, 함연진 옮김 / 열아홉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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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는 노르웨이의 한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북유럽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시골의 전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두껍게 내린 눈과 저녁이 되면 거리와 상점에 불이 꺼지고 주택 창을 통해 드문드문 빛이 비치는 곳, 주택가와 좀 떨어진 시내에도 별다른 놀이꺼리가 없어서 순회하는 놀이시설이 유일한 즐길 꺼리인 곳. 특별한 장() 구분 없이 단숨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자신이 확실히 그림을 그려낼 줄 아는 표현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싱글맘으로 아들을 키우고 있는 비베케와 그의 아들 욘. 아홉 살 생일을 하루 앞둔 욘은 엄마가 자신을 위해 멋진 케이크와 선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엄마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쓴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낮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지만, 비베케는 그런 욘에게 진지하게 관심을 쏟기 보다는 자신의 삶에 관해 생각하느라 바쁘다. 식사를 마친 후 욘은 이웃집으로 복권을 판매하기 위해 나가고, 비베케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기 위해 나서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침 도서관 휴관일에 걸린 것을 알게 된 비베케는 이동 놀이시설에 갔다가 한 남자를 만났고, 그와의 환상적인 관계를 떠올리면서 시간을 보낸다. 이웃집에 갔던 욘은 한 노인에게 모두 복권을 팔고는 스케이트를 타고 있던 소녀들을 만나 그 집에까지 놀러가고. 같은 시간,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두 사람에게서 각각 묘한 긴장감과 불안감이 느껴진다.

     작가는 따로 장을 구분하지 않고, 겨우 문단만 바꿔가면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교차적으로 묘사하는 특별한 방식으로 글을 이어간다. 때문에 집중해 읽고 있으면서도 깜빡 하면 이게 비베케의 생각인지 욘의 이야기인지 헷갈릴 정도다. 이런 방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따로 설명은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두 사람이 뭔가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가 아닌가 싶다. 영상으로 표현하면 그냥 장면의 전환이 두 공간을 오고가는 식이겠지만, 글로 보면 마치 두 사람이 정신을 공유하는 느낌이랄까.

 

 

     주인공 비베케의 책에 대한 사랑이 인상적이다. 문이 닫힌 도서관 앞에서 가져온 책을 반납기에 떨어뜨려 넣는 장면에서 작가는 이런 문장을 덧붙인다.

 

책을 바닥에 쌓아 두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오는 일과 같았다.”

 

      정말 멋진 문장 아닌가. 조금 앞에 마을의 작은 도서관을 묘사하는 문장도 예쁘다.

 

이 도서관은 화분에 심긴 예쁜 식물들이 있고 벽에 멋진 포스터도 많이 붙어 있어 일단 오면 정말 기분 좋은 장소였다.”

  

      진심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느낄만한 포인트를 이렇게 잘 짚어 내다니... 이 부분은 비베케가 갖고 있는 소녀 같은 감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누가 도서관 벽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기분이 좋아질까. 이제 아홉 살이 되는 아들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비베케는 낭만적인 만남을 꿈꾼다. 그녀의 이전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런 비베케를 아마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일 듯하다. 순수함은 때로 엄청난 부담감, 혹은 책임감을 느끼게 만드니까. 책을 읽는 속도를 가지고 상대를 알 수 있다고 여기는 여자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될까.

     이 날 밤 선뜻 처음 보는 남자를 따라 그의 트레일러에 머물고 드라이브를 하고 바에 가는 모습도 그런 순진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다만 독자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좀처럼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는 게 함정. 하물며 집에는(사실 집 밖이지만) 어린 아들만 혼자 남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런 순진한 대담함은 유전이었던 건지, 욘 또한 처음 만난 사람들을 아무런 의심 없이 따라다닌다. 처음의 복권을 사 준 노인도, 소녀들의 집도, 그리고 처음 만난 여자의 차도. 그런데 우리나라 같으면 단숨에 유괴 같은 전개가 나올 것은 분위기에서도 이야기는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북유럽 시골 마을의 안전함인가..)

 

 

     ​단 하룻밤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인지라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빠르고 긴박감 넘치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좀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듯하다. 이야기의 결말도 아 이렇게 끝나버리나싶은 면이 있으니까. 무슨무슨 문학상을 받았다는 걸 보면 문학성은 이런 애매함 가운데서 나오나 싶기도 하지만, 뭐 그건 잘 아는 분들의 기준이고.

     노르웨이의 시골마을처럼, 모든 것이 느리고 조용히 지나간다. 그 느린 속도에 함께 올라탄다면 괜찮은 두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는 그가 책을 읽을 때 안경을 쓸 것이라 생각했다. 금속 테로 된 둥근 안경. 한편으로는 그가 책을 빨리 읽는 사람인지 천천히 읽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책을 읽는 속도가 그 사람의 생활 리듬과 삶의 방식을 대변한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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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랫동안 법은 권력자들의 전유물이었다. 고대에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귀족들이 피지배자들을 마음대로 다스렸고, 법률은 그런 권력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지곤 했다. (물론 최소한의 자연법을 따르는 원칙들은 존재했지만, 대개 신분에 따라 차등적으로 적용됐다.) 부르주아 계층이 성장하면서 전통적으로 귀족들에게 유리했던 법률이 보호하는 대상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전히 주로 많은 재산을 지닌 이들이 새로 만들어진 보호막 안으로 들어가긴 했지만, 이건 더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게 만드는 길을 열어둔 것이었다.

     현대 민주주의가 확립되면서 이제 법은 원칙적으로는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적용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법이 공평치 않다고 여기는 것은, 여전히 법을 만들고, 적용하는 이들이 소수의 특권층이기 때문일 것이다. 절차적으로는 국민들에 의해 선출되었다고는 하나 국회의원들은 소위 당리당략의 영향력 아래서 벗어나기 어렵고, 정당 정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다시 일종의 권력을 가진 이들일 수밖에 없다.

     적용부분도 마찬가지다.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에 합격한 이들이 검사와 판사가 되어 법을 적용하는데, (비록 일부라고는 하더라도) 이들이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해 자기들만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걸 막을 수 없다는 건 최근 불거진 사법농단의 내막을 보면 알 수 있다.

 

 

 

 

 

     문제는 법이 소수에게 독점되는 상황에서라면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이를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는 수단이 바로 배심원제다. 우리나라에선 2008년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제한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이 영화는 바로 그 첫 재판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영화 속 호기심 많고 끼어들기 잘하는 권남우(박형식)가 다른 배심원들과 함께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피고인의 누명을 풀어준다는 내용.

 

     ​상업영화다 보니 어느 정도의 상업적 코드(유머라든지, 인물들의 충동적 행동이라든지)가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건 감안하더라도, 주인공은 지나치게 돌출적이다. 법원 내부를 혼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관리자도 없는 피의자와 일대일로 마주친다는 게 말이 될까? 시종일관 감과 감정에 좌우되는 모습은 오히려 배심원제도에 대한 회의감을 주기도 하고..

     사실 국민참여재판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반대하는 편에서 꺼내든 가장 대표적인 주장은 비전문가인 시민들이 재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도 일부 법관들은 비슷한 인식을 드러내면서, 이 재판을 법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부각시킬 수 있는 재료로 삼으려고 한다. 그만큼 사건은 이미 법률적으로는 결론이 나 있는 상황이었고, 배심원들이 형량만 제안하면 법관이 그걸 적당히 고려하는 시늉을 하며 판결을 내린다는 시나리오.

     법률적 지식이 부족한 평범한 사람들이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설정은 흥미롭다. 일종의 약자의 반란, 반전 같은 느낌을 주니까. 사건을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경찰이나, 이에 대한 공소를 유지하는 검찰에서도 여전히 놓친 부분을 비전문가들이 찾아내는 일이 늘어난다면 꽤나 곤란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다만 영화 속에는 배심원 제도의 약점이나 한계점도 언뜻 보인다. 결과적으로 진상을 밝혀내기는 했으나, 특정한 배심원(주인공 권남우)은 어느 순간 사건에 대한 예단을 가지고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듯하다. 증거가 없는데도 아닐 것 같다는 심증으로 증거들을 부정하기 시작하는데, 결과가 제대로 나왔으니 망정이지 단순한 동정심 같은 감정으로 사안을 그르치는 경우가 나온다면 낭패가 아니었을까.

     범죄자에게 무조건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만이 인권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용서와 화해라는 가치는 매우 고귀하지만, 그건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강요되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없는 문제다. 피해자를 고려하지 않는 인권 옹호자가 배심원이 된다면, 그래서 영화의 주인공처럼 잘 모르겠지만 무조건 아닐 수도 있다는 식으로 분위기를 주도해 나간다면 그건 제대로 된 사법절차의 일부일까. 게다가 여기에 모든 사람은 각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얼치기 포스트모더니스트까지 끼어들기 시작한다면? 배심원 선정제도는 이런 일들을 걸러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배심원 제도는 시민 일반의 인식을 사법제도에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제도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권위의식에 쩌든 법률전문가들은 간단히 그런 이들을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겠지만. 배심원 제도가 만능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시도해 볼 수 있는 대안 중 하나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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