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5년의 종교회의는 주교들에게 개를 기르지 말라고 지시했다.
개들이 가난한 자들의 접근을 막아서 그들이 굶어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미리 루빈, 『중세』 중에서
우리나라 대형 교단의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4년제 정규 학사 학위(전공은 따지지 않는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2년(감리교의 경우), 혹은 3년제 신학대학원을 졸업해야 한다. 졸업 후에는 교단에서 주관하는 소정의 시험에 합격할 것이 요구된다. 이후 몇 년 간의 일종의 수습 기간을 거친 후 목사라는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교육부 인가를 받은 상태로 진행된다. 물론 규모가 작은 교단 같은 경우에는 이런 정규교육과정이 아닌 좀 더 간략화 된 과정을 통해서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도 하다. 전국에 수많은 소규모 ‘(교육부) 비인가 신학교’가 존재하기도 하고,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도 정규 대학원 과정 이외에 (아마도 등록금 수입을 위해서)비인가 목사교육 과정이 동시에 존재하기도 했다. 심지어 몇몇 소규모 교단에서는 ‘(방송)통신과정’을 통해서도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신학교육 과정은 언제부터 존재했던 걸까. 교회사와 관련해 흥미로운 책을 많이 써내고 있는 후스토 곤잘레스가, 이 익숙하지만 제대로 해 본적 없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역사적으로 추적해 낸다.
저자에 따르면 교회는 매우 오랫동안 ‘정규적인 신학교육 과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무려 15세기 동안 그랬다. 초기 기독교 시기에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거나 성직자가 되는 데 필요한 신학교육기관이 당연히 없었다. 그 시절에는 새롭게 교회에 가입하는 사람들을 위한 예비 세례자 교육만이 있었다. 그런 교육과정은 종종 몇 년씩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
상황이 바뀐 건, 콘스탄티누스가 로마의 기독교화를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갑자기 엄청난 사람들이 이들이 교회로 몰려들면서, 이들을 교육할 수 있는 충분한 교사와 시간이 부족해져버렸다. 몇 년씩 걸리던 세례교육과정은 점점 짧아져서 몇 주로 단축되었고, 일단 세례를 받고 서서히 기독교인의 자격과 지식을 갖출 것을 기대했다.
야만족들이라고 불렸던 게르만족이 서유럽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상황은 조금 더 변했다.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교회의 성직자들만 남게 되면서, 그들은 게르만족 왕궁에서 관료로 활동했고, 한편으로 수도원 등을 중심으로 학문(신학과 철학)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전통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전 시대 모든 이들에게 권장되던 신학교육이 특정한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변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대학이라는 기관으로 발전한다.
종교개혁의 파도가 몰려들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변화를 맞이하는데, 비로소 신학교육을 위한 교육기관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전 시대 제대로 된 신학교육 없이 예배와 목회직을 맡았던 이들이 일으킨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와 로마가톨릭 진영에서 서로에 대한 신학적 공격과 방어를 위한 지식인을 양성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는 것.
긴 역사를 하나의 주제로 엮어내는 능력에 박수를 보낸다. 하나하나 탐색하면서 읽어볼 만한 내용이 잔뜩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진가는 책의 마지막 두 장에 있는 것 같다. 저자는 역사적인 검토를 마친 후, 오늘날 신학교육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간략하게 분석한다. 고작 두 장에 걸친 고찰이지만, 신학교 현직에 있는 사람답게 그 안에 담긴 문제를 날카롭게 끄집어낸다.
오늘날 신학교의 교육은 단지 기능적인 차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고, 신학 교육이 한 사람의 신앙과 그가 앞으로 사역자로 해 내야 할 직무능력을 신장시키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신학교 교육이 교회 현장과 유리되면서 이런 경향은 가속되고 있고, 단지 ‘목사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양산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식의 ‘정규 신학교육’이 어느 정도 한계에 부딪혔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실제로 미국 유슈의 신학교들은 아시안계 유학생들이 없다면 심각한 재정적 위기에 처해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은 이미 국내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서 신학교 지원자수의 급격한 감소로 나타난지 오래다.
이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그래봤다 전체 기독교 역사의 1/6 정도 기간 동안 유지되었던) 방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체제를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쉽지 않은 일이고, 안타깝지만 잘 될지 확신하기도 쉽지 않고. 교단과 교계의 기득권층으로 꽉 들어찬 신학교는 마지막 순간 어쩔 수 없어 등 떠밀릴 때까지 버틸 것처럼 보이니까.
기독교 신학교육의 어제와 오늘을 훌륭하게 정리한 책.
(너무) 큰 스케일의 우주 서사.
지금으로부터 수만 년 후의 미래를 배경으로, 은하계 단위의 영토를 가진 “제국”과 그에 속한 대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다룬 엄청난 스케일의 영화다. 자칫 유치해지기 쉬었지만, 이야기를 볼꺼리 쪽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정치적 음모, 그리고 그 배경에 있는 더 큰 계획이 좀 더 두드러진다. 괜찮았던 선택.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의 CG를 못 봐줄 만한 정도였다는 의미는 아니다. 특히나 잠자리 모양의 소형 비행선은 아주 인상적이고, 개인의 몸을 덮은 보호막이나 거대한 함선 등도 눈길을 끈다. 그리고 배경이 우주 단위이다 보니 짧은 시간 등장하지만 엄청난 규모의 우주 군대도 장관이고. 무엇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모래 가득한 행성과 거대한 모래지렁이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이렇게 규모가 큰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일단 틀을 잡는 데 시간이 꽤나 걸린 듯하다. 원작이라는 소설을 먼저 읽어본 사람이라면 배경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겠지만(근데 이쪽도 도서관에 갔다가 엄청 두꺼운 책들을 여러 권 본듯해 쉽지만은 않을 듯), 나처럼 영화를 먼저 본 사람은 흘러가는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 초반 한참 주의를 기울여야 할 듯하다.
에를 들면 영화 속 세계관에서 중요한 자원인 스파이스가 무엇인지, 그게 어디에 쓰이는지 같은 내용은 초반에 책 내용으로 흘러가는데, 너무 금방 지나가서 제대로 설명이 되지 못한다. 또, 수만 년이나 지난 미래에 어째서 이런 봉건제가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지, 사람들이 칼을 들고 싸워야 하는지 같은 부분은 따로 작품의 배경에 관한 설명을 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고.
그렇게 영화에 말미에 이르면.... 음? 지금 2시간짜리 도입이었어?
실현된 예언.
영화의 메인 스토리는 제국의 대귀족 아트레이드 가문의 후계자인 폴이 오랫동안 이어져 온 에언 속 구원자라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를 비롯한 세계의 여러 종교들에서 유사한 내용의 전설, 혹은 예언이 발견된다는 점은 흥미롭다. 현실의 문제에 대한 불만과 그에 대한 해소의 희구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현상이고, 그걸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인물을 미래에서 찾는 것도 그 연장선인 듯하다.
영화는 예언의 실현을 다룬다. 진실한 예언은 그렇게 실현으로써 증명된다. 물론 예언의 실현까지는 오랫동안 기다림이 필요하다. 영화 속 반(半) 비밀결사인 베네 게세리트는 그렇게 예연의 성취를 기다리는 인물들로, 오직 여성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독특한 조직인데 오직 예언의 성취에 모든 것을 건 채 다른 것을 포기한 듯하다.
예언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리석게만 보일지도 모른다. 당장 손에 잡히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로 잔뜩 채워져 있는 세상에서는 더욱 더. 하지만 예언이 실현된 후에는 비로소 그들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았음이 증명되는 동시에, 그 기다림이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물론 어쩌면 그 실현된 모습이 그들의 기대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믿음이라는 건 그런 기다림과 보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기다림의 시간이 길수록, 그 보상도 더 만족스러운 법이다.
기독교의 독특한 점 중 하나는 그 ‘기다림’이 끝났다고 주장한다는 부분이다. 예수가 오래 전 예언자들이 말했던 세상을 구원할 분이시고, 그분이 마침내 자신이 할 일을 끝냈다는 것이 사도들의 선언이었다. 이런 면에서 영화의 주인공 폴(“바울”이다)은 예수, 또는 그의 제자들과 오버랩 된다. 그는 적들에 의해 고난을 당하면서 차근차근 자신이 실현해야 할 운명을 향해 나아간다.
미리 본다는 것.
주인공 폴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능력(아직까지는 과거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 정도)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보면서 걷는 자’였다. 물론 아직까지는 자신이 보는 환상이 실제로 일어날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지만, 결국 그는 자신이 보는 것을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믿음을 가진 이들이 실제로 뭔가를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다. 그들은 이미 성취된 예언들을 보면서,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들이 실현될 날을 미리 본다. 그들이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겠지만, 일단 그들이 보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면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오늘의 기독교가 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즉각적이고 피상적인 읽기가 문자적 읽기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권위와 영감, 무오성은 최초의 인간 저자가 의도했던 정보에 주어져야 한다.
- 휴 로스, 데보라 하스마, 『창조론 대화가 필요해』 중에서
아직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던 1900년대 중반, 이야기의 주인공인 엘우드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고등학생이었다. 밖에서는 마틴 루터 킹이 이끄는 흑인인권운동이 한창 시끄러웠던 당시,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던 엘우드는 자신이 겪고 있는 (노골적이거나 은폐되어 있는) 차별적 일들을 점점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졸업이 다가올 즈음, 학생들의 입장에서 바라볼 줄 아는 선생 힐의 추천으로 대학과정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엘우드. 그러나 학교로 가기 위해 얻어 탄 자동차가 하필 도난당한 차였고, 제대로 된 재판 없이 소년 구금 시설에 수용되고 만다. 학교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감화원에서는 온갖 비인권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 안에서 이런저런 충돌을 겪으면서 엘우드의 생각은 점점 더 무르익어간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는 방식으로 쓰였다. 현재의 엘우드가 과거의 엘우드를 회상하는 식. 감화원이 있던 저리에서 발견된 수십 구의 시신들로 인해, 그곳에서 벌어졌던 만행이 사회에 드러나게 된 건 그가 그곳에 있었던 때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 다른 말로 하면 너무 늦은 때였다.
인종차별, 아니 흑인혐오가 보편적이었던 그 음침한 시절, 최소한의 타인의 시선조차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을 읽어나가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었다. 그건 후기에서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가 (다행이도) 실화가 아니라는 걸 작가가 밝힌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니클의 감화원이 실재하지는 않았더라도, 우리 곁에는 그와 비슷한 기관들, 경험들이 너무나 많으니까.
가깝게는 우리나라에도 형제복지원 사건이라든지, 도가니 사건 등 장애인이나 힘없는 아동, 청소년들을 향한 착취와 폭력이 배어있는 과거사들이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직장 내 갑질이라든지, 간호사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는 태움 같은 악습들, 집단 따돌림 같은 이야기들이 익숙한 상황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도 하고.
이 작품이 단순히 그런 현실 속 문제를 투영해 고발하는 르포 형식으로만 진행되었다면 감동은 반감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는 이 주제를 훌륭한 솜씨로 그려낸다. 니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하나씩 이어지면서 점점 그 결말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고, 마지막 부분에는 반전까지 삽입되어서 조금은 어벙벙한 상태로 결말을 맞는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전체적으로 무슨 미국 고전 소설을 읽는 느낌이 든다.
이런 끔찍한 일이 무슨 수백 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태어나기 고작 수십 년 전(태어난 후 살아온 시간보다 더 적은) 일들이라는 걸 자각하게 될 때마다 소름이 끼친다. 그리고 여전히 그 문제는 다 해결되지 않은 것 같다는 게 괴롭고.
소설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웠던 부분은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들(흑인 소년들)이 이런 구조적인 억압과 차별에 익숙해져 가는 모습이었다.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포기하고 위축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수많은 가능성들이 꺾이고 묻혀버리는 일이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꽉 막힌 조직과 분위기는 그 사회를 질식시켜버리고 만다.
미국 사회의 어제와 오늘을 관통하는 가장 큰 문제를 잘 드러내주는 작품. 퓰리쳐상은 이런 작품이 받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