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고래뱃속 창작그림책
백혜영 지음 / 고래뱃속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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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처럼 보이는 동글동글한 민트색 캐릭터가 앞서 달려가는 노란 새 모양을 쫓아가는 이야기다. 민트색은 노란색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지만, 아무리 열심히 달려가도 녀석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고, 주변의 알 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누구도 속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그렇게 한참을 쫓아가다 어딘지 모를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간 주인공. 어둠 속에서 모든 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조금씩 자신과 그 주변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깨달은 자신의 이름. “오늘”.



사실 이 그림책의 스포는 제목이다. 제목에 떡하니 “내일”이라는 이름을 붙여놨으니.... 아무리 따라가려도 해도 손에 잡히지 않은 노랑이의 정체가 ‘내일’이라는 건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책의 색감이 전반적으로 어둡다. 연필로 그린 그림으로 보인는데, 앞에서 말한 민트색과 노란색을 제외하면 나머지의 경우는 연한 파스텔 색상만 살짝 보인다. 특히 어묻 속으로 빠져 들어간 부분에서는 몇 페이지에 걸쳐서 검은 바탕만 나오기도 하고. 작가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표현했을 텐데, 현재가 느끼고 있는 답답함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주인공 캐릭터가 워낙에 단순한 이미지다보니 큼지막한 페이지의 나머지 공간을 채우는 것도 일이었겠다 싶다. 그런데 이쪽도 조금은 몽환적인 느낌이랄까, 그런 그림들로 채워져 있다. 나무도, 풀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모양과는 다르다. 꿈속에서 볼 법한 환상적인 형태의 사물들이 잔뜩 놓여있다. 그리고 언뜻 잘 보이지 않지만, 배경에는 소소한 캐릭터들도 보인다.



내일에 목을 매로 쉴 새 없이 달리느라,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지적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진리다. 우리 손에는 언제나 ‘오늘’만 쥘 수 있는데, 우리는 쥘 수 없는 내일에 모든 걸 걸려고 한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 소중한 사람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거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일은 어리석다. 무엇보다. 지금의 나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는 일도 큰 문제고. 사실 우리의 삶이란 그리 길지 않고, 하루하루를 그저 소비해버리기엔 너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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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선 기독교 - 공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김명윤 옮김 / IVP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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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는 ‘공적 신앙’(원서의 원제도 “A Public Faith”다)에 관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게 2014년이고, 원서가 나온 건 2011년이니 벌써 10년이 된 셈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공적 신앙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개인적 차원에서의 실천 시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공적 신앙을 위한 제대로 된 신학을 정립하고 가르치거나 하는 일은, 일선 교회에 차원에서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공적인 영역에 나설 때, 자신의 신앙을 마치 외투를 벗어 벽에 걸어두듯 잠시 없는 것처럼 생각하려고 애쓴다. 공개적인 영역에서 어떤 사람의 신앙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피해야 할 일로 여겨진다. 예를 들면 “100분 토론”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하면서 그 근거를 윤회사상이나 구속 신앙에서 찾는다면 어떤 댓글이 달릴까?


사실 이 부분에서 기독교는 소위 무속종교보다 더 열악한 상황인데, 후자의 경우는 예능이나 종편의 유사 시사프로그램에서 종종 하나의 코너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니 말이다.



저자인 볼프는 기독교 신앙이 지극히 내세적이고, 개인구원이나 ‘복 받는 삶’ 따위에 집중하는 ‘신비주의적 종교’가 되어가는 상황을 비판하면서 ‘예언자적 종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언자적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은 신의 이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는 점인데, 오늘날의 신앙은 일종의 기능장애에 빠져 애초의 이런 목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유를 찾아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유럽의 경우 “30년 전쟁” 이후 종교가 갈등의 씨앗이 될 수 있음을 처절하게 인식했고, 곧 이어지는 르네상스는 종교가 아닌 인간의 가능성에서 소망을 찾고자 하는 시도였다. 20세기에도 여전히 곳곳에서 종교로 인한 갈등이 많은 사람들을 위기로 몰아넣었고, 지난 2001년 벌어진 9.11 테러는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의 정점을 찍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종교가 사람들의 공적인 삶을 해칠까? 볼프는 적어도 기독교만큼은(이건 다른 종교는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니라, 저자가 기독교인이기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잘 알고 말할 수 있다는 의미다) 종교적 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그 신앙에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신앙에 더욱 충실해지는 데서 발견될 수 있다고 말한다.


표층적이면서 열광적인 신앙은 자칫 폭력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나 심층적이면서 헌신된 실천은 평화를 낳고 유지한다. 특히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궁극적인 번영에 관한 비전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목표와 의미, 그리고 어떻게 그 목적지에 이를 수 있는지를 기독교 신앙은 보여준다.



책은 크게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에서는 공적 신앙의 필요성,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 2부에서는 어떻게 하면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은 목표를 실천할 수 있을까에 집중한다. 다원주의 아래, 다양한 사상과 신앙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기독교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저자는 적응이나 도피/고립과 같은 태도는 적절하지 않으며,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반복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혜를 나누고, 사랑과 용서를 기조로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기꺼이 다른 이들을 환대할 수 있도록 우리 삶의 구조를 변화시켜야 할 필요도 있다.


다만 이 부분에서 구체적인 지침, 혹은 예시라고 할 만한 것들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특히나 이 책이 공적인 영역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실천의 영역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이론적 차원으로만 제안되는 점은 상당히 아쉽다.



사실 이 책의 공헌은 공적인 영역에서 신앙의 자리가 치워지거나 봉쇄되는 상황에 문제가 있음을 일깨워 주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점에서라면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는 있었던 것 같고. 가장 중요한 지적은 역시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실천은 부가적인 영역이 아니라 그 신앙적 본질의 영역이라는 점이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믿을까에만 집중 한 채,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머물러 있는 상황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운전면허증은 도로에 나가 차를 운전하기 위해 취득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면허장 내 연습 주행코스만 반복해서 오고가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볼 터.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꼭 그렇게 보인다고 하면 조금 지나친 말이려나.


한 번 읽어 볼만한 책. 다만 조금 더 쉽게, 잘 풀어놓은 책이 계속 나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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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아줌마가 개였다면, 진작 사람들이 안락사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항상 사람에게보다 개에게 더 친절한 탓에 

사람이 고통 없이 죽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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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피터의 고백 - 프란츠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마히 그랑 지음, 서준환 옮김, 프란츠 카프카 원작 / 늘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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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전시하기 위해 밀림에서 잡아온 고릴라 한 마리가 있다. 놀랍게도 녀석은 유럽으로 실어오는 배 안에서 사람의 행동을 관찰하기를 한참, 어느 날 “안녕”이라는 사람의 말을 내뱉는다.


곧 이 신기한 원숭이는 서커스단에 팔려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좀 더 큰 (경제적인) 잠재력을 알게 된 사람들에 의해 대도시로 옮겨와 사람의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어느 덧 5년 만에 성공한 유명인이 된 그가, 학술원의 회원들 앞에서 자신의 진화 과정을 담담하게 회고한다는 내용의 이야기.



흥미로운 소재다. 사람이 된 원숭이라... 작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걸까. 이 책은 그래픽 노블로, 원작은 프란츠 카프카가 쓴 소설이다. 만화처럼 구성되어 있는데, 대사가 그리 쉽거나 간단하지 않다. 책 전반에 걸쳐서 뭔가 부조리하고, 조금은 이상하기도 한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한다.(생각해 보면 이게 카프카 소설의 특징인 것 같기도 하고)


아마도 이런 ‘이상함’의 가장 큰 이유는 사람처럼 말하는 원숭이라는 주인공 때문일 것이다. 비슷하면서도 이질적인 존재인 유인원이 사람의 옷을 입고 말하는 건 동물원의 공연장에서는 지극히 평범하면서 유쾌하기까지 한 모습이겠지만, 그게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일어난다면(그와 비슷한 배경을 지닌 소설 속 캐릭터라면) 확실히 조금은 어색할 것 같다.


당연히 소설 속 사건(5년 만에 고릴라가 인간처럼 되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작품의 내용 역시 이런 특별한 일이 어떤 과학적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어차피 작가도 독자고 이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보는 거니까. 그리고 이런 불합리한 사건에 관한 묘사 속에 당연히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담겨 있다.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주인공 피터가 굳이 인간처럼 사고하려고 애쓴다거나,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이 진화의 과정에 무슨 역사적인 의미라든지, 철학적 사유가 들어갈 자리를 없애 버린다. 학술원에서의 그의 마지막 멘트는 그저 이런 삶도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는 것뿐이었다.


강연 내내 피터는 인간의 ‘자격’이라든지 ‘조건’이라든지 하는 게 실은 별거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피터는 자신의 진화를 자유를 향한 열정이나 도전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반대로 애초에 자신은 자유를 갈구해 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저 창살 안에 갇힌 답답함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을 뿐. 그가 인간의 행동을 따라했던 건 다시 갇히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피터는 스스로 “인간 사회에서 중간쯤 되는 문화적 수준”을 체득했다고 말한다. 그 수준이란, 너무 현란하지도 않고, 너무 빈약하지도 않은 사고 수준에, 여흥을 적당히 즐길 줄 알고, 별다른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서 순리대로 적응해 나가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다. 피터가 그렇게 살아갈 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다시 우리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엔 인간의 장점, 혹은 특별한 점이라고 꼽는 창의성이나 철학적 사유, 도덕이나 윤리 등이 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 것 없이도 충분히 인간 사회는 돌아간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작가는 그런 것들에 관한 인간의 허위의식을 지적하고 있다고 봐야할 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니들 사는 걸 보면 딱히 특별해 보이지도 않는데 뭘 그렇게 뻐기고 있냐 라는 식의.



물론 이건 작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 속 인간 사회가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그런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을 빼놓고서는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자아에 갇혀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사고와 그 피해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지, 그런 가치들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니다.(실제로 우린 이 부분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분통을 터뜨릴 때가 적지 않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저 평범한 중류층의 사람들의 삶 속에서 그런 가치들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은 또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건 인간을 흉내 내는 고릴라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삶일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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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6-10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노란가방 2022-06-11 16:3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선릉 산책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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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제목을 보고 손에 든 소설집이다. ‘선릉 산책’. 딱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고, 소설 속 선릉역 인근은 내가 가장 자주 돌아다니는 지역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돌아다녔던 거리의 풍경을 읽으면서, 기억 속 내가 봤던 골목들 어디쯤일까 하는 상상이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좀 더 몰입이 됐다.


이 책은 일곱 편의 중편 소설을 모아 놓은 소설집이다. 표제이기도 한 ‘선릉 산책’은 그 중 세 번째로 실려 있는 작품. 각각의 이야기들은 등장인물도 내용도 독립적인데, 한 가지 공통적인 소재가 있는 것 같다. 모두 어딘가를 ‘걷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삶이라는 게 그렇게 계속 어딘가로 걸어가는 일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소설 속 ‘걷는 일’은 ‘살아가는 일’이기도 했던 것 같다.



일곱 개 이야기 속 인물들과 그들이 마주하는 사건들이 모두 개성이 있다. 다들 삶의 무거운 무게를 어깨에 지고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걷고 있는데, 아무리 대화가 진행되어도 그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슨 벽에 부딪힌 건 아닌데, 뭔가 좀처럼 서로의 생각이 만나지 않는 달까.


예를 들면, 표제작이기도 한 ‘선릉 산책’ 속 주인공은 아는 형의 부탁으로 하루 아르바이트를 대신하게 된 인물이다. 그가 하게 된 일은 토요일 오전부터 오후까지 발달장애를 갖고 있는 한 소년과 함께 선릉역 인근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 겨우 하루 동안의 시간이지만, 그리고 정상적인 의사소통도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둘이 함께 선릉역 인근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고 공감을 이루는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작가는 여기에서 변주를 준다.


소년의 보호자로부터 세 시간만 더 맡아달라는 연락이 온 것. 갑작스러운 연락을 받고 주인공은 급격히 짜증이 치솟았고, 어둑해질 무렵 공원 어딘 가에서는 동네 양아치 청소년들과 사건도 발생한다. 서로 친해진 줄 알았던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투명한 장벽이 생겨버린다.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한다’고 말할 때 거기에 담긴 무게는 얼마나 가벼운지...



그렇게 모든 이야기 하나같이 말끔하게 끝나는 건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영 어영부영 밋밋하고 찝찝하게 끝나기만 하는 건 아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나름의 결말이 있는데, 그게 썩 공감이 되는 측면이 있다. 아마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결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은.


이야기가 너무 어렵지도, 그렇다고 가볍거나 하지도 않다. 읽던 도중 다른 생각이 들거나 하지 않게 재미도 있고.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재능있는 작가 같다. 다음에 또 만날 기회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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