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환경문제 안내서라고 보면 될 것 같다. 1장에서는 현재의 위험한 상황을 열거하고, 2장에서는 지금 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에 관해 언급한다. 채식을 하고, 여행을 줄이고,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각종 행동들을 줄이자는 것. 3장과 4장은 주재가 살짝 모호한데, 3장의 경우는 환경과 관련된 좀 더 일반적인 문제제기를, 4장은 환경운동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한 공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각 항목이 짧게 구성되어 있어서 끊어 읽기에 좋다. 또 책의 가상독자를 청소년으로 상정하고 썼기 때문에, 지나치게 전문적인 내용 등으로 어렵게 구성되어 있지도 않아서 쉽게 읽힌다. 각 장마다 토론 주제까지 던져주니 소그룹에서 이야기를 해 보는 데에도 도움이 될 듯하고.
사실 이 이유와 관련해서 아주 새로운 논의나 정보가 담겨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 관련 서적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라는 뜻. 그래도 관련 논의를 두루 잘 설명하고 있는 것 같다.
책 전반에 걸쳐 환경과 관련한 저자의 위기의식이 강하게 느껴진다. 이미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곧 넘어설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니까. 단순히 여러 문제들 중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일침은 곱씹을 만하다.
기후문제를 부정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제기되고 있는 문제 현실을 어떻게 극복, 혹은 해결해 나갈지를 두고서는 의견이 좀 갈리는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의 경우 채식을 하고, 환경오염을 일으킬 수 있는 여러 가지 활동을 중단, 혹은 축소하는 것이 답이라고 제안하고 있지만, 그게 유일한 대답은 아니라는 말.
우선은 채식이 정말로 환경친화적인지의 여부도 의심스럽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도 반문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말을 어떻게 돌려대든 이제까지 환경을 오염시키며 발전해온 국가들이 이제 발전하려고 애쓰는 국가와 사람들을 제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 쉬우니까. 또, 빌 게이츠가 말하는 식으로 기술을 통한 극복이 유일한 대답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개인의 노력이 갖는 규모의 제한성도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없고.
물론 저자도 언급하듯이, 결론이 나온 뒤에 행동하는 것은 이미 늦어버릴 지도 모른다. 우선 뭔가를 하면서 이어지는 발견과 발전된 또 다른 일들을 추가로 해야 하는 상황에 좀 더 가까울 테니까.
주변의 청소년들과 환경과 관련된 논의를 함께 나누는 데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듯한 책. 다만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말아야겠고.
세상에는 읽는 이의 근성을 시험하기 위해 쓰였다고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난해한 책이 있다.
그런 황당무계한 책은 손에서 되도록 빨리 떠나보내야 한다.
- 가마타 히로키, 『책 읽기가 만만해지는 이과식 독서법』 중에서
간만에 본 그림책이다. 표지에 통통하면서 귀여운 흑인 어린이가 뭔가를 찾는 듯한 표정으로 큼지막하게 그려져 있어서 호기심을 자아낸다. 전반적으로 보랏빛 바탕에 별들로 쓰인 ‘술웨’라는 제목도 썩 멋있다. 전반적인 그림체는 일러스트 느낌이라 이전에 봤던 책들과는 차이가 있다.
또 하나 본문으로 넘어가기 전에 언급해야 할 요소가 남아있다. 바로 저자인 루피타 뇽오다. 이 이름이 익숙한 사람은 아마 헐리우드 영화를 꽤나 좋아하는 분일 듯한데, “노예 12년”을 시작으로, 좀 더 유명하게는 마블의 “블랙팬서”에 여전사 나키아 역으로 출연했던 바로 그 배우다.
작품은 주인공 술웨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른 아침 해가 뜰 때의 하늘같은 어머니와 해가 질 무렵의 노을 같은 아버지의 피부색, 그리고 한낮처럼 환한 언니까지, 술웨는 자신이 누구와 닮지 않은 짙은 검은색 피부를 가지고 있음을 속상해 하고 있다.
그날 밤, 별똥별을 타고 밤과 낮이라는 자매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를 듣게 된 술웨는 비로소 자신의 이름처럼(스와힐리어로 술웨는 ‘별’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자신을 어둠게만 보지 않고 빛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다.
이야기는 인종차별과는 또 다른 차원의 차별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애초에 모두 흑인이었으니까. 여기서 제시되는 건 이른바 ‘색차별’이라고 불리는 차별이다. 오랜 유럽의 식민지 시절을 거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백인들의 피부색을 미인의 그것으로 여기는 문화가 많이 남아있다. 따지고 보면 이 또한 제국주의의 유산인 셈이다.
동화는 다름의 이해, 그리고 겉모습이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담고 있다. 한 때 세계화 시대가 온 세상을 한 가족으로 만들어 줄 거라는 순진한 기대를 하기도 했었지만, 오늘 우리는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자국이기주의가 현실화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자유무역의 이상은 점차 희미해지고 자국우선주의가 외교와 경제의 영역에서 점점 주가 되고 있고, 한 나라 안에서 민족 간, 인종간 갈등은 그치지 않고 있다.
낮도, 밤도 모두 필요한 것이라는 동화 속 메시지는 오늘 우리 사회에 얼마나 울림을 줄 수 있을까?
물론 세계라는 스케일로 보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시골’에 살고 있지만, 산업화된 국가의 경우 적지 않은 비율로 도시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서울과 그 주변의 경기도, 인천을 합쳐서 인구의 절반이 살고 있고, 그 중 대부분은 도시 거주민이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도 군대에 있었던 36개월을 제외하고는 이제까지 도시에서만 살아왔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익숙한 도시생활이지만, 편리함이라는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흔히 “도시”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 삭막하고, 정이 없고, 개인주의가 심하고, 다른 사람의 삶에 별 관심이 없으며, 상업적이고 하는 것들이다. 요컨대 도시는 물질적이다.
현대의 새롭게 만들어지는 도시들은 물질성(혹은 경제성이나 효율성)을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고 계획되어 있다. 사람들은 오직 소비할 때만 모이고, 원하는 것을 구입한 후에는 흩어져서 각자의 둥지에 들어가 개인적인 삶을 이어간다. 각 구획으로 나뉜 도시의 구조는, 사람들의 삶을(그리고 삶에 대한 감각을) 분열시켰다. 아마 이게 도시에 관한 전형적인 이미지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이미지에 조금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정말로 도시가 그런 곳일까, 처음부터 도시는 그런 곳이었을까. 저자는 서양을 배경으로, 특별히 기독교 전통 속에서 도시에 관한 좀 더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태도가 일찍부터 발견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부터 수도원 전통이라는 조금은 의아한 예를 끄집어 든다.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시를 완전히 분리시키고, 세상으로부터 고립된 그들만의 공간인 수도원을 만드는 전통과 세속 도시에로의 참여라는 주제가 어떻게 연결된다는 걸까? 저자는 언뜻 이런 전통들이 신앙과 세상의 완전한 분리를 말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세속 사회에 대한 강력한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그런데 이 부분에 썩 크게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기독교의 사회 참여, 그리고 도시라는 상징적인 공간이 성경과 기독교 전통 안에서 결코 소외되지 않는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고대와 중세 수도원 전통을 도시로의 참여와 연결 짓거나, 아우구스티누스의 “두 도시(도성)”를 반어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과연 그 좋은 해석일까? 그저 현대의 관점을 지나치게 고대에 이입시키는 시대착오적 이론은 아닐까도 싶고.
물론 앞선 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도시나 세상에 관해 그런 약간은 분리적인 생각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실제로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 수 있었다거나, 오늘 우리도 그런 고립주의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또, 근대에 이르러 새롭게 강조되어 왔던 것처럼 사실 성경 속 다양한 이야기들은 세상에로의 적극적인 차며를 독려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그걸 너무 억지로 작업하지는 말자는 것.
책의 2부는 약간 어렵다. 주로 철학이 물씬 묻어나오는 신학적 고찰들인데, 장소, 공간, 공동체 같은 주제들에 대한 검토다. 이런 검토를 마친 뒤 결국 저자가 하려는 말은 ‘공동선’에 대한 강조, 기독교인들 또한 이를 위해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인 듯하다.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고 따로 부정할 만한 게 없는 이야기.
다만 이런 당위에 그칠 것이 아니라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맥락에서 좀 더 설명해 주기를 바랐는데, 책은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살짝 아쉬운 부분. 그리고 기독교의 사회 참여에 대한 비전을 설명하는 하려는데 이 책은 지나치게 어렵다. 그게 어디 소수의 엘리트 학자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닐 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