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래 성품 중, '익숙해짐'에 반대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애착'일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한 끈질긴 사랑'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단어는

앞서 말했던 '익숙해지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익숙해짐'이 대상을 오래 접하면서 나타나는

무관심, 무배려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애착'은, 대상과 오래 함께하면서 생겨나는

그 대상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다. 

 




사람은 누구나 애착이 가는 대상이 있다.

그것이 돈 일수도 있고, 사람 일수도 있다.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에 애착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돌맹이에 애착을 가지는 사람도 있다.


 


길 가다가 우연히 주운 작은 조약돌 하나라도,

그것을 오래도록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보면

버리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주머니 속에 있는 조약돌을 오랫동안 만지작거리다보면,

어느 순간 그것이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질때가 있다.

그래서 그 돌맹이를 차마 버릴수 없어 늘상 들고 다니고,

만약 없어지기라도 한다면

(대부분 세탁하려다 그것을 발견한 어머니의 손에서 사라진다),

한동안 아주 허전함을 느낀다.


 


물론, 이 정도로 예민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빗방울 하나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어봤냐고

친구한테 물어봤다가,

무안만 당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애착이란 것은 정도와 대상의 종류에만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사람이 가지는 성질 중 하나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것에 가장 많은 애착을 보일까?

내 방 창가에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쉬엄쉬엄 쓰고 있는 글이라

특별히 설문조사 같은 것을 해 본바는 아니지만,

그동안 읽어왔던 수많은

역사서적들(역사 만큼 이 물음에 도움이 되는 자료가 있을까?)과,

소설들,

신문(이 매체를 다룰때는, 그것이 천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과장, 왜곡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TV(이것은 소설과 더불어 여러 사람들의 삶을 대신 살게 해 주는 주요한 도구이다),

그리고 내가 만나본 여러 사람들을 종합해 볼 때,

그것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사람에 대한 애착만큼 강한 것이 또 있을까?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

가족에 대한 애착,

친구에 대한 애착,

심지어 인류에 대한 애착까지..

'사람에 대한 애착'이라는 표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범주의 것들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이 가지는 애착이

'인류전체에 대한 애착'으로 발전하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대부분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과 관련된는 매우 근접한 범위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닥쳐올 문제들의 경과추이를 지켜보면서

일희일비 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나의 문제가 잘 풀리면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다가도,

이내 다음의 문제에 직면하고서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이다.

 


또, 가족에 대한 애착도 매우 강하다.

자신의 배우자, 자녀, 부모에 대한 애착은,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생물들에게서 나타나는 일종의 공통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리고 대개는 나이가 먹어가면서 위의 순서로 그 중점이 변한다. 

 

 

즉,

나이가 어릴때는 배우자, 혹은 이성상대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가,

어느정도 나이를 먹으면 결혼을 하고,

그 다음에는 자식들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다.

그보다 후에,

즉 나이가 많이 들어 부모님이 돌아가실때 쯤이 되어서야,

부모에 대한 애착이 강해진다. 

 

 

 

어린 나이에 가지게 되는 이성에 대한 애착.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첫사랑에 대한 기억.

대부분 이것은 어린 나이에 남게된다.

'첫사랑의 열병'이라고 하던가?

어린나이에 가지게 되는 이성에 대한 애착은

'열병'이란 말이 아주 잘 어울리는 성질의 것이다.

가슴이 두근두근뛰고,

기분이 한 없이 좋아졌다가 저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
(마치 열이 올랐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 상당수도 이런 경험을 해 봤을 것이다.

그리고 알고 있는 결론일수도 있지만, 

이성에 대한 애착은 영원하지 못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애착이라고 하더라도,

막상 (시간적, 공간적으로) 멀어지게 되면 차차 잊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망각'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기능때문에 그러한데,

(망각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이 망각이라는 기능 때문에 이 종류의 애착은 영원할 수 없다.

첫사랑의 추억은 영원하다고?

그것은 추억으로써 남는 것이지,

막상 오랜 시간이 지난다음에 만나게 되면

처음과 같은 종류의 애착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자녀에 대한 애착이 한국인들에게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수십, 수백만원짜리 유치원에 보내고,

좋은 대학을 보내기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며 과외를 시킨다.

부모들의 자식의 장래직업 1순위는 판사 혹은 의사이고,

많은 경우 자식의 결혼상대까지도

자신의 마음에 드는지를 먼저 보게된다.




하지만, 자식은 자식일 뿐.

자식의 삶까지 내가 살아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인생이 있을 것.. 

 

 



부모에 대한 애착은 가장 늦게, 가장 강하게 나타난다.

부모가 늙고 약해지는 모습을 볼 때서야,

인간들은 부모에 대한 애착의 강도를 높여간다.

그렇게 늘 한 박자씩 늦는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부모란 존재는,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데 한정된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줄 것이 적어지면, 관심 또한 적어진다.

 




왜 좀 더 일찍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의 표현을 하지 못하는가?

왜 언제나 부모는 불평과 투정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하지만, 이 부모에 대한 애착까지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착을 가지고 있는 부모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죽고 시간이 오래 지나게 되면,

결국 또 망각이라는 커튼으로 살짝 가리워지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결론은 간단하다.

인간이 가진 애착이란 어느것도 영원하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거나 약화되기 마련이고,

결정적으로 죽음은 이런 종류의 애착을 사라지게 만든다.

죽고 난 뒤에까지 애착이 지속되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고 이런 종류의 애착 자체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

이런 종류의 애착을 가지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단 한가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애착이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애착이다.

이것은 시간이 지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죽음조차 이를 없애지 못한다.

오히려 죽고 난 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애착이 극대화된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위에서 말한, 인간이 가지는 모든 애착 역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애착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하고, 완전한 것.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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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주 접하는 대상에 대해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익숙해짐.

개인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어떤 인간도 예외는 없다.

아니, 인간 뿐 아니라, 동물, 식물 역시 마찬가지이다.

먹이를 줄 때마다 종 소리를 들었던 개가,

나중에는 종 소리만으로도 침을 흘리게 되었다는 실험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또, 분재를 아는가?

어린 나무를 두꺼운 철사로 감아서, 이리저리 휘어지게 만든채로 자라게 하면,

나중에 그 철사를 풀어도 여전히 그 기괴한 모습으로 자라는 것이다.



이 모든 종류의 생명체에게서 나타나는 '익숙해짐'이란 것이

긍정적으로 발현될 때는 여러모로 유익한 점이 많다.

불필요한 시간적, 물질적, 정신적 낭비를 줄여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면서도 언제까지나 처음 하는 것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면,

그런 일이라면 적성에 안 맞는 것이니 포기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지도 모른다.

운동 선수가 아무리 노력해도 경기장과 친해질 수 없다면, 어디 운동선수인가?



반대로 이 '익숙해짐'이 부정적으로 나타날때가 있다.

그 익숙해진 대상에 '함부로' 대하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발현은 다른 생명체에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기 힘들다.

내 관찰에 의하면 오직 인간에게서만 나타난다.



인간은 '익숙해짐의 정도'가 강해지면 강해질 수록, 상대를 함부로 대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다.

다른 사람과는 잘 다투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형제 자매, 부모님과는 더 잘 싸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익숙해진 대상이기 때문이다.



익숙해진 대상에 대해서는, 처음보다 더 적은 관심을 쏟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상대의 작은 감정변화에도 신경을 쓰지만,

관계가 지속되면, 지속될 수록 관심도는 낮아진다.

그와 반비례해서 이기적인 경향은 증가한다.



상대가 오로지 나에게만 맞춰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상대의 작은 변화에 신경을 쓰기 보다는 상대가 내 작은 변화에 신경을 써주기만을 바란다.

모든 다툼은 내가 상대방을 좀 더 배려하지 못한데서 생기는 법.

인간은 이 사실을 실제로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때문에 익숙해지면 익숙해 질수록, 다툼은 더 자주 발생한다.



어떤 관계가 오래도록 지속되기 위해서는,

본질적으로 일정 부분의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의 것을 전혀 양보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떤 관계라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관계를 가진지 오래되면 오래될 수록,

관계를 맺는 양 주체는 서로에게 더 많은 것을 양보하고 희생한다는 결론이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게 자신을 위해 희생과 양보를 한 대상에게,

익숙해질수록 더 잘해줘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조금 더 많은 것을 주려고 하고,

더 많은 부분에 있어서 신경을 써줘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인간이라는 배은망덕한 족속들은,

그들의 첫 조상이 하나님을 배신한 이래로,

아직도 그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다행인가.

하나님은 아무리 익숙해져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는 분이니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만들어진 존재다.

만약 인간이 익숙해진다는 것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그 대신 익숙해질수록 조금 더 상대방을 배려한다면,

소중한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바보같은 짓을 하지 않을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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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누스 푸른숲 비오스(Prun Soop Bios) 5
게리 윌스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은,

아담이 더 낮은 사랑(이브를 향한)을 사랑의 원천(하나님)에서

분리시키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이브를 돕지 못하고 자신도 돕지 못했다는 것이다.

 

  

 . 요약 。。。。。。。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에 관한 학문적인 평전 하나가 나왔다. 자칫 지나친 우상화나 적대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기 쉬운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과 그의 삶이지만,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 나와 있는 기록에 근거해 그의 개인 역사를 재구성함으로써 객관적인 묘사를 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을 열고 있다.

 

        이제껏 겉핥기식으로만, 혹은 매우 단편적인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의 일생에 대해 매우 잘 정리되어 있는 책이다. 다만 그의 사상과 관련된 부분에 대한 설명은 약간 부족해 보인다.(평전이라는 특성상 보다 역사적인 부분에 치우치는 것은 어느 정도 감안되어야 하리라.)



 

 

 . 감상평 。。。。。。。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쉽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그가 남긴 영향력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는 고대 교회와 중세 교회를 이어주는 인물이자, 현대에까지도 남아 있는 수많은 철학적, 신학적, 심리학적, 정치적 문제들을 던지고 대답했던 인물이다. 개신교와 카톨릭 모두에서 교부(敎父)로 인정되고 있을 만큼, 그의 무게감은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에 대해 그다지 많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작지만 알찬 책은,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의 전반적인 일생과 사상에 대해 접근하기 위한 좋은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학문적인 책이기 때문에 이쪽 분야에 대해 선지식이 별로 없는 독자들에게는 약간 어렵게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분야가 처음부터 쉽게 익힐 수 있겠는가. 처음은 원래 어려운 법이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인물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당장에 그의 저작들을 집어 들기보다는, 이 책을 통해 일단 워밍업을 해 보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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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만찬 1
하비에르 시에라 지음, 박지영 옮김 / 노마드북스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그와 더불어서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들이

실은 우리를 속이고 있다는 점 역시 깨닫게 될 거요.

마지막 하나, 진실은 전혀 뜻밖의 장소에 존재한다는 것을 명심하길 바라오.

 

 

 요약                                                                                                

 

        또 ‘제 2의 움베르토 에코’님이 나오셨단다. 책 겉장에 삽입되어 있는 사이비 종교 교주처럼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찍은 사진(하필 이렇게 나온 사진을 실은 이유가 뭔지..)을 보니 저자에 대한 기대감이 반으로 확 준다. ㅡㅡ;;


 

 

        저자는 이번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어디서 많이 봤던 설정이다. 달라진 점은 이번 이야기에서 레오나르도는 시온 수도회의 수장이 아닌 카타리파의 핵심요인으로 나온다는 것.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바로 이 ‘카타리파’이다.

 

        아무튼 레오나르도는 이 카타리파의 일원으로, 자신이 맡은 작품들에 카타리파의 비밀 교리들을 상징을 사용해 숨겨 놓았고, 누군가 이 사실을 알고서는 아고레로라는 가명으로 로마 교황청에 레오나르도의 작업을 막아야 한다는 편지를 보낸다. 이 사건을 맡아 밀라노로 파견된 종교재판부의 레이레 신부. 레이레는 그 곳에서 아고레로가 누구인지, 그가 경고하고 있는 일의 진상이 무엇인지 수사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수사는 좀처럼 진척이 되지 않았고, 실마리는 레이레 신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부터 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드러나는 ‘최후의 만찬’에 숨겨진 비밀 상징.


 

 



↑ 이게 문제의 저자 사진..;;


 

 

 감상평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면 나로서도 특별히 할 말은 없지만, 문제는 소설이 사실임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 말미에 번역자의 입으로 이 책은 80:20의 비율로 사실과 상상이 섞여 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니, 책의 내용에 담긴 특성상 나도 어쩔 수 없이 사실관계가 정확하지 않은 부분들을 지적하는 ‘변증적’ 성격의 약간은 지루해질 지도 모르는 감상평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먼저 소설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카타르 파’에 대해 잠깐 설명이 필요하다. 책에는 ‘카타르파’로 번역되어 있는 이 이름은 아마도 영어의 Cathars를 음역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가 아는 신학서들에서는 모두 라틴어 Catari를 음역한 카타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아마도 그 당시 그들을 언급한 문서들이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가능한 현장의 분위기를 살리려고 했다면 당시에는 사용되지 않았던 ‘카타르’보다는 ‘카타리’라고 쓰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다.(예를 들어,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를 영어식 발음인 시세로로 읽겠다고 우긴다면야 뭐 할 말은 없지만, 키케로 자신은 자기를 부르는 지 못 알아듣지 않았을까?)

 

        책에도 약간 실려 있는 것처럼, 카타리파는 중세에 등장했던 이단 종파 중 하나이다. 사실 카타리파의 성격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직도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은 듯 하다. 어떤 학자들은 기독교의 다른 모습이라고 말하지만, 또 다른 학자들은 단지 기독교적 외형장식만을 차용한 ‘전혀 다른 종교’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카타리파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엄격한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세상은 선과 악의 전쟁터이며, 영적인 것은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므로, 사악한 물질세계에서 선한 영혼의 세계로 탈출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런 교리적 문제 때문에, 비록 그들의 조직이나 행동들이 수도원적 생활이나 가난하지만 진실된 설교자들과 비슷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일찍부터 이단으로 생각되었다. 그들의 주장은 성경보다는 바빌로니아의 종교인 마니교와 더 유사해 보인다.


 

 

        이 정도의 선지식을 가지고 책을 들여다보면, 저자는 책의 분위기를 낼 수 있는 배경부(당시의 종교적 분위기나 특정한 건물, 인물 등에 대한 묘사 중 일부)를 빼고는, 이야기의 스토리를 이루는 중요한 고리들의 대부분은 상상에 의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나마 사실관계에 있어서도 오류를 보이는 부분이 많다. 1권 96쪽의 주에 실려 있는 내용은 ‘영지주의(그노시즘)’이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자’라는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그노시즘은 그리스어의 ‘지식’이라는 어휘인 ‘그노시스’에서 온 말로,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만이 진짜 지식을 가졌고, 그 지식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을 빈정대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비밀스런 지식~’ 어쩌구 하는 존칭의 의미는 들어있지 않다.

 

        또, 저자는 카타리파를 그노시즘과 동일시하고 있으며, 다시 그노시즘을 플라톤 사상과 동일하게 보고 있지만, 이들 사이의 사상적 영향을 주고받았음을 보여주는 근거는 없다. 그저 비슷해 보이면 다 연결지으려는 진화론적 사고방식의 오류이다. 숟가락과 삽이 비슷하다고 해서 숟가락이 발전해 삽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99쪽에 나온 것처럼 ‘고태 카타리 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외에도 카타리파가 상징을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2권 124) 저자의 설명에 대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교회의 신학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다. 예컨대 성경이 교회에 헌금을 하지 않는 것을 신의 계율을 어긴 일이라고 말한다고 성경 구절까지 인용하며 주장하는 것(2권 137)은 저자의 편견이 반영된 설명일 뿐이고, 소설에 나오는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는 문서가 ‘위험한 신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설명(2권 181)은 ‘신학적 가치’라는 말에 대한 저자의 오해에서 비롯된 말이다. ‘나그 함마디 문서’가 사해사본보다 중요하다는 저자의 확신(2권 277)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도 나그 함마디 문서의 기록시기를 3, 4세기에 가깝게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초기 교회의 문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쯤 해서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 책에는 자주 ‘고도의 지적 게임’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책이 끝날 때 까지 나는 도대체 그 ‘고도의 지적 게임’이 어디에 등장하는 지 발견하지 못했다. 문자에 숫자를 대입해서 원하는 단어를 만들어내는 케케묵은 수법이나(사실 오늘날에는 컴퓨터의 발달로 원하는 모든 단어를 이런 식으로 조합할 수 있다), 말하지 못하는 그림에서 자신이 원하는 말을 (‘상징’이라는 멋들어진 방식을 통해) 이끌어내는 수법 등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이런 방식들은 말 그대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내용 밖에 나오지 않는다.

 

        주인공이 치밀한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해 갈 것이라는 기대는 종반부로 갈수록 점점 줄어들고 만다. 책에는 특별히 ‘사건의 진행’이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의 설정대로 이야기의 끝까지 거의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많지만, 그들 모두가 사건에 충분히 개입되지는 못하고 있고, 내용의 진행과 함께 새롭게 드러나는 사실은 매우 적다. 책에 등장하는 역사적 배경에 관심이 별로 없는 독자라면, 이내 질려버리고 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반부에 아고레로가 누구인지 찍었는데, 틀리지 않을 정도이다.


 

 

        이 책을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의 중간쯤으로 소개하는 건 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인물들이 중세에 살고 있다는 점을 빼면 ‘장미의 이름’과 닮은 점이 별로 없고, 교회를 뒤집을 수 있는 놀라운 사실의 발견이라는 허풍을 뺀다면 ‘다빈치 코드’와도 비슷한 점이 적다. 오히려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의 아류작쯤으로 보면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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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천천히 읽을 것인가
제임스 사이어 지음, 이나경 옮김 / 이레서원 / 2004년 2월
평점 :
절판


그저 정보를 얻겠다는 생각으로만 책을 읽는 행위는

원색적으로 표현해서, 독서라는 예술의 매춘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 。。。。。。。                                                     

 

        부제가 눈에 확 띈다. ‘세계관 탐색적 독서법’.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세계관’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데다가, 제임스 사이어라는 저자 이름까지 보고나자 당장에 사버렸다.


 

 

        책의 내용은 말 제목에 잘 나타난다. ‘천천히 읽는 방법’이 전부다. 책을 천천히 읽는데 무슨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묻는 당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으리라. 단순히 읽는 속도를 느리게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저자는 한 편의 글(책)을 읽을 때, 단순히 훑어가며 개략적인 정보만을 얻어내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완독(緩督, slow reading)'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천천히 읽되 그 안에 담긴 저자의 세계관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작가들은 저마다의 세계관으로 세상을 보며 글을 쓴다. 자신과 하나님, 훌륭한 삶, 인간 인식의 타당성 등에 대해 작가가 가지고 있는 전제는 그들이 말하는 내용과 전달 방식 모두를 지배한다.’



 

        저자는 책의 내용에서 정보를 읽어내는 것만큼이나, 저자의 세계관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1장 전부를 이를 강조하는데 할애한 저자는, 2장과 3장, 4장을 통해 각각 시, 논픽션, 소설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잘 읽을 수 있는지를 약간은 따분하게 설명하고 있다.(워낙에 기초적인 부분이라고 느껴져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5장은 모든 장르의 책과 글을 읽는데 공통적으로 필요한 ‘배경(컨텍스트)’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부분이고, 마지막 6장은 책을 읽고 새롭게 독서습관을 기르고 싶은 이들을 위해 책을 선택하는 부분부터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 있는 실제적인 독서지침들이 실려 있다.



 

 감상평 。。。。。。。                                                  

 

        방학을 하고 처음으로 손에 든 책이다. 책의 서두가 워낙에 흥미로워서 끝까지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었다. 세계관 탐색적 독서법이라는 부제도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것은 놓쳐버리는 부분이 많다는 생각을 평소에도 했었지만, 정확히 어떤 부분을 지적해야 하는지를 정리하지 못했던 차에 좋은 책을 만났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세계관 탐색적 책읽기’를 설명하는 1장 부분이다. 이 부분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면 이 책의 50% 이상은 소화했다고 보면 된다. 비단 책에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라, 영화나 만화, 일상생활에서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말도 이런 식으로 분석하며 이해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교묘하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이 시대의 많은 변사들에게 올바로 대응하기 위해서, ‘저자가 당연히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넘어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하라’는 저자의 권고는 너무나 중요하다.

 

        장르별로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할지를 설명하는 2장부터 4장, 그리고 5장의 부분은 아예 독서를 처음 하는 사람들을 지도하기 위한 부분으로는 유용하지만, 어느 정도 책 읽기에 익숙하고 ‘더 나은’ 책 읽기를 배우고 싶어서 이 책을 손에 든 사람에게는 약간 지루할 듯 보인다. 다만 6장의 경우에는 좋은 독서습관을 가지고 싶은 이들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어차피 이 시대는 우리가 모두 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도저히 머리에 담아둘 수 없을 만큼 폭발적으로 지식과 정보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시대에 100권의 책을 대충 읽기보다는 10권의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아마 저자도 동의하리라.) 책을 읽고는 싶은데 어디서부터 읽어야 할지 방향을 잘 잡지 못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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