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보고 찍어 온 전단.

 

누가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기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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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빙 다빈치 - 세속주의 문화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답변
낸시 피어시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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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전작인 완전한 진리에서 사실과 가치를 서로 다른 인식의 층에 각각 가두어 놓으려 했던 현대의 세계관들을 날카롭게 분석해 냈던 저자는, 이번 저작에서는 이 분리가 단지 이론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어떻게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주목한다. 저자에 따르면 소위 세속주의는 이미 강단을 점령했고, 그곳에서 배운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그 영향력을 날마다 확장시키고 있다.(1~3)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미술과 음악 등 예술 분야에 나타나고 있는 이층적 세계관의 모습을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 덕분에 서양 예술사의 각 시대를 풍미했던 주의들이 왜 등장했으며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일종의 예술사책의 기능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건 역시 각각의 사조들이 가진 한계와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세계관을 분석해내는 장면이다.(4~9)

 

     현실을 제대로 반영해내지 못하는 이층적 세계관은 인식론적 분열증을 일으킨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서양 예술사의 여러 사조들이 끊임없이 앞서의 것들을 부정하며(대개 이들은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을 강조하곤 한다)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고 애써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문화와 예술을 읽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끌려다닐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세속주의에 넘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소극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실재를 제대로 반영하는 세계관에 근거한 예술 활동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도 이런 안목은 필수적이다.

 

 

 

2. 감상평 。。。。。。。

 

     낸시 피어시 여사가 다시 한 번 일을 냈다. 이 책은 미학을 다루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세계관을 분석함으로써 보통의 분석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까지 들어간다. 수많은 컬러 도판들(이 책의 가격이 겨우 3만원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은 본문의 적절한 예시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는 미술관의 기능까지 하고 있다. 철학과 예술 사이의 관계를 이토록 튼튼하게 엮어낸 작품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다. 소위 난해한현대미술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몇 달 전 한남동의 리움 미술관에 갔던 적이 있었다. 가장 위층부터 차례로 한 층씩 내려오면서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던 중, 2층과 3층 사이에서 아주 극단적인 분위기의 전환이 있다는 게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한 눈에 느껴졌다. 2층부터는 본격적으로 현대의 추상주의적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키를 훨씬 뛰어 넘는 거대한 화폭에 알 수 없는 무늬와 색채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옆에 적혀 있는 안내문을 봐도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왜 삼성에서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85억이나 주고 구입했다던 만화 같은 그림(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었다)이 왜 그렇게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는지도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사람은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아마 나 같은 사람들이 예술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갖고 있는 감정은 그 비슷한 무엇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두려움은 날려버릴 수 있게 된다. 쫄 것 없었다. 그들은 그림이나 선율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을 뿐이고, 말과 글로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볼 때처럼, 그들의 주장을 읽어낼 수 있으면, (그리고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반박도, 비판도 할 수 있다. 남들이 좋다고 해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데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맞장구를 칠 필요가 없는 거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미학을 공부하고 문학과 예술의 언어를 읽는 법을 배우는 이유는, 단지 딱지를 붙이고 빈정거리기 위해서는 아니다. 더 나은 것을, 더 실재를 잘 반영하고, 일상적인 것들의 가치를 더 잘 빛낼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런 부분에 주목해 보자면, 나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한참 부족한 상황이고.

 

     이 책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듯, 미술과 음악 속 메시지를 읽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물론 전세는 많이 기운 상황이지만, 아직 낙동강 전선이 유지되고 있다면, 반전의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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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선한 선택은

다음에 또다시 선한 선택을 하겠다는 내적인 결심을 강화시킨다.

반면 모든 악한 선택은

그보다 한층 더 악한 선택에 마음이 기울게 한다.

 

- 데이비드 다우닝, C. S. 루이스와 나니아 나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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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부동산 사업으로 떼돈을 번 데미안(벤 킹슬리). 그러나 불치병에 걸려 이제 남은 생이 채 6개월도 남지 않았다. 어느 날 그에게 놀라운 제안을 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기억을 건강한 새 육체에 이식시켜 두 번째 인생을 살게 해 주겠다는 것. 살면서 거의 모든 것을 이룬 데미안으로서는, 이제 남은 욕심은 불멸에 대한 욕망 뿐 아니겠는가. 결국 그는 시술에 참여하고 전혀 다른 사람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그렇게 또 다른 데미안(회춘한 데미안은 라이언 레니놀즈)으로 신나게 살고 있을 무렵, 두통과 함께 자꾸 이상한 기억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갔던 장소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나고, 곧 숨겨졌던 거대한 규모의 음모가 전모를 드러낸다. 알고 보니 실험실에서 배양을 통해 만들었다던 새 육체는 멀쩡하게 살던 다른 사람의 육체였던 것이고, 문득문득 떠오르던 기억은 그의 새 몸의 원래 인격이 가지고 있는 것.

 

     진실을 감추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과, 일단 살인은 막고 보자는 주인공 사이의 추격전.

 

 

 

이 양반이 죽어가고 있는 주인공.

 

 

2. 감상평 。。。。。。。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걸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면 별 고민이 없겠지만, 사람 마음이란 것이 또 그런 게 아닌가보다. 중국의 수많은 황제들이 불로장생할 수 있는 약을 찾아다녔고, 서양에서도 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대중문화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이 영화로도 제작되어 왔다.

 

     이 영화 역시 그런 꿈을 담고 있는데, 앞서 나왔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과정이 마냥 행복하게 그려지지만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영원히 사는 게 인류 최후의 소망이라면, 막상 영원히 사는 모습이 이렇게 불행하게 묘사된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아마도 이제까지 영화 속에서의 영생은 늘 상 다른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점점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인류지만, 아직 다행이도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번 영화는 그런 디스토피아를 아주 제대로 정면에 내세우고 있다. 돈 많은 부자의 영생을 위해 건강하고 젊은 (하지만 가난한!) 누군가의 몸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설정은 매우 충격적이지만, 슬프게도 꽤나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는 소재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부자들의 나라가 되어가는 건 이즈음 거의 전 세계적인 공통적인 현상이니까.

 

 

 

 

     영화 속 영생이 가능한 희대의 치료법을 발명한 교수는 이 작업에 매우 거창한 이유를 덧붙인다. 세계사 속에서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이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인류는 훨씬 더 발전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 과정에서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 예로 등장한다.

 

     이 말만 들으면 그렇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계획이란 게 언제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흘러가던가. 필연적으로 어느 순간 온갖 종류의 실천적 이유(그렇게 조성된 연구기금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식의)를 가져다 대면서 결국 돈 있는 사람들을 위한 혜택 쪽으로 넘어갈 가능성은 처음부터 높았다. 심지어 영화 속 주인공도 그저 부동산개발업자였을 뿐이 아니던가. (물론 부동산개발이라는 사업이 가치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무슨 거창한 이유도 결국 삼켜버리고 자기 뜻대로 끌고 가는 걸 보면, 돈이라는 녀석의 힘이 엄청나긴 한가보다. 결국 무슨 기술이 발명되고, 발전하더라도 이 세상에 유토피아가 세워질 일은 절대로 없다는 거. 훨씬 근본적인 부분에서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으면 말이다.

 

 

 

 

 

     영화적인 면만 보면 겨우 나쁘지 않은 수준을 벗어난 정도. 이 설정을 가지고, 감독은 겨우 추격전을 만들어낼 뿐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과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소해 나갈까가 궁금했는데, 그 궁금함이 허망해질 정도. 이건 뭐 예산 문제라기보다는 상상력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솔직히 왜 주인공이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박사를 죽이면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건지도 확실치 않다. 마지막 장면은 어느 정도 예상까지 됐고.. 생각할 거리는 던져주었지만, 딱 거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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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득세 최고한계세율의 인하는 최상위 소득의 폭발적인 소득 증가로 이어졌고,

그 결과 세제의 변화로부터 혜택을 받는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였다.

이들은 최고세율을 낮게 유지하고 심지어 더 내리는 데 관심이 있으며,

그렇게 얻은 횡재로 정당, 압력단체, 싱크탱크에 자금을 댈 수 있었다.

 

-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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