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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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새해 첫 날, 전국에서 죽음이 중지되었다. 말 그대로 한 사람도 죽지 않게 된 것이다. 이 놀라운 사건을 해석하려 드는 언론과 종교, 정치계. 그들은 곧 이 새로운 축복이 저주로 변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아무도 죽지 않는 나라는 당장 장의사들, 보험업계, 의료계, 종교계, 그리고 노인복지사업 종사자들에게 엄청난 문제가 된 것.

 

     그러나 몇 달 후 한 신문사에 ‘(소문자로) 죽음이라는 서명이 된 편지가 도착하면서 상황은 변한다. 죽음은 이제 다시 일을 시작했는데, 매우 신사적(어쩌면 숙녀적)이게도 죽기 직전 충분히 정리할 시간을 주기 위해 일주일 전 죽음의 편지를 보내겠다고 선언한 것.

 

     이제 이야기는 어디로 튈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고, 작가는 다시 한 번 스토리에 비틀기를 시도한다. ‘죽음이 보낸 편지가 계속 반송되는 남자가 등장한 것.. 두둥.

 

 

2. 감상평 。。。。。。。

 

     주제 사라마구가 쓴 작품을 여섯 편 째 보는 것 같다. 대략 그의 작품이 가지는 분위기가 어떤지, 그의 사상이나 전개 방식이 어떤지, 그의 문장이 가지는 특징이(물론 이 경우엔 번역된 문장이지만) 무엇인지 대략 익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었다. 이런 착상을 이렇게까지 깊이 파고들어가서, 인간의 내면을 이렇게 드러낼 수도 있구나 하는 경탄이었다. 후속작인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도 좀 다른 방향이지만 비슷한 느낌의 치열한 탐구가 돋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고 하더라도 늘 같은 방식으로 조리된 것만 먹으면 질리지 않을까. 사라마구의 다른 작품들에서는 처음과 같은 정도의 감동을 받지 못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다. 거대한 규모의 재앙을 설정해 두고, 그런 극단적인 상황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을 탐구해 나간다는 전형적인 구조는 돌 뗏목이나 이 작품 죽음의 중지에서 그대로 답습되고 있으니까.

 

     또 하나 문제는 이 작품의 경우 구성 자체도 그리 잘 짜인 것 같지 않다는 점.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일을 거부하고, 그로 인해 혼란이 일어난다. 기대와 불안감이 동시에 생기는 시작이었지만, ‘죽음이 인격체로 등장하면서 확실히 변곡점을 형성한다. 문제는 그 다음. 그렇게 등장한 죽음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을까였는데, 아쉽게도 이후 전개를 보면 작가의 무리수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

 

     처음 신문사와의 논쟁을 벌이는 동안에는 근본적인 죽음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살짝 던지기도 하나 싶었지만, 이후엔 그냥 지리멸렬.. ‘죽음의 엽기발랄 연애기는 결국 죽음이 인간의 삶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관한 철학적, 실천적 사유를 중지시킨다.(이게 죽음의 중지라는 제목의 의미?)

 

 

     이 책을 읽기 직전, 일본의 한 작가가 쓴 비슷한 콘셉트의 소설을 읽었다. 이 두 소설이 어떻게 서로 다른 독특함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일본 작가의 그 작품이 좀 더 진지하게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작품 속에 드러나는 작가의 날카로운 통찰과 비꼬기는 여전히 살아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그것만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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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다중 작업은 지금 우리 자신보다 더 큰 사람이 되려고,

지금 우리가 하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통제하려고,

지금 우리가 발휘하는 능력과 효율성을 더 키우려고 우리를 몰아붙이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우리 자아를 분열시켜,

결국 어떤 일에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만다.

 

- 월터 브루그만, 안식일은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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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은 사람이 사람을 위해 행하는 사람의 활동이다.

따라서 경영은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구조와 같다.

사람을 도구로만 여기는 리더의 경영에 사람들이 따르지 않는 건 당연하다.

 

- 하마구치 다카노리, 사장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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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일제의 패망이 점점 기정사실화 되어가던 시기, 영화 귀향정민위안부로 끌려가던 시기, 일본의 한 경찰서에는 스물여덟 살의 청년 윤동주(강하늘)가 그의 사촌이자 절친인 송몽규(박정민)와 함께 갇혀 있었다.

 

     영화는 고등학생이었던 윤동주가 서울과 일본을 거치며 겪었던 약 10여 년의 시간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2. 감상평 。。。。。。。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윤동주보다 송몽규가 더 주인공 같다고 말한다. 서글서글한 성격에,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적당히 하는 것 같은데 또 매번 뛰어난 결과를 낸다. 그렇다고 아주 오만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닌 그의 캐릭터는 딱 사람을 주변에 불러 모으기에 최적화 되어 있다. 실제로도 영화 속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함께 한다.

 

     반면 영화 속 윤동주는 모든 면에서 그런 송몽규와 다르다. 그는 혁명을 기다리는 몽규와 다르게 시를 쓰는 사람이고 싶어 했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기 보다는 그냥 조용히 혼자 책을 보는 것을 더 좋아한다. 기껏 써 놓은 시조차 부끄러움에 발표하지도 못하니 말 다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뭔가를 하기 보다는 몽규가 가는 길을 그저 따라가는 모습처럼 보이고, 그마저 결과는 몽규만큼 나오지도 않으니.. 이건 딱 서브 캐릭터.

 

     보기에 따라서 윤동주라는 캐릭터는 송몽규와 대립되는 것 같기도 하고(라이벌 관계), 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후자 쪽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내가 보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둘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고, 몽규는 몽규대로, 동주는 동주대로 식민지 치하의 조선인 청년으로서 의식을 잃지 않고 살아가려고 애썼을 뿐이다.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든 엮어서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려는 건, 어쩌면 후세 사람들의 교만일지도 모른다.

 

 

 

 

     감독과 프로듀서는 윤동주의 시를 적절하게 재배열해 그의 삶의 순간들과 연결 지어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아름다운 구성이다. ‘작품이란 건 이런 예술적인 노력에 붙여 주어야 하는 이름일 듯하다. 알라딘 서재의 어떤 이웃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발표된 시의 연대와 영화 속 시간이 서로 맞지 않는 경우가 몇 군데 있음을 알아차릴 능력이 되지 않는 나로서는, 딱히 크게 거슬리지는 않았다.

 

 

     섬세한 정신의 소유자였던 윤동주는 너무나 불안한 시대를 살다 갔다. 그가 써 놓은 시어 하나하나를 분석해 가며 반제국주의적 의식을 찾아내 고발하려 했던 일본고등경찰의 태도는 그 시대의 단상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것과 너무나 비슷한 악취가 오늘날 이 나라의 권력자들과 그 졸개들에게서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전체를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고, 비상시국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통치자가 존재한다면, 그게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다를 바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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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즐기기 위해서 세상을 이용하지만,

악인들은 반대로 세상을 즐기기 위해 하느님을 이용하려 한다.

 

-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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