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줄거리 。。。。。。。

     그리 멀지 않은 미래인 2045. 철근 구조 위에 컨테이너를 켜켜이 쌓아 올린 빈민촌 이모 집에 얹혀사는 웨이드(타이 쉐리던)의 유일한 낙은 가상현실 세계인 오아시스에 접속해 동료들과 함께 지내는 것. 그곳에서는 암울한 현실과 달리, 사람들이 상상하는 판타지가 현실이 될 수 있었기 때문.

     ‘오아시스의 창업자이자 개발자였던 할러데이(마크 라이런스)는 죽기 전 자신이 그 안에 감춰둔 세 개의 열쇠를 찾는 사람에게 오아시스의 소유권과 막대한 유산을 주겠다는 유언을 남겼고, 사람들은 그 열쇠를 찾기 위해 저마다 달려든다. 웨이드 역시 그런 도전자 중 하나. 할러데이에게 푹 빠져 있었던 웨이드는 마침내 첫 번째 열쇠를 얻을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되었고, 그 뒤로 감춰졌던 수수께끼가 급속도로 풀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영화 속 보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뛰어들 만큼 큰 시장에 이권을 노린 이들이 개입하지 않을 리가 없다. IOI라는 깜찍한(?) 이름의 회사를 경영하는 소렌토는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열쇠를 찾는 일종의 군대를 만들었고, 웨이드를 위협하며 쫓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

 

     ​3D, 4D 영화관이 아니라 일반영화관에서 봤는데도, 우퍼 스피커의 효과가 뛰어났던 건지 마치 놀이기구를 몇 번 타고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스피커의 힘만이 아니라 감각적으로 디자인 된 영화 속 가상현실 세계의 모습도 한 몫을 했다. 사실 영화의 거의 절반이 (어쩌면 그 이상이) 오아시스 속 모습이기에 이 부분에 적지 않게 신경을 쓴 모습이다.

 

     ​영화는 급격하게 발전하는 현실을 잘 담아낸다. 가상현실에 감각을 더한 장치는 이미 활발하게 개발되거나 일부 실현되고 있고, 영화 속 드론을 이용한 다양한 용도(피자를 배달하고, 원하는 차량을 검색하고, 심지어 폭탄을 설치하는 등)도 하나둘 현실화되고 있다. 그뿐인가. 빚으로 사실 상 대기업의 노예가 되어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착취당하는 모습이나, 현실 속에서 답을 찾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가상현실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현상마저도 그렇고. 많은 영화들이 그러하듯, 이 작품도 미래를 그리는 듯하지만, 실은 현재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것.

 

 

 

 

     ​영화 전반에 걸쳐 80년대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일단 디스코음악이라든지, 댄스홀 모습, 그리고 도트 베이스의 초기 컴퓨터 게임까지. ‘오아시스의 문제를 푸는데 할러데이의 과거가 단서로 제시된다는 설정 때문이지만, ET로 상징되는 스필버그 감독의 SF 전성기를 추억하는 것 같다는 느낌도 물씬 든다.

 

     ​여기에 영화 속 등장하는 고전 명작 속 장면들이 재해석 되어 등장하는 모습을 보는 맛도 쏠쏠하다. 예컨대 주인공이 오아시스안에서 타고 다니는 자동차는 영화 백 투 더 퓨처속 타임머신을 꼭 빼어 닮았다. 이 외에도 곳곳에 살짝살짝 보이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찾아보는 것도 재미.

 

 

     최첨단의 가상현실을 중심소재로 두고 있는 영화지만, 영화의 주제는 스필버그 특유의 따뜻함을 담고 있다. 역시 아날로그적 감성이 잘 어울리는 감독이다. 가상현실이 아무리 찬란하고 좋아보여도, 실재 위에 단단히 세워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는 너무 당연하지만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기도 하고.

 

     ​놀이공원에 가는 기분으로 보기 시작하다보면,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게 될 영화. 다만 이 기억에 전혀 남지 않을 것 같은 제목은 좀 어떻게 했어야... (영화관에 들어간 후에도 내가 무슨 영화를 보고 있는지 표를 확인해야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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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해부 - '앎'을 위한 팩트체크 옥성호의 성경 직독직해 시리즈 1
옥성호 지음 / 테리토스(Teritos)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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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저자는 책의 초반부 기도로 폐병을 고쳤다고 확신한 채 촉망받는 물리학자의 삶을 포기하고 신학으로 돌아선 한 인물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애초의 진단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된 그가 쓸쓸하게 걸어간다는 내용으로 마치는 이 이야기는, 그가 신앙으로 자기합리화를 했을 것이 분명하다는 저자의 거의 사실화된 강력한 추측으로 이어진다.(이 책에선 매번 이런 식이다. 자신의 추측이 곧 사실이다.)

     처음의 예와 거의 반복되는 또 하나의 사례(이번에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다)를 든 후, 저자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자신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사람이라는 것. 이를 위해 심지어 아담의 역사성까지 믿고 있다는 식으로 (다분히 깐족대는 어조로) 자신의 보수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건 다음 내용을 전개하기 위한 밑밥이었다.

 

     ​본론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자신이 볼 때, 성경 속 하나님의 모습은 차마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수준의 원시적이고, 무능력하며, 과격하고, 잔인한 신이며, 나아가 성경 속 각종 명령과 규례들은 온갖 모순을 안고 있으며,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전근대적 법령들이라는 것. 이를 위해 저자가 분석하는(이 책의 제목을 따르면 해부하는’) 대상은 놀랍게도 십계명이다.

 

  

2. 감상평 。。。。。。。

     먼저 책 서두에 나오는 한 전직 물리학도의 실감나는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전하는 사람들은 일어난 사건을 단순히 옮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맛대로 더하거나 빼기 마련이다. 더구나 저자가 전한 이야기는 그 자신의 생각으로 마무리 되고 있고, 또 마지막을 최대한 허탈하게 만들기 위한 구성도 엿보인다. 설사 그가 한 설명이 사실이 근접했다고 하더라도, 이야기 속 주인공이 젊은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물리학자가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법이다.

     그런 그의 삶에 대한 평가를 단순히 속은 것이라고 평가하는 저자의 판단은 무엇에 근거한 걸까? 또 그는 신앙에 의해 속임을 당한 것도 아니고, 그가 물리학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주변의 기독교인들의) 강요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저자는 다분히 이 이야기를 가지고 전통적인 신앙인들을 조롱하거나, 그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못 미더운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만, 이런 식의 개별적(귀납적) 경험사례를 가지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확실히 판단내릴 수 없다는 건 논리학의 기본적인 원칙이 아닌가.

 

     저자가 십계명의 조목들을 해부하는모습도 썩 능숙해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가 이 과정에서 참고한 것은 대체로 자유주의적 관점을 지닌 신학자들의 의견일 뿐이고, 각각의 판단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신학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잠재적인 것일 뿐인데, 저자는 지나치게 자신의 판단을(정확히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자유주의적 신학방법론을) 확신하고 있다.

 

     ​예컨대 왕하 3장의 모압전투 가운데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히브리어 원문은 주어를 아예 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성경만을 보면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없다. 본문에서 저자는 그것을 신의 분노라고 읽지만, 꼭 그렇게 읽어야 할 것은 아니다. 모압 비문에서야 그것을 자신의 신학에 입각해 해석해놓았지만, 그 비석이 성경기록을 해석하는 키는 아니다.

     [엘 엘룐][엘로힘]을 두고 저자가 그리는 신관의 발전에 대한 이미지(다신교일신교유일신교)는 애초에 문학적 수사법 안에서 두 단어가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히브리 수사법에서 대구, 반복 등은 매우 자주 사용되는 방식이고, 각각의 단어들이 꼭 다른 대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전반적으로 이 책 속에서는 이런 식으로 수사적 표현과 논리적 정합성을 다투는 문장 사이의 혼동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물론 저자가 선택하고 있는 문자주의적 자유주의(?)’ 신학은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물론 저자가 책 속에서 지적하고 있는 기독교인들 가운데서도 발견되는 이중적인 모습들, 말과 행동의 불일치, 작은 부분에 집착하면서 더 큰 기회와 관계를 포기하는 좁은 시야 등은 분명 곱씹어 들을 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심지어 여호와가 인신제사를 좋아하는 신이라는 식의 주장까지도 거침없이 하는 걸 보며(이 부분에서 저자는 레 27장의 속전 개념, 3장의 레위인 대속 개념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저자가 메스를 들고 진리의 배를 가를 수 있는 능력은 있는 건지 싶다. 저자는 마치 자신이 성경 속 신앙인들로부터 바로 나온 것처럼 여기는 듯하지만, 그가 책 속에서 비웃고 있는 수많은 무명의, 그리고 많이 배우지 못했지만 신실하게 살려고 애썼던 신앙의 선배들 덕택에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것들은 생각지 못하는 것 같다.

 

     ​칼을 들고 다짜고짜 배를 가른다고 다 수술은 아니다. (, 저자는 수술이 아니라 해부라고 했으니 상관이 없는 걸까.) 해부용 메스는 휘두르는 게 아니라 조심스럽게 관련된 부분에만 그어야 한다. 하물며 의학적 목적으로 기증된 시신을 대할 때도 난도질을 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할 때는 좀 더 조심스럽게, 예의를 갖추는 게 기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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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더스 게임
개빈 후드 감독, 벤 킹슬리 외 출연 / 데이지 앤 시너지(D&C)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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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외계인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지구. 가까스로 공격을 물리친 인류는 우주 함대를 만들어 적들의 본거지를 향해 한 걸음씩 전진해 나간다. 이 과정을 위해 많은 아이들이 훈련병이 되었고, 주인공 엔더 위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외계종족과 싸움을 할 병사들을 길러내는 줄로만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이 훈련 프로그램은 함대를 총 지휘할 사령관을 길러내는 프로그램이었다. 짐작할 수 있듯 엔더가 최종 후보로 선출되었고, 동료들과 함께 실전과 같은 모의 평가로 최종 테스트를 받게 된다.

     인접한 모든 것들을 분자부터 분열시켜 파괴해 버리는 가공할 무기를 끌고, 적의 행성을 직접 공격하기 시작한 앤더의 함대. 큰 승리를 거둔 기쁨도 잠시, 앤더와 동료들은 그들이 모의전투가 아니라 실제 전투를 벌이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그들은 정말로 하나의 행성과 종족을 멸망시켜버렸던 것이다.

 

 

 

2. 감상평 。。。。 。。。

     작가는(이 영화도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왜 주인공으로 아이들을 내세웠을까? 사실 근력이나 지구력만 보면 성인들을 따라갈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영특함의 수준이라는 것도 분명한 한계가 있기 마련. 사실 전략 차원의 큰 그림은 애초부터 생각에 넣어야 할 자료가 워낙 방대하기에 영특함으로 커버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고, 현장의 흐름에 따라 임기응변의 상황대응력이 필요한 전술 쪽에서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도 기본기가 제대로 갖춰진 다음에서다. 그리고 기본기는 어린 아이들이 몇 달 연습해서 갖춰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화 속 어른들이 이 아이들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아이들은 조작하기 쉽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훈련 책임자 격으로 나오는 그라프 대령(해리슨 포드)은 아이들에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고 있었고, 특히 앤더와 그의 동료들로 구성된 함대가 외계인들의 행성을 공격하는 실제 전투를 벌일 때도 그저 모의전투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어떤 양심에 가책을 받지 않고, 적들을 끝까지 멸절시킬 수 있을 테니까. 이런 차원에서 영화 속 어른들의 모습은 아이들을 열악한 아동노동에 내모는 탐욕스러운, 그리고 무책임한 현실 속 어른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 작가는 왜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웠을까? 작가 역시 아이들의 그 순진함에 주목한다. 비록 그들이 조작을 당하기 쉬울 정도로 순진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기괴하게 생긴 외계의 존재와 대화를 시도할 수 있을 정도로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롭다. 또 아이는 으로 규정된 이들의 고통에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존재이기도 하다. 작가는 인류의 미래는 역시 그런 아이들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50년 전의 침략과 피해로 적들을 궤멸시켜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영화 속 군부의 모습은 딱 지금 이 나라의 자칭 보수 세력의 뇌구조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쩌면 상대가 우리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엔더의 말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극한의 대결구도의 사고방식,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에 대한 과도한 확신은 정신의 유연함을 잃어버리게 만들었고, 결국은 독재적인 행태로 치닫다가 몰락해버렸다. 핵무장 운운하는 자칭대안 보수도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영 그런 대결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모두를 소진시키다가 끝나버릴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은 아이들과 같은 약자들이고. 아이들이 이용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는 세상이 간절히 필요하다.

 

 

 

     영화 자체로만 보면 여러모로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 함선들 사이의 대규모 전투신은 제대로 보여준 것이 없고,(물론 이 부분은 돈이 좀 많이 들 테니..) 영화 중반 훈련병들이 팀별로 각개전술을 훈련하는 장면도 그냥 아이들의 서바이벌 게임을 보여주는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움직임에서 제대로 된 전술적 동작들이 나오기엔 무리.. 사실 이 부분은 그냥 끼워넣은 것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그리고 무엇보다 10대의 소년에게 인류의 운명이 달린 함대 운영의 전권을 쥐어준다는 설정 역시 무리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처음부터 개연성보다는 일종의 동화적(이상향에 관한) 메시지를 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니까. 시는 시처럼 감상하면 되는 거다. 시에서 신문기사 수준의 상세함을 찾는 것 자체가 넌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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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가 가득해서 프로야구까지 취소되었던 날.

근데 나를 더 괴롭게 만드는 건

저 앞에 걸어가며 담배펴대며 사방으로 연기를 뿜는 아저씨.

 

특히 아침부터 그런 길빵족들 만나면....

남들에게 피해 주면서도 그냥 생각 자체가 없는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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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를 찾아서 - 신약성경이 숨긴
옥성호 지음 / 테리토스(Teritos)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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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책은 사도행전 5장의 한 재판으로 시작한다. 사도들이 산헤드린에 끌려갔다가 풀려나는 이야기인데, 작가는 여기서 만약 사도들이 예수를 신이라고 주장했다면 그대로 풀려났을 리 없으며,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신이 아닌 정치적인 지도자로 생각하고 주장했을 분이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면 예수를 신으로 믿는 기독교 신앙은 어디서 왔는가? 작가는 이 신앙이 철저히 바울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는 과감한(하지만 낡고 확실한 근거는 없는) 주장을 한다. 갈라디아서에 나온 할례 논쟁을 통해 바울은 자신이 주장하는 것은 사도들과 전혀 상관이 없이 직접 신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주장하려 했고, 그렇게 자신의 신학의 우월성을 주장함으로써 사도들을 철저히 깎아내리려 했다고, 아니 그게 갈라디아서를 쓴 목적이라고까지 중하니 말 다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작가는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교회의 신앙을 에비온주의로 단정 짓는 무모함마저 보인다.

 

     ​이후 예수를 유월절 어린양으로 그리기 위한 요한복음의 무리수(?)와 성만찬 전례 속 예수의 발언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바울의 영향을 받아 의도적으로 그를 신성화하기 위해 나중에 쓴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하고, 세례 요한이 예수의 정치적 동지, 혹은 선배였고, 요셉은 반로마 혁명가였으며 마리아는 요셉의 동생과 계대결혼을 했고, 그래서 예수의 동생이라고 알려진 야고보는 실은 마리아와 요셉의 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라는 내용 등이 뒤로 이어진다.

 

 

2. 감상평 。。。。。。。

     이 작가가 쓴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 세 권을 인상 깊게 봤었다. 여러 사람들이 그 책에 대해 비판했지만, 나름 고민과 독서를 충분히 해서 쓴 책이라고 느꼈다. 특히 시리즈 두 번째 책인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는 아주 괜찮았다. 하지만 그 이후 몇 권의 소설을 낸 작가는 이제 거의 댄 브라운 식의 팩션작가가 다 되어버린 것 같다.

 

 

     작가의 첫 번째 주장부터 생각해 보자. 그는 제자들이 산헤드린에서 풀려났다는 이유로 그들이 예수를 신이라고 주장했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그저 정치적 메시아로 주장했다는 것) 사도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변호했던 가말리엘이 예로든 인물들이 정치적 투쟁을 벌였던 이들이라는 점도 한 근거로 사용된다.

 

     ​우선 이 주장은 사도행전의 기록 중 상당부분을 조작되었거나 거짓이라고 해야 하는 문제를 가진다.(이게 문제인 이유는 저자의 주장의 바탕이 사도행전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진짜이고, 어떤 것은 거짓인지는 누가 결정하는가?) 사도행전의 주장대로는 정말 말이 안 되는 걸까? 사도행전에 따르면 본문의 재판은 예수가 부활했다는 주장을 하지 말라고 위협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는 이미 그 소문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꽤 퍼져나갔음을 전제한다. 사도들이 풀려난 것은 그들이 백성들의 반발을 두려워했기 때문이거나(5:26), 본문에 실려 있지 않은 어떤 외부적인 요인 때문이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작가는 갈라디아서의 일부 기록을 전적으로 임의로 재구성해 바울과 예루살렘 교회 사이에 마치 전쟁이 있었던 것처럼 꾸미려고 노력한다. 그러면서 예루살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훗날의 에비온주의자들(에비온주의는 초기 기독교회 공동체로부터 일찌감치 이단으로 정죄된 일파다)과 같았다는 과감한 주장까지 나아가는데, 안타깝게도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제시되지는 않는다.(당연하다. 그런 자료는 애초부터 없으니까) 이 둘의 유사점이란 모두 유대 지역에 있었다는 것뿐인데, 이건 뭐 박근혜와 문재인이 같은 집무실을 사용했으니 둘이 같은 주장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비슷하다.

     요한복음의 유월절 예비일문제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공관복음은 최후의 만찬 날짜가 금요일로, 요한복음은 목요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뭔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본문의 예비일로 번역된 그리스어 [파라스케우에]는 그냥 금요일이라는 의미도 있다.(현대 그리스어에서 이 단어는 금요일로 사용된다.) 애초에 요한복음의 기록을 유월절 기간의 금요일로 해석했다면 복음서 저자가 일부러 감춘 것따위는 존재할 자리가 사라진다.

 

     이 책의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식의 근거가 부족한 주장들을 기정사실로 단정 짓고 내용을 전개해 나간다는 점이다. 예컨대 103페이지에서 작가는 나는 개인적으로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가 요한복음에서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복음서의 기록 상당 부분을 거짓이나 조작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 그냥 저자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뿐이다. 요셉의 반란군설이나 마리아의 계대결혼설도 마찬가지

 

     이런 식으로 계속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내가 이해가 안 되니 마태복음의 저자도 이해가 됐을 리 없다는 어이없는 주장까지 나온다.(215) 그냥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법적, 역사적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이 좀 더 정직한 자세가 아닐까.

 

 

     예수가 아닌 바울이 기독교의 창시자라는 주장 자체는 새로운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다. 이미 이런 주장은 오래 전부터 나와 있었고, 지금까지 확증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가 도그마에 재갈이 물렸다고 비아냥거리는 정통적 신앙을 가진 이들은, 실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주장에 가볍게 동조하며 날뛰지 않는 무게감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착각한 듯하다. 작가 자신은 뭔가 대단한 비밀을 풀어냈다고 자신만만할지 모르지만, 어쩌면 애초부터 비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책 서문에서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이 대단한 사실로 인해 기성교회나 신자들로부터 뭔가 대단한 핍박이나 공격이라도 받을 것처럼 설레발을 치고 있다. 일종의 순교자 프레임을 짜고 있는 것. 하지만 솔직히 얘기하면, 옥성호라는 인물은 옥한흠이라는 거대한 후견인과 분리해서 말할 수 있을까? 옥한흠이 아니었더라도 그가 처음부터 이런저런 책들을 써 낼 수 있었을까? 요컨대 그는 처음부터 핍박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거물의 배경 아래서 편하게 책을 써 왔던 인물이다. 이제 와서 순교자, 핍박받는 사람 이미지를 내세우는 건 좀 낯간지럽다.

 

     얼마든지 이보다 더 한 책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다만 겨우 이 정도의 내용으로 뭘 주장하려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 페이크 다큐 같은 건가? 작가는 이제 완전히 전업 작가로 나서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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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4-0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레발.ㅋㅋ
옥한음이 아니라 흠인데...

이책에 대한 평점이 높긴한데
노란가방님 리뷰도 일리는 있어보이네요.
아무래도 아버지의 후광도 없지는 않겠죠?
그래도 그 나이에 적지않은 책을 낸 걸 보면
나름 꽤 똑똑한 사람인 것 같긴한데
전 <서초 교회 잔혹사> 읽으면서 은근 걱정되더라구요.
아버님이 말년에 아들 목사되길 많이 바라셨다고 하던데
아버지와 다른 길을 길을 갈거라서 그런 순교자 프레임의 설레발이
필요을지도 모르죠.
지금은 뭐하며 지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저술 활동만 하고 있을까요?

노란가방 2018-04-07 15:31   좋아요 0 | URL
아 그렇네요.. 이름이 틀렸..ㅋ
(어제 늦은 시간에 막 휘갈겨 쓴 글이라 체크를 못했네요. 감사)
아무래도 그쪽 교회 일이라면 저보다 스텔라님이 더 잘 아실..

저도 가끔 알라딘에서 이름을 발견할 때나 접하곤 했는데
계속 책을 내고는 있는 것 같더군요.
말씀하신 것처럼 똑똑한 건 분명한데
충분히 숙성되지 못한 채 여기저기 좌충우돌하는 느낌도 들고 그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