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신앙 여정을 돌아보는 일은 의미가 있다. 신앙이라는 것은 어느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통해서 조금씩 축적되고 쌓여가는 면이 있다. 물론 이런 부분을 명확하게 포착하는 일이 쉽지 않긴 하지만, 잘 정리된 신앙의 여정은 읽는 사람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비록 그가 가진 신앙의 결이 나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유익을 끼칠 수 있다.
이 책은 저명한 신학자인 마커스 보그의 자서전, 정확히 말하면 신학적 자서전에 가깝다. 거의 평생을 학교 기관에서 일해 왔던 저자는, 스스로도 딱히 눈에 띄게 특별한 사건이 없었다고 말한다. 때문에 이야기는 그의 생애 가운데 조금씩 갖게 된 신학적 인식들을 하나씩 풀어 놓는 식으로 진행된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저자는, 대학생 시절 지적인 회심을 경험한다. 그 내용이란 기독교 안에 지적인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으로 인한 일종의 해방감 때문이었다는 게 흥미롭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가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만 서 있지 않다는, 앞서의 깨달음과 결이 비슷한 정치적 회심이 이어진다. 이미 이 시점에서 저자는 당시 미국 사회의 주류였던 보수주의적 기독교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회심은 저자도 말하는 “명백하게 종교적인 회심”이었다. 그는 일종의 신비적 경험을 했는데, 어느 날 운전을 하며 가다가 발견한 노을에 덮인 풍경 속에서 이른바 “경이감”을 느꼈던 것 같다. 이 부분에서는 C. S. 루이스가 평생 추구했던 “Joy”와도 비슷한 느낌이다. 루이스는 그것을 천국에서 이 자연세계로 흘러나온 것에 대한 갈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 경험은 짧았지만(때로 1분 이내), 이후에도 몇 차례 반복적으로 일어났고, 이를 통해 저자는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다만 여기에서 저자는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신학”에 대한 추구를 완전히 내던지고, 개인화된 신학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듯하다.
이후의 장들에서는 구원이란 현세에 관한 이야기이며, 성경에 대한 문자적 이해는 불충분하며 예수를 중심으로 새롭게(아마도 비문자적으로, 그리고 다분히 내가 갖고 있는 감성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옳으며, 예수의 십자가는 대속 보다는 일종의 삶의 모범으로서의 기능을 하며, 성경에서 진보적 정치 의제를 뽑아내는 데 집중한다.
사실 저자가 자신의 삶과 생각을 소개하는 무드인지라, 굳이 일부러 다른 견해를 강조하며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책 자체가 신학을 담고 있는 지라 몇 가지 떠오르는 질문들이 있긴 하다. 그 중 하나는 성경의 문자적 이해를 버린 채 “예수를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어떤 식으로 실제 기능하느냐인데, 결국 무엇이 예수를 중심으로 읽는 것인지는 독자의 주관성에 지나치게 의존하게 되지는 않을까.
신비주의와 자유주의의 만남이 조금은 독특하게 느껴졌다. 애초에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것이 이성에 기초한 신학의 재해석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신비주의적 요소가 자리 잡을 만한 데가 잘 안 보이지 않던가. 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엔 그렇게 합리주의적 면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그걸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는 걸) 저자의 삶이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여러분은 고차원적인 사랑과
스톡홀름 증후군을 정말로 구분할 수 있는가?
고차원적인 사랑은 자기를 괴롭히는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더라도
그의 악행을 봐주거나 자신이 입은 피해를 축소하지 않는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가해자의 동기를 이해한다는 이유로
핑계를 찾아 주고 그 사람의 일탈 행동들까지 옹호한다.
- 크리스텔 프티콜랭, 『당신은 사람 보는 눈이 필요하군요』 중에서
인간의 고통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에 하찮은 의미를 부여하며
인간이 만물의 중심인 양 만물을 바라보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 C. S. 루이스, 『고통의 문제』 중에서
제목이 눈에 확 띤다. 유튜브 썸네일이라면 한 번쯤 눌러보고 싶게 만드는 제목이다. 물론 이런 식의 썸네일을 단 영상들은 대개 제목과는 크게 상관없는, 또는 많이 과장된 제목이라는 게 금세 밝혀지긴 하지만, 관심을 끄는 데는 확실히 효과적이긴 하니까. 물론 내용까지 알차다면 이런 통계적인 선입관이 기분 좋게 깨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을 터.
제목에서 비판적으로 언급되는 “직업목사”란 누구를 가리킬까? 소위 “이중직”을 하고 있는 목회자들, 특히 1부의 소제목에도 나오는 이른바 “쿠팡목사”를 가리키는 것일까? 저자는 스스로 “이중직에 대해 비교적 유연한 편”이라고 말하고, “쿠팡 배달을 하면서도 복음의 사명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수만 있다면 무엇이 문제”냐고 되묻는다. 사실 제목에도 나오니 이 직업목사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밝히는 것이 책 초반에 나오는 것이 맞다. 하지만 책의 거의 1/3이 지나간 후에야 이런 정의가 나온다. “직업목사란 복음을 잘못 가르치는 목사를 의미한다.” (이건 구성의 실수다.) 심지어 “쿠팡 목사”에 관한 내용은 위에 인용한 딱 한 문장이 전부다.
사실 이 책의 주제가 이 문장에 담겨 있다. 저자는 복음에 충실한 목회자상을 그리면서,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을 반복한다. 당연히 옳은 호소이자 요청이다. 다만 이 주제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내용상의 발전이나 진전이 잘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냥 이런저런 예화들을 들며 반복해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다시 이 정의에서 조금은 불편한 지점이 보인다. 저자는 “직업목사”를 어떤 소명의식이나 자신이 하는 일의 본질을 잘 모르면서 그냥 돈만 받고 일하는 사람들로 여기는 듯하다. 물론 “그냥 직업적으로” 어떤 일을 한다는 표현에 종종 오로지 밥벌이의 수단으로만 하는 일이라는 가 섞여 있는 게 사실이지만, “직업(일)”이 그렇게 평가절하 되어야 할 말일까? (물론 이건 사소한 트집일 수 있다.)
책에는 다양한 예화들이 등장한다. 예화는 저자가 말하려는 주제를 강화시키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데, 책을 읽다 보면 오히려 주제를 흐리게 만드는 것 같은, 또는 그 상관관계가 그리 높지 않은 것 같은 이야기들도 자주 보인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한 소년이 친구의 만년필을 보며 부러워하다가, 이제 나이 들어 집에 수십 자루의 만년필을 갖게 되었다. 한 모임에서 어린 시절 부러워했던 친구를 만나 ‘당시 네가 참 부러웠다. 네 만년필이 나에게 큰 상처였다’는 말을(응?) 했더니 그 친구가 ‘나는 상처를 준 적이 없다. 그건 네가 혼자 만든 것에 불과하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에서 저자는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의 모습”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애초에 예화란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건데, 이 사례는 도리어 한참을 고민하게 만든다. 이게 무슨 말인지. 그래서 예화 속 누가 문제였던 건지.
또 같은 페이지에는 잘 알려진 설교자 찰스 스윈돌의 예화를 인용하는데, 내용인즉 노예제도가 폐지된 후 노예들이 두 부류로 나누어졌는데, 주인의 집에서 계속 일하겠다고 했던 이들과 나가서 자유를 누리려고 했던 이들이다. 그 중 후자 쪽은 술과 도박에 빠져 방탕한 삶을 보냈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여기에서 “자유가 주어졌어도 책임 있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데, 결론은 옳지만 그 과정에서 사용한 예화가 오늘날 독자들이 보기에 과연 적절한 걸까? 애초에 선택지를 두 개밖에 주지 않고 그 중 후자를 비판한다면, 노예 해방 이후에도 계속 주인의 집에서 일하는 게 옳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는다.
한참 쓰다 보니 너무 책에 대한 평가가 인색했다는 느낌도 든다. 사실 앞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책 자체의 주제의식에는 공감을 한다. 나름 밑줄을 그어둔 문장도 몇 개 있다. 무엇보다 목사가 먼저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자신의 일(직업!)에 소명의식을 갖고 임해야 한다는 주장에 이견이 있을 리 없다.
다만 이 주제의식을 표현하는 방식이, 그것을 담는 그릇이 잘 만들어졌는지는 별개다. 제목부터 내용과 충분히 호응되는지 모르겠고, “직업”이라는 단어를 너무 성속이원론적으로 다루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예전에 존 파이퍼의 책 가운데서도 “전문직업인”이라는 표현을 비슷한 느낌으로 사용했던 기억이 있다.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던 것인지 개정판에서는 제목이 완전히 바뀌었다). 앞서도 말했던 것처럼, 글의 전체적인 구성 면에서도 아쉬운 부분이 많다.
최근 몇 년 동안 여러 기업가들과 창업가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소명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단어는 책상에서 신학책을 펴고 배울 게 아니었다. “직업”은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는 기회이자, 치열한 믿음의 싸움이 벌어지는 현장이다. 이 책의 제목을 듣고 조금 어질어질한 기분이 들었던 이유다. 제목이 절반 이상이었지만, 또 그 제목이 감점 요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