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가장 잘 알려진 선교학자였던 레슬리 뉴비긴의 교회론/선교론에 관한 책이다. 제목에서 이미 이 책에서 어떤 말을 하려는 것인지 잘 알 수 있는데, 저자인 뉴비긴은 현대사회가 다원주의화 되었다고 진단하면서,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복음을 따르고, 전할 수 있을지를 이 책에서 살피고 있다.
책 초반은 다원주의가 무엇인지, 특히 그것이 가지고 있는 대전제가 무엇인지를 살피는 데 할애되어 있다. 저자는 일견 굉장히 포용적이고 평등해 보이는 다원주의가 실은 검증되지 않은 대전제―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절대성을 주장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주장―를 고수하고 있는 모순적 사상임을 반복적으로 지적한다.
이런 다원주의가 주류가 된 세상에서 기독교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있다. 모든 사상과 종교가 동등한 입장에 서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특성은 독선이나, 과거 20세기까지 이어졌던 제국주의적 모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다. 그 때문인지 일부 기독교인들은 기존의 선교적 관점을 폐기하고, 사회정의나 약자들을 위한 신학(크게 보면 해방신학에 속한 다양한 아종들)을 계발하거나, 교회가 속한 그 지역의 문화에 대한 무제한적인 수용을 절대적 과제로 삼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런 다원주의적 세계 속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절대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새로운 기준이 된다. 기독교인들은 조금 더 자신감을 갖고 복음을 전해도 괜찮다. 다만 이때 그들이 받은 선택이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을 함께 지는 역할로의 선택이지, 복음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어떤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500페이지에 가까운 내용이 꽉 차있는 책이다. 분량도 분량이지만 담겨 있는 내용이 결코 쉽지 않아서, 꼭꼭 눌러가며 읽어 가는데 일주일이 훌쩍 넘게 지나버렸다. 40년 동안 인도에서 선교사로 사역해온 저자의 경험과 교회와 선교에 대한 깊은 고찰이 잘 어우러져서 ‘고전’이라고 불릴 만한 작품이 나왔다.
이 책이 나온 지 10년이 훨씬 더 흘렀지만, 여전히 뉴비긴이 말하고 있던 다원주의에 대해서 교회는 적절한 대응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주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전략을 짜는 일 자체가 보기에 드물기도 하다. 그 결과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은 거의 상실된 것처럼 보인다. 일부 개별 교회들이 열심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사회 전반에서 기독교나 신앙의 위치는 어디까지나 개인적 신념의 영역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대응책은 이미 나와 있는 셈이다. 문제는 우리가 거기에 관심이 없다는 점이고, 이렇게 된 데에는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예 문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껏 나오는 반응이 언론이 문제라는 식의 불평뿐이라면, 우리는 이 판 자체를 흔들 능력을 영원히 갖지 못할 것이다.
사실 늦은 때는 없다. 애초에 기독교는 매우 적대적인 상황 속에서 300년을 시작했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교회의 가장 큰 무기인 희생과 사랑, 진리에 대한 열정을 성장시켜왔으니까. 여전히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교회가 제대로 문제를 인식하고 힘을 합쳐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면,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미래는 달라질 수도 있다.
훌륭한 현실 인식과 선교를 바탕으로 한 교회론을 훌륭하게 그려낸 게 장점인 책. 한 번은 읽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의 폭력에 대해 야웨가 최초로 취한 행동은
가인을 추방하고 보호하는,
자비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인간의 폭력에 대해 야웨가 최초로 보인 감정은 슬픔이었다.
L. 대니얼 호크, 『하나님은 왜 폭력에 연루되시는가?』 중에서
우리의 기분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변한다. 상쾌하게 시작된 아침이, 바로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며 걸어가는 무개념 보행자 때문에 금세 망쳐지기도 하고, 한참 우울하던 기분이 작은 친절이나 선물로 인해 급격히 밝아질 때도 있다.
하지만 때로 어떤 한 기분이 조금 오랫동안 지속되는 일들도 있다. 문제는 우리를 계속 가라앉게 만드는 기분이 이어지거나, 좀처럼 적절한 컨디션으로 돌아오지 못할 때이다. 이런 일들은 무슨 특별한 사람들만 격는 게 아니고,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의 그런 기분을 음악으로 조절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실 사람의 기분이 그렇게 쉽게 ‘조절’까지 가능할까 싶은 의심이 들긴 하다. 책을 읽어보면 의외로 이미 많은 곳에서 우리는 음악을 그런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어떤 음악을 듣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행동도 영향을 받는다는 명제는,예를 들면 마케팅 분야에서는 진작부터 사용되고 있다. 주로 구두나 액세서리 같은 것을 파는 백화점의 1층에서는 어떤 곡을, 여성복을 파는 2층과 남성복을 파는 3층에선 또 어떤 음악을 틀어야 하는지는 이제 어느 정도 상식이 정립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그런 내용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무슨 뇌파의 영향을 주고 하는 식까지 나아가지는 않지만, 음악이 우리의 기분에 분명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고, 가능하다면 그걸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하는 건 지혜로운 방법인 것 같다.
다만 음악이 우리의 감정이나 기분을 완전히 전환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조금 확신을 하지 못하겠다. 저자와 직적 만나 이야기 했던 자리에서도 말했듯이, 개인적으로는 음악이 갖는 힘은 우리의 기분을 ‘증폭’시키는 것 정도가 아닐까 싶다. 우울한 사람을 조금 더 우울하게, 혹은 기분 전환의 욕구가 있는 사람에게 그 전환에 도움을 주는...
그리고 이 음악의 효과라는 게 개인차가 어느 정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꽤 큰 폭으로 이 증폭이 일어나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대적으로 작은 폭으로의 전환만 일어나지 않을까. 물론 섬세하게 선택된 곡들은 그 폭을 확대시키는 데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음악을 설명하는 책이다 보니 단지 글로만 설명하는 것은 확실히 부족하다. 그래서 책에는 여러 개의 QR코드가 들어있는데, 특정한 상황에 맞는 음악에 관해 설명하면서, 실제로 저자가 고른 관련 음악 리스트가 소개되는 식이다. 유튜브 재생목록으로 정리되어 있으니 한 번 실제로 들어보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하다.
책이라는 구태의연한 문화기술은
디지털화된 정보의 쇄도 아래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다르게 조직된 정보 세계의
특별하고 감각적인 경험이라는 신비로운 효력을 얻는다.
빌헬름 슈미트,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