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 교리 분별하기 - 교리 차이의 경중 어떻게 볼 것인가
게빈 오틀런드 지음, 이제롬 옮김 / 개혁된실천사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 교리란 어떤 의미일까? 좀처럼 어려운 사고를 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교리란 그저 어렵고 무슨 내용인지 잘 와 닿지 않는(그래서 별 실용성이 없는) 현학적인 진술 정도로 여겨질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교리를 예수가 전한 사랑의 메시지가 변질된 무엇이라고 생각하거나, 기독교인들을 분열시키는 원흉이라고 보기도 한다.


물론 이런 관점들은 진실의 일부를 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일부가 언제나 전체를 그대로 그려내는 건 아니다. 코끼리의 코와 발과 꼬리를 만졌다고 해서 코끼리 전체의 모습을 알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교리는 기독교의 등뼈를 이루는 부위다. 단지 교리만 있다고 해서 기독교가 완성되는 건 아니지만, 교리가 없다면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라고 부를 수 없는 무엇이 되어 버릴 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일찌감치 이 사실을 알고 있었고, 때문에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진술하기 위한 노력을 수백 년 동안 경주해 왔다.





하지만 분명 교리가 일으킨 문제도 적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교리를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이와 관련해 다양한 부분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중에서 이 책의 저자는 사람들이 모든 교리(적 진술)를 똑같은 중요도를 갖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 문제였다고 보고 있다. 어떤 교리는 기독교를 세우는 핵심적인 위치에 있지만, 또 다른 교리들 중에는 그 정도로 중요한 것은 아닌 것도 있다는 말이다.


저자는 크게 네 단계로 교리의 중요성을 구분하고, 복음의 본질에 관한 1순위 교리부터, 교회의 건강과 실천을 위해 매우 중요한 2순위 교리, 기독교 신학에는 중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신자들이 나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3순위 교리,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고 함께 사역을 하는데 있어 중요하지 않은 4순위 교리로 나눈다.


그럼 각각의 위치에 있는 교리는 어떤 걸까? 저자의 구분에 따르면, 1순위 교리에는 동정녀 탄생과 믿음으로 얻는 의가, 2순위 교리에는 세례의 의미와 방식, 영적 은사의 지속에 관한 견해, 남녀 간의 관계에 관한 내용 등이 포함된다. 3순위 교리의 예로는 천년왕국설(전천년설, 후천년설, 무천년설)과 창조에 관한 견해 등이 들어간다.(4순위는 굳이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이런 구분은 어느 정도 임의적인 부분이 있다. 애초에 이런 구분 자체를 저자가 만든 것이니까. 어떤 사람들은 세례나 성찬의 의미에 대해서 2순위가 아니라 1순위라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창조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것이 기독교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것이 3순위에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사실 꽤 쎄 보이는 느낌의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려는 건 오히려 애초의 인상과는 반대되는 느낌이다. 저자는 교리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교리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분열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니겠느냐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교리들의 경중을 나누어서, 어떤 부분에서 서로 견해가 다르더라도 그것이 핵심적인 교리가 아니라면 하나 됨을 추구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주장한다.


모든 문제(분열)가 낮은 순위의 중요도를 가진 교리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니 것이다. 그보다는 서로에 대한 존중의 부족, 자신의 아는 것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는 교만함, 그리고 감정의 대립 같은 인간적 관계 차원에서의 문제가 일으킨 분열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내세운 명분이 대개 교리라는 건 참 슬픈 일이다.



이런 차원에서 교리들 사이의 중요도를 구분해 보자는 저자의 제안은 꽤 울림이 있다. 단, 이 구분을 놓고 다시 싸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기독교는 신비 위에 세워진 종교이고, 신비란 그 특성상 처음부터 우리가 완전히 파악하기 어려운 면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하나의 해석이 유일한 것이라는 착각에서만 벗어난다고 해도, 우리(그리스도인들)는 좀 더 힘껏 서로의 손을 잡고 더 큰 일을 위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광야에서 정말로 무서운 것은 거기서 듣게 되는 수많은 목소리들이다.

텔레비전, 라디오 휴대용 MP3 플레이어를 끄고

또한 일상의 잡담들과 분주함에서 떨어져 나와

조용히 귀를 기울여 듣기 시작할 때 들려오는 것은 무엇인가?

들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

무비판적으로 들으면서 그 흐름을 따라가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위로의 소리나 부르심의 소리인지,

혹은 매우 그럴 듯하고 합리적이고 위안을 주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왜곡하는 소리여서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고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면서 조롱 속에서 우리를 내팽개치는 소리인지를

구분하는 힘든 작업을 하는가?


- 톰 라이트, 『내 주님 걸으신 그 길』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빛의 시대, 중세 - 폭력과 아름다움, 문명과 종교가 교차하던 중세 이야기
매슈 게이브리얼.데이비드 M. 페리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는 멸칭으로 부르곤 한다. 암흑의 시대, 즉 아무 것도 볼 게 없고, 기억해 둘 만한 것도 없는 낙후되고 뒤떨어진 미신의 시대, 인류의 진보 역사에 도움될 게 하나 없는 무지와 야만의 시대라는 의미다. 당연히 이런 평가는 지나친 감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르네상스 초기 인문주의자들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너무 매도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그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그렇게 답이 없는, 절망적인 느낌으로 와 닿았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어떨까.


이 책의 저자들은 바로 그런 중세에 관한 이미지를 뒤집고자 했다는 것을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중세는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빛의 시대”라는 것. 이 책의 저자들은 중세 곳곳에서 빛을 발했던 자리들을 크게 보면 연대순으로 살펴나가면서, 중세에 관한 일종의 역사적 스케치를 진행해 나간다.




사실 이런 내용 자체야 크게 드물지 않다. 이제 진지하게 역사를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중세를 “암흑의 시대” 같은 시대착오적인 표현으로 부르지 않을 테니까. 역시 관건은 그러면 어떻게 이 작업을 독자의 흥미를 이끌어 내면서도 학문적 성과를 충실하게 반영할 수 있느냐 일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이 책은 두 가지 목적을 훌륭하게 달성했다.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사실을 기술하는 방식이 아름답다는 점이다. 어쩌면 책을 쓰면서, 여기에 실린 문장들을 반드시 자주 인용되게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멋있다. 단순히 미사여구를 잔뜩 붙여서 과장스럽게 표현했다는 말이 아니다. 사안의 핵심을 분명하게 표현하면서도, 질질 끄는 식으로 이어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원문 자체가 뛰어났을 수도 있고, 번역자가 훌륭하게 작업을 했던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둘 다일 수도 있고. 책을 읽는 입장에서 문장의 질은 의외로 중요한 요소다.


단순히 문장만이 아니다. 전체적인 구성도 나쁘지 않지만, 군데군데 박혀 있는 탁월한 통찰은 책을 읽는 맛을 더해준다. 예를 중세의 여러 민족단위의 개종에 정치적인 고려가 담겨 있었다는 사실이야 많이들 지적하는 부분이지만, 당시 민족들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선택지―아리우스파와 가톨릭파―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른 각각의 이익에 관해서 저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리우스파를 선택할 경우 정통파에 속한 황제나 대주교, 교황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수 있었고, 반대로 가톨릭파를 선택할 경우 기존의 권력망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얻게 되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는 아리우스파 선택에 따른 독특한 이익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또, 중세에 수없이 건설되었던 성에 관한 일반적인 인식의 재고(대개는 나무로 만들어진 조악한 성이었다)나, 또 자주 개최되었던 공의회에는 당대 약화되었던 왕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신앙에 기초한 일종의 대안 질서를 세운 것이라는 설명도 흥미롭다.




물론 천 년에 달하는 그 시기 전체가 환하게 밝기만 했던 건 분명 아니다. 하지만 어디 하나 빛나는 곳 없이 어둡기만 했던 것도 아니다.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 당시 접할 수 있었던 다양한 지식의 원천으로부터 얻은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나름의 합리적 사고에 따라 살아왔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빛은 그 시대 곳곳에 알알이 박혀 있었다.


중세에 관한 잘못된 이미지는 단지 과거에 대한 정보 오류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건 오늘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들은 이 부분을 제대로 지적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를 중세에 투사함으로써 스스로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려고 애쓴다. 그 중 하나는 중세를 어둠의 시대로만 봄으로써 근대의 이성주의적 사고의 위엄을 뽐내려 하는 식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인종이나 종교관의 우월성을 자랑하기 위한 도구로 중세를 윤색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이런 면을 조명하는 책들이 자주 나오는 것 같아 반갑다. 그 중에서도 이 책은 퀄리티까지 좋으니 금상첨화다. 중세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