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부터 기독교와 자본주의 사이의 밀착 관계에 관한 유명한 주장이 있었다. 최초의 사회학자라고도 불리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라는 책에 나온 주장이 그 기원이다. 책에서 베버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에는 단지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기반만이 아니라 사상적인 측면의 지지도 필요했고, 바로 여기에 그가 뽑은 칼뱅주의의 특정한 신학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많이 착각하는 것처럼, 베버는 기독교가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사실 자본주의 발전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었고, 그 중 하나로서 당시 유행하던 기독교 신학의 영향력을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베버의 시대로부터 1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의 주장의 일부를 과장해서 기독교가 자본주의적 발달을 이끌었다는 식의 왜곡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게 현실이다.(사실 베버는 자본주의도, 기독교도 그리 긍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백 번 양보해 자본주의 발달에 기독교가 기여했던 점이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게 곧 자본주의가 기독교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예컨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기독교회에서 만들어낸 종교재판이 기독교의 본질과 상관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테니까. 또, 베버가 봤던 자본주의와 그로부터 100년이나 지난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즉 금융자본주의는 그 명칭만이 아니라 내용 또한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다.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지 무슨 교리를 반복하듯 기독교와 자본주의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건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한다. 저자는 책 초반, 이 책을 쓴 자신의 목적은 베버와는 정반대라고 밝힌다. 그는 “기독교 믿음이 어떻게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뒷받침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시키는지 보여 주고자”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책 제목에도 나와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란 금융자본주의를 말한다.
책의 내용의 대부분은 금융자본주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작동법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금융자본주의란 금융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말한다. 쉽게 말해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더 높은 수익률을 위해 사회질서의 전반이 재편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피케티도 지적했듯, 이미 금융자본의 수익률이 전통적인 노동을 통한 수익률을 아득히 추월해 버린 상황에서, 이 자본이라는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해 온갖 제도들이 재정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금융자본주의에 의한 지배는 결과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불평등, 격차를 만들어 낸다. 책에서는 금융의 “훈육”을 받았다고 표현되는데, 좋은 포착이다. 현대 사회는 기업과 정부, 개인까지 모두가 돈의 법칙에 복종하며 살아가고 있고, 누군가 이 질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돈이 휘두르는 채찍질을 피해갈 수가 없게 된 시대다.
노동자들은 이 질서에서 이탈하는 순간 생존의 위기를 맞게 되니 어쩔 수 없이 이 불공정한 게임의 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다른 것에 신경 쓸 새 없이 단지 눈앞의 과업에 집중하도록 유도된다. 끝없는 경쟁은 생산성의 향상보다는 개인의 책임에 대한 강화, 즉, 모든 최종적 책임을 개인에게 미루는 식으로 작동할 뿐이다. 이런 경쟁은 모두가 아닌 소수의 자본가들의 이익을 더 늘리는 데만 봉사한다.
이런 식으로 책은 현대의 금융자본주의가 초래한 다양한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비록 어떤 통계라든지 하는 수치가 인용되면서 주장을 뒷받침하는 식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현대의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 지에 대해서 윤곽을 제대로 잡아 준다. 그렇다면 이제 저자의 또 다른 목표였던, 기독교가 이런 현대의 금융자본주의를 약화시키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설명할 차례다.
개인적인 느낌은, 이 책이 이 두 번째 부분, 그리고 어쩌면 이 책의 핵심적인 목표를 제대로 설명하는 데는 좀 약하지 않았나 싶다. 경제라는 영역은 굉장히 실제적인데, 이에 대한 기독교의 비판, 혹은 대안은 조금은 추상적으로만 느껴졌달까.
사실 이런 경향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좀 나타났는데, 예를 들어 2장의 경우 “과거의 사슬에 묶여”라는 시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 내용은 오늘날의 노동자들이 과거에 맺은 계약에 묶여 그 이후 발생하는 다양한 변동성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반면 고용주들은 얼마든지 사정에 따라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고.
저자가 이에 대한 기독교의 반론으로 소개하는 건, 회심이다. 기독교는 우리가 과거에 누구였는지(특히 죄에 어떻게 연루되었는지)에서 돌이킴으로써 그것이 일으킨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점에 있어서 과거에 맺은 어떤 종류의 계약이 우리의 오늘과 미래를 사로잡도록 내어주는 금융자본주의와는 다르다는 것.
사실 이건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반론이라기보다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식의 자본주의에 기독교의 이론적 배경이 별 상관이 없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시도다. 쉽게 말해 기독교의 세례를 금융자본주의에 주지 말라는 것. 여전히 베버를 운운하면서 기독교와 자본주의 사이의 밀착을 강조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반론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기독교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딱히 더 와 닿을 부분도 없지 않을까.
애초에 이 책은 기독교에 기초한 어떤 대안적 경제이론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사실 이 상황이 그런 식으로 해결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다만 기독교가 특정한 형태의 경제정책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듯한 그 지긋지긋한 주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반박은 될 수도 있겠다. 특히 현대의 금융자본주의 안에서 고삐가 풀린 채 날뛰고 있는 맘몬이라는 우상과, 이를 제어하기는커녕 덩달아 그 숭배의 행렬에 동참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관점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에게도 그 평범함을 돌파하는 길이 있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냉철하게 따져보고,
자기 혼자 모든 일을 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때
그 길이 열린다.
-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 2』 중에서
음모론.
영화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모론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전제한다. 얼마 전 시내버스가 일으킨 교통사고로 죽은 세 명의 사람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중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설계된 사고라는 것. 아이러니한 건 주인공 영일(강동원)과 그의 패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정확히 바로 그 작업이었다. 의뢰를 받고 사고로 위장해 사람들을 살해하는 일.
영일은 자기들보다 훨씬 더 크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그룹이 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이른바 ‘청소부’라는 존재. 어느 날 영일 패거리는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아버지를 살해해 달라는 그의 딸의 의뢰를 받게 되고, 의뢰를 위해 작전을 진행하던 중, 자신들이 더 큰 조직, 청소부의 타겟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 그대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이야기.
뭐 여기까지는 나름 설계가 잘 됐다 싶은데, 문제는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솜씨. 무엇보다 영화 말미에 설명되는 ‘청소부’의 정체가 모호하다. 그건 영일이 만들어낸 상상의 존재인가, 아니면 정말로 존재하는 조직일까. 결국 영화가 끝난 후 나오면서도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헐겁다.
영화의 메인소재가 사건을 조작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조직이니 만큼, 그 설계 과정이 얼마나 촘촘하고 절묘하게 만들어지느냐가 영화를 보는 중요한 재미 포인트였다. 초반에 한 사람을 재건축 공사장으로 끌어들여 처리하는 과정은 나름 긴박하게 전개되긴 했지만, 역시나 너무나 많은 우연적 요소가 남아 있어서 ‘일을 저런 식으로 한다고?’ 하는 의문이...
주인공 조직의 또 다른 주요 사건인 법무부 장관 후보자 의뢰건도 마찬가지다. 온갖 의혹으로 수많은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코앞에서 후보자 한 명만 정확하게 제거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 일을 위해 사용한 방법이 너무나 위험하다. 계획의 일부만 틀어졌어도 단번에 대형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일.
두 개의 조직이 서로를 견제하는 과정이 일종의 첩보물처럼 펼쳐져야 하는데, 이건 그냥 가끔 유튜브 알고리즘에 뜨는 기이한 도미노 영상을 보는 것 같다. 물론 그게 실제고 신기하긴 한데, 왠지 현실감이 없는 듯한... 저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려면 반드시 정교한, 그것도 조금의 변수도 없는 그런 계획이 필요하겠구나 하는 생각. 딱 영화 속 작전을 보는 느낌이 그랬다.
캐릭터의 매력.
또 하나의 어필 포인트는 역시 매력적인 캐릭터여야 했는데, 이 부분도 아쉽다. 각 캐릭터가 가진 매력이 충분히 어필된 걸까. 뭔가 과거를 가진 인물들이 잔뜩 나오긴 하는데, 그 ‘과거’가 충분히 공감되는 과거인가 하는 부분은 확신이 가지 않는다. 뜬금없이 등장한 트랜스젠더 캐릭터는 할리우드를 따라하고 싶었던 건가 싶고, 이들이 왜 모였는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동지애의 근원에 대해서는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
여기에 주인공 중에서도 주인공인 강동원의 영일 역은 자기 혼자 고민하지 누구와 나누는 법이 없다. 물론 누굴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그게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답답함도 늘어나고, 결곡 자기 혼자 나서다가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 끝나버리니 더더욱 매력이 떨어진다.
어쩌다 보니 별로였던 점만 잔뜩 언급해버렸는데, 뭐 그래도 영화관에 앉아 있는 내내 딴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였다. 다만 뭔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못했다는 실망감이 좀 있었던 거고. 전반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엔 아쉬웠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