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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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는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상황의 주인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아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 튀어나와 놀라게 된 것 아닙니까,

대단한 극적 효과지요.


 


. 줄거리 。。。。。。。                   

 

     단 한 명만 빼 놓고 모든 사람의 눈이 보이지 않게 된 끔찍했던 상황이 끝난 지 4년, 사람들은 모두 암묵적으로 그 때의 기억을 묻어버리기로 약속을 한 듯하다. 하지만 수도에서 일어난 한 사건으로 인해 사람들은 다시 그 때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어느 날 일어난 백지투표 사건이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새벽부터 쏟아지는 엄청난 비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투표장으로 오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의 역할을 했고, 오후가 되어서도 좀처럼 투표장에는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모두가 사상 최악의 낮은 투표율을 기록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질 즈음, 드디어 비가 그치자 일순간 수많은 사람들이 투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떠올려보라, 엄청난 사람들이 같은 시간 집에서 나와 투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공중에서 보면 마치 거대한 생명체가 그 촉수를 구역별로 마련된 투표장으로 뻗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모든 문제는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개표가 시작되면서 더욱 경악스러운 일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사상 초유의 백지투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전체 투표수의 70% 이상이 아무 정당에도 투표를 하지 않은 말 그대로 백지 투표지를 투표함에 넣었던 것. 일주일 후 실시된 재선거에서는 그 비율이 더욱 높아져, 무려 83%에 달하는 백지투표가 이루어졌다.
 

  

 

     이 사건을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정부는 말 그대로 혼란에 빠진다. 총리 이하 각 부의 장관들은 연일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지만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고, 결국 모든 책임을 수도의 주민들에게로 돌리는 결론을 도출한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정부의 모든 기관들을 수도 밖으로 이관시키고(우리나라였으면 관습헌법 위반으로 문제가 되었겠지만), 이 경악할 일을 꾸민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비밀요원들을 침투시키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들을 가두고 심문하지만, 밝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던 중 수도에서부터 날아 온 한 통의 편지는 사건에 대한 접근의 방식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게 만든다.

 

. 감상평 。。。。。。。                    


     전작인 ‘눈먼 자들의 도시’보다 훨씬 더 정치적 색채가 많이 가미된 책이다. 아마도 ‘선거’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드는 듯하다. 만약 대부분의 사람이 특정 정당에 투표하는 대신 백지투표를 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라는 역시나 이색적인 상상은 이 책에 재미를 부여하는 핵심적 요소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서 강하게 부각되는 부분은 정부를 비롯한 권력자들의 무능과 무책임이다. 법을 만들고 그것을 집행하는 자리에 있는 그들은, 법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는 데에도 전문가였다. 누가 봐도 현 정치권에 대한 불신임을 강하게 드러낸 것이 분명한 대량의 백지투표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찌감치 이번 사건은 현 정권에 대한 불신임을 나타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 버리고, 도리어 이 일을 주도한 세력을 반정부인사나 불순한 선동가로 몰아세운다.

 

     한편 정부의 무책임한 계엄령과 정부기관들의 이전으로 일어난 무정부상태에서도 수도의 주민들이 보여준 의연함은 매우 대조적이다. 정부 당국자들은 각종 언론을 통해 곧 폭동을 비롯한 심각한 혼란이 수도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했지만, 그들의 말과는 달리 실제 수도에서는 별다른 문제가 발생되지 않는다. 오히려 수도 주민들을 괴롭히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해 지하철 폭발이나 일으키는 정부 당국자들이었다. 그들은 법을 수호한다는 미명 아래 초법적인 일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이 모든 내용들을 통해 저자의 이력에도 있는 공산주의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정부와 같은 권력자들을 근본적으로 믿지 못하고, 시민 혹은 인민들의 대동단결로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사회주의적 발상. 물론 저자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에 일견 타당성이 있는 것은 부인할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제한과 문제들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폭력’.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주제 사라마구는 전혀 폭력이 동원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혁명’을 제안하고 있다. ‘투표’라는 민주주의의 핵심적 도구를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연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에서 현실성이 배제되어 있다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약점이다. 과연 사회주의자들이 원하는 세상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누구도 실제적인 대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저자 역시 소설 상의 도시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인 스케치로만 그려져 있을 뿐, 그 세부적 구조는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책 속에 등장하는 수도 주민들의 모습은 그들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을 정도다.

 

 


     전작인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는 기발한 발상으로 인간의 폭력적이고 잔인한 본성을 실감나게 그려낸 저자는, 이번 작품 ‘눈뜬 자들의 도시’에서는 비록 사물을 분간할 수 있는 시력은 가지고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진실에 대해서는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저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에 전작과는 달리 지나치게 정치색이 많이 칠해져 있어서 오히려 마이너스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보다는 인간성에 대한 탐구가 좀 더 드러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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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베틀 경문수학산책 18
클리퍼드 픽오버 지음, 이상원 옮김 / 경문사(경문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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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는 신이 수학자였는지 아닌지 모른다.

하지만 신이 우주라는 천을 짜 내려갈 때 수학이 그 베틀 역할을 했음은 틀림없다고 믿는다.

 

. 요약 。。。。。。。                       

 

     이 책이 꽂혀 있던 서가는 ‘수학’과 관련된 책들을 모아 놓은 곳이었다. 당연히 이 책 역시 수학책이다. 물론 수학책이라고 해서, 교육과정표에 맞게 각종 공식들을 소개하고, 문제들을 실어 놓은 책은 아니다. 그보다는 수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조명해보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굳이 수학서적에 ‘신의 베틀’이라는 이상야릇한 이름을 붙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때문에 처음에는 책의 제목을 잘못 이해했었다. ‘신의 베틀’을 ‘신의 배틀(battle)’로 이해했던 것. 이름만 들으면 무슨 SF 소설인가 싶지만, ‘배틀(battle)’이 아닌 ‘베틀(loom)’이다. 베틀은 직물을 짜는 기계를 말하는데, 저자는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이 세상을 수학이라는 베틀을 사용해 짜 내려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즉, 이 책의 당초 목적은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교한 수학적 매커니즘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제목부터 상당히 문학적이더니, 내용의 전개방식에서도 그런 티를 내기 위해 애를 쓴 면면이 보인다. 책의 내용은 단순히 이런저런 내용을 설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독자와 동일시된다. 마치 체험놀이기구를 타는 사람처럼, 독자는 책 속의 주인공이 되어 조수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와 미래를 오고가면서 사람들이 수학적 진술과 그들의 종교적 심상을 어떻게 연결시켜왔는지를 살피게 된다.

 

 

. 감상평 。。。。。。。                    

 

     나름대로 애를 쓴 책으로 보인다. 흔히 서로 대결구도를 가진 것처럼 생각되는 수학적 사고와 종교적 사고가 역사적으로는 오랫동안 서로 연결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은 주목할 만하다. 비록 책을 읽으면서 그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숫자들과 기호들, 공식들을 일일이 의미 있는 숫자로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그러기에는 종종 나 같은 비전공자들이 읽기에 지나치게 어려운 감이 없지 않다.)

     실제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각종 정교한 수학적 원리들은, 그 모든 것이 단지 우연히 된 것이라는 설명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만들지 않는가. 또, 소위 과학적 사고의 핵심 중 하나인 ‘보편타당성’이나 ‘필연성’과, 진화에 있어서의 핵심 원리인 ‘우연’은 도무지 어울릴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저자의 야심찬 의도에도 불구하고, ‘수학사 전반에 걸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으려고 하는 약간은 인위적인 노력’ 때문에 책의 중반에 들어가서는 약간 긴장도가 떨어진다. 종종 그 근원이나 원리가 의심스러운 수비학(數秘學, Numerology)에 불과한 주장들을 대단히 중요한 무엇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게다가 특별히 성경과 관련된 여러 세부설명에 사실과는 좀 다른 내용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다른 종교나 사상들에 대한 설명에서도 같은 식의 오류들이 들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자연스럽게 든다.(여러 가지로 책에는 마이너스적 요소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신’은 기독교적인 신은 아니다. 그저 이 세상을 계획적으로 창조했을 것으로 가정되는 가상의 어떤 존재나 힘, 의지에 대한 설명으로 보일 뿐이다. 잘 해봐야 이신론(理神論, Deism)적 신의 개념이라고 할까? 하지만 수학과 신이라는 개념을 연결시키고자 했던 저자의 시도 자체는 꽤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결론이 좀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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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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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순진한 착각이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이 그들을 얼마나 추하게 만드는지 모르고 있다.





 

. 줄거리 。。。。。。。                    

 

     당연히 모든 언론들은 일제히 그 말도 안 되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 방송사와 제작자들을 비난했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만으로는 더는 충분치 못한 순간이 왔고, 그들에겐 고통의 쇼가 필요’하다는 책의 첫 문구처럼,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프로그램을 시청한다. 허약해지고 쓸모없게 된 사람들을 골라내 죽이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채찍질을 당하며 필요없는 공사에 동원되는데도, 사람들은 비난을 할 뿐 여전히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

 

     수용소에 끌려간 사람들 중 한 명인 파노니크(CKZ 114)는 이런 반인륜적인 상황에서도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그런 그녀의 모습은 그녀의 빼어난 외모와 함께 순식간에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는다. 납치된 사람들을 괴롭히기 위해 선발된 ‘카포’들 중 하나인 즈데나 또한 그런 그녀에게 매료되면서,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갈 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파노미크는 수용소를 나올 수 있을까? ‘집단 수용소’라는 프로그램의 결말은 어떻게 될까?

 

 



. 감상평 。。。。。。。                    

 

     하지만 저자의 문제 제기는 단지 그런 비윤리적이며 시청률지상주의에 빠져있는 방송 제작자들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사태가 이지경이 된 더 큰 원인으로 시청자들, 대중들을 꼽는 듯하다. “이런 파렴치한 방송을 보는 이상, 시청자들이 이 방송을 만들어냈다고도 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파노니크의 말은 이를 잘 대변한다. 사람들은 한없이 ‘집단수용소’를 비난하지만, 동시에 너나 할 것 없이 그 프로그램의 열렬한 시청자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리모컨으로 다음에 죽게 될 사람들을 투표하기까지 한다! 그것이 스토리상의 죽음이 아니라 실제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아울러 위의 두 가지에 대한 고발은 자연스럽게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부작용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먹고 사는 언론, 비평가들, 정치인들 모두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저자는 단단히 화가 난 것처럼 보일 정도다.

 

 

     물론 저자는 비난만으로 책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런 문제들을 통해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묻고 있다. 거추장스럽게 꾸미는 것들이 모두 제거된 극한의 상황에 처했을 때,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더 잘 드러나는 법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자는 그에 대한 답을 분명하게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 가장스러운 프로그램을 중지시킨 것은 협박과 위협이었고, 그 목적은 단지 한 개인에 대한 사랑이었다. 물론 파노미크의 작은 투쟁이 수용소 내에서 잔잔하지만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고,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이일을 어찌할꼬?

 

     아멜리 노통브의 작품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눠질 수 있다. 하나는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로 시작하는 자전적 소설류(‘사랑의 파괴’, ‘배고픔의 자서전’, ‘공격’ 등)와 ‘살인자의 건강법’으로 시작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고발이 담긴 작품들(‘적의 화장법’, ‘오후 네 시’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 작품은 후자 쪽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한동안 저자의 자전적 소설들만 읽으며 보냈었는데, 오랜만에 저자의 날카로운 시각을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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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도둑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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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그대로 깨끗한 감동을 주는 책이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느낌이다. ‘수국꽃 정사’의 묘사력이나, ‘나락’에 나오는 사회적 음모에 대한 비판, ‘죽음비용’에 나타나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고찰, ‘히나마츠리’의 감동, ‘장미도둑’의 동심어린 서술... 어느 것 하나 버릴 데가 없을 것 같은 책이다.

        일본 작가가 쓴 책을 몇 권 읽어보기는 했지만, 이 책만큼 감동을 주는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움베르토 에코보다는 덜 냉정하고, 베르나르보다는 문학성이 더 강한 느낌이다.



        단편소설들의 모음집인 이 책은, 각 이야기마다 생각을 해 보게 만드는 작품들이었다. ‘나락’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유능한 인재를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조롱했는지, 그러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가 남을 밟고 올라가려고만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게 만들고 있으며, ‘죽음비용’을 통해서는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값으로 얼마가 적당할까 하는 생각꺼리를 제공하면서 죽음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아름다운 죽음이란 어떤 죽음일까.


        역시 소설에는 문학성이 들어가야 하는가 보다. 그동안 많이 읽었던 역사소설류에서는 잘 느낄 수 없었던 감동이 진하게 배어들어왔다. 좋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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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노트 1 (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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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미』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이다. 제목인 『타나토노트』는 '죽음'과 '여행자'라는 의미의 그리스어를 합쳐서 만든 조어.




     이 소설은 죽음 이후의 세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시도를 그리고 있다. 일종의 독약을 통해 죽음에 이르게 만든 뒤, 전기충격으로 깨어나게 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임사체험을 시키고,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사후세계의 지도를 완성해 나간다는.. 말만 보자면 허황되기 그지 없는 내용이지만, 베르나르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고 여러가지 철학적인 질문들을 소설 안에서 던지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저자는 여러가지를 소설 안에서 말하고 싶어한다. 절대적인 선과 악의 구분, 이와 연관되어 천국과 지옥에 대한 사색, 인과응보, 숙명론, 영생과 같은 기독교적인 주제들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이는 저자가 무신론자, 적어도 기독교적인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래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서양에서 태어났기에, 기독교적인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베르나르에게서 나타나는 위의 주제들은 온통 뒤죽박죽인 채,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인간 이성의 가치를 매우 높게 보고 있기에, 이성에 따라 합리적인 삶을 사는 것으로 선을 이룰수 있다는 생각이 엿보이고, 모든 종교는 하나라던가, 종교의 목적은 평화라는 주장까지 보인다.

     근본적으로 하나님, 혹은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배제하고 접근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이 그 안에서 던지고 있는 여러 질문들에 명쾌한 해결책을 내지 못하고, 언제나 회의주의자와 계몽주의자의 사이에서 왔가갔다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점이 내가 베르나르에게서 가장 아쉬운 점이다. 작가 개인으로써의 베르나르의 소설은 상당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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