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제국의 체계 안에서 일하시는 것을 보는 이들은

결국 급진적 비폭력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윤리적 경계가 언제나 명확하지 않으며,

인간 사회에 만연해 있는 사악함은

어려운 결정이 융통성 있는 이상을 요구할 수 있는

복잡한 윤리적 환경을 조성한다고 도전할 수도 있다.


- L. 대니얼 호크, 『하나님은 왜 폭력에 연루되시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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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 설교 이렇게 하라
브라이언 채플 지음, 안정임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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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브라이언 채플이라는 이름을 오래 전에 들은 기억이 있다. 아마도 신학대학원 시절 설교학 강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시드니 그레이다누스와 함께 설교학의 대가 중 하나로 배웠던 것 같다. 사실 그 시절에는 배워야 할 것이 워낙에 많았기에 하나하나에 집중해 가며 읽거나 할 여유가 없었다.(물론 내 관심을 끄는 책들은 도서관에서 잔뜩 읽긴 했지만...)


사실 설교학은 실천신학 분야 가운데서도 가장 실천적인 학문이다. 설교는 모든 목회자들의 어깨에 지어진 고달프면서도 영광스러운 짐이니까. 특히나 한국교회의 특성상 담임목사의 경우 매주 적지 않은 수의 설교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든 설교문을 탁월한 수준으로 준비하고 설교하는 건 말 그대로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워진다.


때문에 설교를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하는지는 목회자로 훈련받을 때 신경 써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다. 하지만 이게 어디 고작 한 학기의 과정으로 충분히 갖춰질 리가 없으니, 결국 신대원을 졸업한 후에도 대부분은 자기가 좋아하는 설교자의 영상이나 글을 보며 따라하는 식으로 스타일을 만들어 가곤 한다. 그러나 좋은 설교문은 유튜브 영상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게 문제. 설교의 스타일을 배울 수는 있어도, 내용을 배우기에 동영상은 사실 쉬운 매체가 아니다.


결국 쉴 새 없는 설교의 홍수 속에서 버텨나가기 위해서는 좋은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 틀이라고 해서 모든 본문을 같은 형식으로 설교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중요한 건 본문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어떤 포인트에 집중할 것인가, 그리고 그 내용을 어떤 식으로 회중의 삶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 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관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관점이 없다면, 그때그때 설교자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본문을 읽고 적용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이 책의 저자 브라이언 채플은 이른바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틀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 책은 이론적인 설명보다는, 그 틀을 따라 하는 열두 편의 설교문을 실제로 실어서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것이 어떤 형태를 띨 수 있는지를 소개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물론 단순히 설교문을 옮겨 놓기만 한 것은 아니고, 각 문단들이 전체 원고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왜 그런 내용이 그 자리에 위치하는지 등을 단락으로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고, 이론적인 부분 역시 간략하게나마 각주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환기시킨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크게 깨달았던 건, 내가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하나의 틀로 성경 전체를 바라보고 풀어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또 실제로 유효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그런 식의 접근이 모든 본문을 설명해 내지 못하거나, 종종 견강부회 식의 적용으로 이어질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는 건, 결코 모든 본문에서(이를 테면 구약의 어떤 임의의 본문에서도) 바로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방식의 해석을 취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책에 실린 일부 설교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등장하거나 그분의 교훈이 제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그리스도 중심 설교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과 역사의 중심이라는 전제 아래, 인간의 죄성(여기서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드러난다)과 이를 극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 은혜의 핵심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그리고 새로운 거룩한 삶(이건 그리스도와 연합을 할 때 가능하다)에 대한 강조 때문이다.





분명한 ‘틀’ 안에서 설교문을 작성하는 것이 매번 비슷한 느낌의 설교만 하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이 책에 실린 열두 편의 설교가 각각 다양한 방식과 유형으로 작성되었다는 점을 통해 해소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려보다 훨씬 흥미롭고, 또, 섬세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순서가 좀 뒤집어 진 것 같긴 하지만, 이 책의 이론서에 해당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이 정도면 썩 괜찮은 책이 아닌가 싶다. 설교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고 싶은 독자에게 분명 도움이 될 것 같다. 또, 한편으로는 꼭 설교자가 아니더라도 성경에 대한 건전하면서 안정적인 이해를 추구하는 독자에게도 분명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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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의 주체는 시민, 보통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다.

실제로는 ‘보통사람’은 선거 때 홍보 문구에만 등장하고,

엘리트가 정치를 주도한다.

정치인, 관료, 기업가, 언론인 등 힘센 사람들이 여론과 정책을 주무르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좌지우지한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폐해다.

이 폐해가 심해지면 썩은 세상 모조리 뒤집어엎자는

포퓰리즘의 분노와 음모론이 창궐하기도 한다.

포퓰리즘은 기득권을 욕하지만 실제 공격하는 대상은

여성, 비정규직, 이주민 같은 사회적 약자다.

그들이 고통의 근원으로 지목되고, 을들끼리의 싸움이 격화된다.

오늘날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조형근, 『키워드로 읽는 불평등 사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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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책은 조금 무거운 주제를 다룹니다.
한 유명한 신학자의 성범죄에 관한 내용인데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바른 방법이 무엇인지,
그리고 문제의 원인을 풀어가려면 어떤 것이 필요한지에 관한
고민이 담겨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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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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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3 쿠데타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다. 다행이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시도는 국회의 빠른 대처로 금세 무산되었지만, 반란을 일으킨 대통령과 그 수하들은 사법 절차의 진행을 물리력으로 저지하는 동시에 폭동까지도 조장하면서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또, 심지어 상황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여당은 자신들도 소극적으로 동조했던 내란을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대통령 탄핵을 방해하고 저지하려는 패악질을 부리고 있다.


상황이 이러니 이 책의 제목이 더 눈에 들어온다.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쥐고 흔드는 일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식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지만, 또 그런 일들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기도 하는 게 현실이다. 사실 어느 집단이든 극단적인 무리는 더 눈에 띄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과대 대표되기 마련이니까.





이 책은 미국과 유럽의 역사를 중심으로(가끔 남미나 아시아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다수결이라는 민주적인 원칙을 깨드린 예들을 보여주며 시작된다. 사실 민주주의가 시행되던 초기에는 참고할 만한 예도 부족했고, 그래서 정권교체라는 것이 가져올 여파에 대해 굉장히 겁을 냈던 것 같다. 정권을 이대로 넘겨주면 자기들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정당한 선거의 결과마저 부정하고자 하는 내적 요인이 되었다.


이런 두려움은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따르는 체 하고 있지만 내심 권력을 놓고 싶어 하지 않는 가짜 민주주의자들이 민주적 질서를 어지럽히고 망가뜨리는 원인이 되었다. 예컨대 20세기 초 프랑스의 보수정당이었던 “공화연맹당”은 점차 극우 단체들과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결국 공식적인 정당의 구성원과 폭력적인 활동가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나중에는 청년애국당이라는 극우 폭력집단을 당의 “돌격대”로 지칭하더니, 1934년 2월 6일 발생한 폭동을 일으킨 범죄자들을 지지하기에 이른다. 이건 남 일 같지가 않다.






책의 중반부터는 본격적으로 미국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애초에 미합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타협의 산물로 탄생한 것이었고,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 중 상당수는 민주주의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덕분에 민주적인 절차나 제도보다는 합중국에서 이탈하려는 주들을 회유하기 위한 제도들이 덕지덕지 붙어버렸고, 저자들은 그것들을 가리켜 “미국은 언제나 반(反)다수결주의 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었다”고 말할 정도다.


책의 제목인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하는 질문은 결국 미국의 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반(反)다수결주의적 요소들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막대한 권한을 가진 소수의 종신 대법관 제도(의회의 다수가 통과시킨 법안을 소수의 지명직 판사들이 무효화시킬 수 있다)가 있고, 비슷한 제도를 가진 다른 나라들과는 다르게 강력한 권한을 지닌 상원의 존재(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양원 모두에서 다수가 필요하다), 그리고 인구수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각 주별로 2명씩 배당된 상원의원 제도, 소수가 다수가 지지하는 입법을 영구적으로 가로막을 수 있는 필리버스터 제도, 작은 주에 특혜를 부여하고 결과적으로 더 적은 득표를 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게 하는 선거인단 제도, 상하원 모두의 2/3가 찬성하고 전체 주의 3/4가 비준해야 가능한 어려운 헌법 개정 요건 등이 포함된다.


책 후반에는 이런 미국의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한 몇 가지 제안이 등장하지만, 문제는 이런 개혁도 헌법 개정사항들인지라, 앞서 말한 개헌의 높은 문턱을 생각해 볼 때 쉽게 실현될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그러는 동안 미국에서는 힐러리 보다 적은 수의 표를 얻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미국의 민주주의는 (그리고 그 영향력을 생각하면 전 세계의 민주주의도) 명백히 후퇴했다. 책 말미에 저자들은 “미국인들은 지난 7년 동안 탈진 상태에 빠졌다”고 적으며 한숨을 돌리지만, 이제 또 다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 전 세계를 상대로 깡패 짓을 시작한 지금, 저자들은 뭐라고 할까.



제목이 확 땡겨서 폈지만, 어떤 민주주의 일반의 후퇴와 해법을 제시해 줄 거라는 기대와 달리, 미국의 정치 상황에 국한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라 살짝 실망스럽다. 그래도 역사라는 게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모습으로 반복되곤 하는지라, 책 초반에 실려 있던 다양한 반 민주주의적 사건들은 오늘날에도 (그리고 슬프게도 우리나라에서도) 거의 그대로 반복되는 모습이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망해 보는데 도움이 되려나(그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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