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양용의 지음 / 성서유니온선교회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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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신들의 스승께서는 극심한 고난과 수치스러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고 계시는데,

그 고난과 죽음의 길에는 관심 없고

오로지 더 놓은 지위에만 사로잡혀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매우 역설적이면서도 충격적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는 복음서에 제시된 복음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핵심적인 사항임을 지적한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한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에 대한 평신도와 목회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책을 쓰게 되었음을 밝힌다.

        저자는 이 책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차분하게 정리’한 것이라고 밝힌다. 어떤 새로운 주장을 펴기 위한 논문의 성격이라기보다는, 이제까지 발표된 여러 주장들을 저자의 하나님 나라 이해에 준거해 차근차근 정리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성경본문 자체가 많이 수록되어 있고, 그렇게 실린 본문들의 문맥적 의미를 살피는데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그 의미들의 실천적인 면까지 함께 실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라’는 지리적, 지역적 의미를 갖고 있기 보다는 다스림이나 통치와 같은 추상적 의미를 지닌다. 그 하나님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지닌다. 책의 나머지 부분에는 성경의 비유나 기적, 성령의 임함 등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의 교리가 올바로 우리에게 인식될 때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조목조목 살핀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에 실린 ‘하나님 나라’라는 주제의 핵심적인 교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하다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이미 다른 책이나 자리를 통해서 이 책에 실린 내용의 대부분의 핵심적 사항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장점은 그렇게 알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여러 주제들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여러 자리를 통해 얻게 된 내용을 한 자리에서 정리된 모습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물론 그렇게 될 경우 각각의 논의가 상당히 축약된 형태로 실릴 수밖에 없다는 단점도 있겠지만 말이다.)

        내용도 약간 수준은 있지만, 성경을 진지하게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난해하거나 한 것은 아니다. 문장 역시 처음부터 우리나라 말로 쓰였기 때문에 대체로 깔끔하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정리해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추천해줘도 괜찮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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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IVP 조직신학 시리즈
에드먼드 클라우니 지음, 황영철 옮김 / IVP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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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중심이 아닌 교회론은 자멸하는 것이고 거짓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

그 분의 목표를 무시하는 것은 그분의 주되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제목과 저자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보수적인 입장에서 서술되어 있다. 저자는 우선 성부, 성자, 성령의 교회라는 측면에서 교회의 본질을 살피고 있으며, 교회의 외적인 표지는 무엇인지, 교회의 기능과 역할은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이 주제들에 관한 성경적 서술은 매우 풍성하고 깊게 되어 있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자,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것이고, 성령님과 함께 하는, 세속의 단체들과는 분명히 다른 특별한 모임이라는 저자의 설명은, 오늘날 교회를 단순한 사교클럽 정도의 수준으로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오해를 분명하게 집어줄 수 있는 책이었다. 

        교회 자체에 대한 서술에 이어서 나온 것은 교회와 사회와의 관계성에 관한 서술이었다. 역시 보수주의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저자답게, 교회와 사회와의 첫 만남을 예배(예배에 있어서 세상의 문화를 얼마큼 받아들일 것인가)와 선교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이어서 나온 것은 보다 실제적인 문제, 즉, 세상의 문화와 정치에 교회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를 살핀다.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기인 이번에 ‘문화연구’라는 강의를 들었기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자세하게 살펴 읽었지만, 아쉽게도 그다지 깊이 있는 서술을 하지는 못한 듯싶다. 관련분야의 전문가적 서술이라기보다는, 비전문가의 개괄적인 서술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세 번째는 교회 내에서 나타나는 각종 은사에 관한 설명이다. 저자의 은사에 대한 생각은 매우 제한적이어서, 예언이나 방언과 같은 은사는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설명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여성의 사역에 관한 견해도 매우 완고한 입장이다. 물론 아직 이런 부분에 관해 나만의 입장을 분명히 주장할 수 있는 시점은 아니다. 어쩌면 그런 입장이 되었을 때 나 또한 저자의 입장에 동의할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은사들에 대한 지나친 제한은 오히려 지나치게 합리주의적인 생각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옅게 든다. 




        전반적으로 매우 잘 짜여있고, 교회론에 관한 건전한 교훈을 담고 있는 책이다. 청년들에게 교회에 관해 설명해 줄 때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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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많이 오던 날.

과외를 끝내고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생과자를 만들어 파시는 할아버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연휴라 집에 계실 어머니가 생각이 나서 과자 한 봉지를 사려고 차로 갔죠..
 

 

한 번, 전에도 그 할아버지에게서 생과자를 산 적이 있는데,

너무 멋진 할아버지시더라구요. ^^

과자 맛이야.. 생과자라면 어디나 다 비슷비슷 하겠죠.

(땅콩이 더 들어가고 좀 덜 들어가고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하지만 할아버지에게서는 왠지 여유가 느껴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또 '여유'라는 단어를 무척이나 좋아하지 않습니까.. ^^

 

 

아버지의 '여유'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이 바로,

할아버지가 주시는 '돈봉투'인 것 같습니다.

2000원 짜리 생과자 한 봉지를 사면

할아버지가 슬그머니 돈봉투 하나를 넣어주시거든요. ㅋㅋ

 

 
행에서 한번에 지폐를 많이 인출하면 주는 봉투 있지 않습니까?

그 두툼한 돈 봉투를 봉지에 같이 담아 주시는거죠.

K모 은행의 이름이 찍힌 돈봉투.

짐작하셨을지 모르겠지만, 물론 그 안에는 돈이 아닌 생과자가 들어있습니다.

 

 

들다가 깨졌거나 보관하다가 한쪽이 부서진 것들..

하지만 완전한 것들도 제법 들어있더군요.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완전한 것들 사이에 슬쩍 몇 개 넣었을 수도 있을텐데,

할아버지는 굳이 일부러 그런 것들을 골라내고,

골라낸 것들을 따로 담아서 사람들한테 덤으로 주시는 것이죠.

중요한건, 봉투가 제법 두툼하답니다.. ^^;;



 

진 할아버지 아닌가요?

당장 필요하지도 않으면서 가지려고만하는 요즘 사람들..

필요한 것만 가지고, 나머지는 나누어 줄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면

세상이 좀 더 멋지게 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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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믿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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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움베르토 에코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뽑아 든 책이다. 그리고 읽은 후의 느낌은, 역시 이름값은 하는 책이구나 싶었다. 책은 신선한 시도를 담고 있었다. 종교인과 비종교인(여기서의 종교는 카톨릭이다) 사이의 대화라는, 나로서는 흥미가 생길만한 시도였다. 일반적인 대화의 장면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상대방에 대한 몰이해를 근거로 한 난장판 식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의 관점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사고를 한 사람들 사이의 대화였기 때문에, 그 대화의 주제뿐만 아니라, 주제에 대한 대답에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매우 깊이 있는 대화, 아니 토론이었다. 정치인들이 나와서 물고 뜯는 싸움박질이나 하는 삼류 텔레비전 토론과는 그 격이 달랐다. 하지만 그래서 더 우려가 되기도 한 대화였다.




        주제는 크게 네 가지였다. ‘세계의 종말’, ‘인간 생명의 기원’, ‘교회의 여성관’, 그리고 ‘비신앙인들에게 있어서의 윤리의 근원’이라는 문제였다. 하나 같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고, 형이상학적인 ‘근원의 문제’였다. 대부분의 대화에서는 에코가 보낸 공개서한에, 마르티니 추기경이 역시 공개적인 답신을 보내는 형식으로 이뤄졌고, 마지막 대화에서만 그 순서가 바뀌었다.

        에코는 묻는다. ‘신앙인들과 비신앙인들이 공유할 수 있는 희망의 개념이 존재합니까?’(20:9-10) 세기말을 앞두고 있는 상황(책이 만들어졌을 때의 상황)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들이 함께 시작할 수 있는 시작점이 과연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그런 개념은 어떤 식으로든 실재할 것’(26:5-6)이라고 전제한 뒤, 그 구체적인 모습으로는 ‘고결한 가치’를 위해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그러면서도 ‘고결한 가치’가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피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매우 모호한 일치점만을 제시-이것이 한계점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하는데 그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 땅에서의 인류의 공동번영’을 위한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는 추측만 가능할 뿐이었다.

        생명의 기원은 어디서부터 생각해야하느냐는 에코의 물음에, 추기경은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바로 그 지고하고 구체적인 생명과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47:12-14)이라고 옳게 지적 하면서, 그 시작과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다시 ‘누구나 한 인간 생명의 운명과 대면할 때마다 느끼는 고민과 불안’(51:1-2)을 언급하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공통의 ‘그 무엇인가’를 기초로 접근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질문에서 에코는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여성차별(?)’에 대한 논의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면서, 교회의 입장을 묻는다. 추기경은 ‘신학은 가능성이나 <만일 ……라면 일어났을 수도 있는 일>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며, 계시 진리의 역사적이고 실증적인 사실들에게 출발하여 그것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82:20-23)이라고 교회가 취할 수 있는 입장의 한계를 분명히 하고,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지위 문제는 어떤 ‘신비’(84:20)가 있으며, 그 신비는 아직 교회에서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86:7-8)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네 번째 질문은 마르티니 추기경의 것이다. 신앙인에게 있어서의 윤리의 기준은 신에게서 오지만, 비신앙인의 윤리는 어디에 기초를 두고 있느냐는 물음이었다. 과연 에코는 어떤 ‘논리적인’ 대답을 할 것인가. 놀랍게도 에코는 ‘제약에 대한 보편 개념’(104:14-15)이라는 것에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나간다. 그 관념은 자연적인 것(본유관념)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는 듯 하다. 동시에 인간에게는 ‘타자에 대한 의식’(106:5-7)이 또한 있고, 거기서 파생되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삶의 계속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절대적인 의무감’이 윤리의 근원이 되는 것이라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대담자들이 당대의 지식인들인 만큼, 하나하나가 매우 깊이 있는 질문과 답변들이었다. 때문에 자칫 깜빡하는 사이에 논지를 잃어버리기 쉬웠다. 책을 읽고 가장 의아하게 여겨졌던 부분은, 충실한 인본주의자, 이성주의자로 여겼던 움베르토 에코의 대답이, 너무나 ‘종교적’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근원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면, 종교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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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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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당신은 어떤 걸 상상했지? 여긴 연극 무대가 아니잖아!
끝내고 싶다고 해서 막만 내리면 되는 줄 알아?

게다가 연극이 그렇게 지독했던 건 바로 당신 탓이야!

나 역시 무기력하고 못난 인간이야.

사람은 자기 안에 정체되어 있는 커다란 덩어리를 갖고 있지.

삶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잃고 체념하는 순간 그게 밖으로 나오는 거야.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의 희생물일 뿐이야.」 



 

        목차가 없다. 지난번 읽었던 같은 작가의 책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에서와 마찬가지였다. 목차가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목차의 역할은 책의 소제목들을 일관된 논리를 가지고 배열하는 것이다. 그리고 책의 소제목들의 역할은 독자가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을 대비해 ‘여기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하고 전체와 부분의 연관성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목차가 없는 이 책의 저자는 무슨 생각으로 소제목을 하나도 정하지 않았을까? 단지 글이 짧기 때문일까? 어쩌면 ‘나는 그런 목차 없이도 전체 이야기의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고, 독자의 흥미도 계속 고조시키면서 끝까지 이야기를 진행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은 아닐까? 사실이 그러했으니 뭐라고 더 말 할 수도 없고..

 

        고등학교 교사를 은퇴한 후, 한적한 시골로 부인과 함께 이사를 온 에밀. 일주일 후 이웃집에 사는 베르나르댕이라는 사람이 찾아온다. 단순한 이웃집 사람의 사교성 방문으로 알았지만, 실수였다. 그의 방문은 매일 오후 네 시면 거르지 않고 이루어진다. 더구나 그는 방문을 해 놓고도 아무런 말도 않는다. 아무리 많은 질문을 해도 딱 두 마디, Yes와 No로 대답할 뿐이다. 이런 이상한 방문자가 있는가.

 

        에밀은 처음에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 방문자를 바라보지만,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그의 방문은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어느 누가 매일 오후 일정한 시간에 찾아와서는 커피 한 잔을 당당히 요구하며 두 시간 동안 그저 ‘앉아 있다가’ 가는 방문자를 환영하겠는가. 더구나 그는 무뚝뚝하고, 무례하며, 오만했다.

 

        무려 2개월이나 매일 오후 불청객을 맞이해야 했던 에밀은 결국 찾아온 그에게 욕을 퍼부으며 쫓아내고 만다. 하지만 남는 건 감정을 절제하지 못했다는 씁쓸함 뿐. 여기서 처음으로 베르나르댕이라는 인물이 불쌍하게 느껴진다. 이전에는 독자 역시 에밀의 시각에 따라 그가 고집스럽고 오만한 불청객으로 느껴졌지만, 에밀의 분노의 폭발은 독자와 에밀 사이의 거리를 약간 벌려놓는 대신, 베르나르댕과의 거리를 좁혀놓는다. 왜 그는 그런 성격의 사람이 되었을까? 저자는 책이 끝나는 순간까지 그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독자는 단지 상상만 할 수 있을 뿐.

 

        그 후로 얼마간, 해방의 기쁨도 잠시였다. 에밀의 아내 쥘리에트는 베르나르댕과 그의 아내 베르나데트에게 동정과도 비슷한 감정을 품게 되었고, 에밀과 쥘리에트 사이에는 미묘한 냉기류가 흐른다. 그러던 중 베르나르댕의 자살미수 사건이 일어나고, 에밀이 이를 극적으로 발견해서 그를 구조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베르나르댕의 태도에는 전혀 변화가 없고, 에밀은 그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최후의 결정은...

 

 

       책은 처음부터 에밀의 심리를 따라간다. 1인칭 관점의 소설이다. 하지만 이 소설이 1인칭 관찰자인지, 1인칭 주인공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이 크게 달라진다.

        아무런 즐거움과 기쁨도 없이 단조롭고 지루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베르나르댕의 모습을 보면서, 희망과 의지, 꿈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나 주의 사람들에게)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심지어 (역사 자신에게나 주위 사람들에게) 위험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되기도 했고, 문제에 닥쳤을 때 대처하는 에밀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그의 모습이 나에게는 없는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밖에도 책에는 저자가 남겨놓은 여러 가지 암시적인 단서들이 있어서 읽고 난 뒤에 한참 생각해 보아야 할 책인 듯싶다.

 

        실망을 주지 않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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