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암을 앓는 가족을 호스피스에 보내려다가

거기서 식사를 제대로 챙기지 않아 그만뒀다는 분을 봤다.

그 마음을 알기에,

환자에게는 먹는 것이 또 다른 고통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는 평소보다 훨씬 적은 양으로도 생존이 가능하며,

죽어가는 이가 먹는 걸 멀리하는 것은 그게 편해서라고 한다.

억지로 먹이거나 고칼로리 영양을 인공 공급하는 것이

오히려 환자를 괴롭힐 수 있단 얘기다.


- 김이경, 『애도의 문장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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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완벽한 방법
앤서니 맥가윈 지음, 최이현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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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손에 든 철학사 책이다. 그런데 제목이 꽤나 애를 썼다. 개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방법 운운하는 내용이 철학사 제목으로 붙을 줄이야. 그만큼 내용을 좀 더 편안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리라. 저자도 무슨무슨 교수 따위가 아니라, 철학과 정치를 공부한(그래도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글쓰기 강사이자 작가이다. 번역을 거쳤지만, 확실히 교수들이 쓰는 졸린 문장과는 느낌이 다르다.


책은 저자가 자신의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하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이야기다. 정말이다. 개와 대화를 한다. 작품 속 개는 실제로 인간처럼 말도 한다. 물론 이 대화가 다른 사람에게는 저자 혼자 떠드는 것처럼 보이는 걸로 묘사된다. 개의 이해력은 그래도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니 고등학교 수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너무 진지하게 여기진 말자).





이야기의 시작은 윤리학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관한 고민들. 그리고 존재론으로 넘어갔다가 인식론으로 이어진다. 책의 후반은 과학철학에 관한 전반적인 소개, 그리고 마지막에는 생과 사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사고를 풀어놓는다. 말 그대로 서양 철학사 전반을 소개하는 셈이다.


대화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리고 조금 어려운 개념이 나오면 개의 입을 통해 다시 설명을 요구하고, 저자가 풀어서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 물론 이런 책은 어느 정도 사전 정보가 있으면 이해하는 데 훨씬 좋고, 간단한 개념서의 한계 상 깊은 내용까지 설명되지는 않지만, 이 정도의 개념설명이라면 교양 수준으로 알아둘 만하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생 정도면 어느 정도는 이해도 가능할 듯하고.





문제는 이렇게 한 사람이 다양한 철학의 제 분야를 설명할 때, 어쩔 수 없이 저자의 입장에 치우신 설명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입장은 뭘까? 윤리학에서 저자는 “모든 상황에 완벽한 해답을 주는 윤리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영역에 맞아 들어가는 윤리학이 있을 뿐”이라는 상황윤리에 가까운 주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애초에 선악이라는 개념이 궁극적으로는 애매하다는 입장이기도 하다).


인식론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로 정리되는데, 이 논쟁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자기 외부의 세계를 인지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최종적으로 어떻게 이 두 개의 영역이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어느 철학자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비트겐슈타인으로 넘어가면 아예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고 덮어버리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저자도 마찬가지여서 이 부분에서 무슨 묘수를 내지는 못한다.


전반적으로 애매하고 모호한 지점들이 항상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저자가 확신하는 건 신에 대한 믿음이나 관념은 틀렸다는 명제인데, 이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 저자가 사용하는 논리는 저자의 선입관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인지 별다른 설명도 없다. 기본적으로 유물론적 관점을 지닌 저자의, 아니 어쩌면 현대 철학이 지닌 한계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좀 떼어 놓고 보면, 전반적으로 쉽게 잘 쓰인 철학 개론서다. 특히 철학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론들의 한계까지도 적절하게 짚어줌으로써, 좀 더 입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정도만 해도 읽을 만한 책이라 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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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들의 경우에 그들 자신의 가르침을 직접 감독해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2세기 중엽에 이르면 지역 공동체의 주교로 선출된 사람은

관례적으로 자신의 신념과 신학을 충분히 일목요연하게 표현하는

신앙 선언문을 쓰고는 했다.

그리고 앞으로 그의 동료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인근 지역의 다른 주교들에게는

피택자가 직무를 신실하게 감당할 만한 충분한 지식과 정통성이 있는지

그 자격 여부를 판단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그런 판단이 내려졌을 경우,

이웃 지역의 몇몇 주교들이 새로 간택된 주교의 위임식에 참여하고는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와 신학적인 합의에 있음을 몸소 증언했다.


- 후스토 곤잘레스, 『신학 교육의 역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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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 - 금융 자본의 지배에 맞선 기독교 신앙의 비전
캐스린 태너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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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부터 기독교와 자본주의 사이의 밀착 관계에 관한 유명한 주장이 있었다. 최초의 사회학자라고도 불리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라는 책에 나온 주장이 그 기원이다. 책에서 베버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에는 단지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기반만이 아니라 사상적인 측면의 지지도 필요했고, 바로 여기에 그가 뽑은 칼뱅주의의 특정한 신학이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많이 착각하는 것처럼, 베버는 기독교가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사실 자본주의 발전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었고, 그 중 하나로서 당시 유행하던 기독교 신학의 영향력을 강조했던 것이다. 하지만 베버의 시대로부터 1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의 주장의 일부를 과장해서 기독교가 자본주의적 발달을 이끌었다는 식의 왜곡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게 현실이다.(사실 베버는 자본주의도, 기독교도 그리 긍정적으로만 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백 번 양보해 자본주의 발달에 기독교가 기여했던 점이 있다고 치자. 하지만 그게 곧 자본주의가 기독교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예컨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기독교회에서 만들어낸 종교재판이 기독교의 본질과 상관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테니까. 또, 베버가 봤던 자본주의와 그로부터 100년이나 지난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 즉 금융자본주의는 그 명칭만이 아니라 내용 또한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다.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한 채, 마지 무슨 교리를 반복하듯 기독교와 자본주의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건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한다. 저자는 책 초반, 이 책을 쓴 자신의 목적은 베버와는 정반대라고 밝힌다. 그는 “기독교 믿음이 어떻게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뒷받침하기보다는 오히려 약화시키는지 보여 주고자”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책 제목에도 나와 있는) “새로운 자본주의”란 금융자본주의를 말한다.





책의 내용의 대부분은 금융자본주의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 작동법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어 있다. 금융자본주의란 금융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말한다. 쉽게 말해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더 높은 수익률을 위해 사회질서의 전반이 재편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피케티도 지적했듯, 이미 금융자본의 수익률이 전통적인 노동을 통한 수익률을 아득히 추월해 버린 상황에서, 이 자본이라는 권력을 가진 이들을 위해 온갖 제도들이 재정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금융자본주의에 의한 지배는 결과적으로 다양한 종류의 불평등, 격차를 만들어 낸다. 책에서는 금융의 “훈육”을 받았다고 표현되는데, 좋은 포착이다. 현대 사회는 기업과 정부, 개인까지 모두가 돈의 법칙에 복종하며 살아가고 있고, 누군가 이 질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돈이 휘두르는 채찍질을 피해갈 수가 없게 된 시대다.


노동자들은 이 질서에서 이탈하는 순간 생존의 위기를 맞게 되니 어쩔 수 없이 이 불공정한 게임의 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다른 것에 신경 쓸 새 없이 단지 눈앞의 과업에 집중하도록 유도된다. 끝없는 경쟁은 생산성의 향상보다는 개인의 책임에 대한 강화, 즉, 모든 최종적 책임을 개인에게 미루는 식으로 작동할 뿐이다. 이런 경쟁은 모두가 아닌 소수의 자본가들의 이익을 더 늘리는 데만 봉사한다.


이런 식으로 책은 현대의 금융자본주의가 초래한 다양한 문제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비록 어떤 통계라든지 하는 수치가 인용되면서 주장을 뒷받침하는 식은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현대의 자본주의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 지에 대해서 윤곽을 제대로 잡아 준다. 그렇다면 이제 저자의 또 다른 목표였던, 기독교가 이런 현대의 금융자본주의를 약화시키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설명할 차례다.





개인적인 느낌은, 이 책이 이 두 번째 부분, 그리고 어쩌면 이 책의 핵심적인 목표를 제대로 설명하는 데는 좀 약하지 않았나 싶다. 경제라는 영역은 굉장히 실제적인데, 이에 대한 기독교의 비판, 혹은 대안은 조금은 추상적으로만 느껴졌달까.


사실 이런 경향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좀 나타났는데, 예를 들어 2장의 경우 “과거의 사슬에 묶여”라는 시적인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 내용은 오늘날의 노동자들이 과거에 맺은 계약에 묶여 그 이후 발생하는 다양한 변동성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반면 고용주들은 얼마든지 사정에 따라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고.


저자가 이에 대한 기독교의 반론으로 소개하는 건, 회심이다. 기독교는 우리가 과거에 누구였는지(특히 죄에 어떻게 연루되었는지)에서 돌이킴으로써 그것이 일으킨 문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 점에 있어서 과거에 맺은 어떤 종류의 계약이 우리의 오늘과 미래를 사로잡도록 내어주는 금융자본주의와는 다르다는 것.


사실 이건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기독교의 반론이라기보다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식의 자본주의에 기독교의 이론적 배경이 별 상관이 없는 것임을 보여주려는 시도다. 쉽게 말해 기독교의 세례를 금융자본주의에 주지 말라는 것. 여전히 베버를 운운하면서 기독교와 자본주의 사이의 밀착을 강조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반론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기독교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딱히 더 와 닿을 부분도 없지 않을까.



애초에 이 책은 기독교에 기초한 어떤 대안적 경제이론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사실 이 상황이 그런 식으로 해결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다만 기독교가 특정한 형태의 경제정책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듯한 그 지긋지긋한 주장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반박은 될 수도 있겠다. 특히 현대의 금융자본주의 안에서 고삐가 풀린 채 날뛰고 있는 맘몬이라는 우상과, 이를 제어하기는커녕 덩달아 그 숭배의 행렬에 동참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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